<재능이 자꾸 늘어 136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6
* * *
“이게 다 뭡니까?”
구순범 교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표정보다는 그의 머리 위에 얹힌 것에 자꾸 눈길이 갔다. 비만 걸린 브로콜리가 연상되는 거대한 곱슬머리였다. 아프로 헤어스타일을 실물로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그렇다.
이름만 들으면 강원도에서 감자를 캘 것 같은 이 남자는 사실 흑인이며, 본업 또한 과학자라는 반전 속 반전이 숨어 있었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UI소프트웍스 김주현 사장이 씩 웃으며 되물었다.
피차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고들 있었다. 구 교수는 그게 뭔지 알았고, 김 사장은 당연히 마음에 들리란 걸 알았다.
“당연히 그 반대지요. 너무 조건이 좋아서…… 음. 사장님 혹시 사기꾼이세요?”
“그걸 직접 물어보는 분은 처음이네요. 아주 신선해.”
“음,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좋지만…… 그래도 오늘 도장 찍을 순 없겠네요.”
“물론이죠. 변호사 자문을 충분히 구하셔도 좋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고. 도장이 집에 있거든요.”
그냥 사인해 이 사람아.
구 교수가 우리 표정을 읽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부연했다.
“우리 할머니가 서명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럼 부정 타는 팔자라고. 그래서 할머니가 벼락 맞은 나무로 깎아준 특제 도장만 쓰고 있어요. 이게 효과가 기가 막힌다구요.”
부두교 주술사 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어쨌든 오늘의 만남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채 끝났다. 아프로 머리의 순박한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교수실을 나섰다.
한국대 교정을 걷는 내내 김주현 사장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저런 사람이 정말 필요하긴 한 겁니까?”
“예, 물론.”
“물론 대표님 말씀이야 믿지요. 그래도 실적도 없는 사람에게 저만 한 권한을 주기엔 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UI소프트웍스.
미국 쪽 전자 제품을 OEM 받는 기업으로 시작해서 향후 10년 동안 믿기지 않을 성장세를 보일 회사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하면, 10년 동안 물가 성장률과 정확히 일치하는 매출 상승 곡선을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퇴보도 성장도 없이, 자로 그은 듯이 정체된 채로 10년 동안 생존만 하는 회사다.
작정하고 노려도 그렇게까지 제자리이긴 힘들걸.
맞다.
이 회사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매력 포인트가 없다.
중요한 건 회사가 아니라 사내의 연구 개발팀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몇 개의 특허다.
“알겠습니다. 이 건은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지못해 한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김주현 사장.
꽤 유능한 사람이긴 했다. 치열한 OEM 시장에서, 중국 기업과 경쟁해 가며 그 흔한 노동 탄압 이슈도 없이 회사를 생존시켰으니까.
그에게 어떤 탁월한 경영 감각은 없지만, 대신 리스크를 회피하는 방어적인 방침을 철저하다시피 고수했다. 좋게 말해 원칙에 충실하고, 나쁘게 말해 새가슴이다.
그러니 손에 있던 ‘보물’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방치하다 뺏겼겠지.
아무튼.
그런 스타일의 김 사장의 눈에 실적도 없고, 학계에서 외면만 당하는 젊은 흑인 박사를 거금으로 기용해 독립 연구소를 통째로 맡기는 일은 거의 도박처럼 보였을 것이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 말대로 해서 손해 본 적 없잖아요.”
“아유, 아닙니다. 그냥 제가 늙어서 걱정만 늘어서 그렇지요.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난 김 사장이 마음에 들었다.
원칙 주의자이므로 일단 정해진 사안은 마뜩잖아도 어떻게든 해낸다. 자발성은 적지만 일을 맡기만 하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뚝심도 진득하다.
그는 좋은 경영자는 아니지만 내게 적합한 인재이긴 한 것이다.
“오늘은 신축될 공장 부지를 들러 보기로 하셨지요? 같이 내려가시죠.”
“네.”
우린 그 길로 구미까지 내려와 사전 시찰을 했다.
보고는 몇 번 들었지만 직접 와 보는 건 처음. 부지 자체는 차를 타야만 돌아볼 엄두가 날 만큼 큼지막했다.
‘재료는 다 준비됐다.’
UI소프트웍스가 보유한 특허 중 탄소섬유를 성형하는 원천 기술은 CC전자에 인수된 후 환골탈태하여 전 세계를 뒤흔든다.
이 기술을 토대로 그래핀을 대량 생산하는 공식이 완성된 것이다.
그 어떤 기술과 비교해도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학살 수준으로 우월해서, CC전자는 그래핀 시장을 독점에 가깝게 점유하며 일약 세계적 그룹으로 우뚝 선다.
놀랍게도 개발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아니, 개발보다는 발견에 가까웠다고 봐야지. 당시의 수석 개발자였던 구순범 교수가 했던 말을 나는 기억해 냈다.
-……이미 기술 안에 모든 원리가 집약돼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냥 모르고 지나쳤던 거였죠. 제가 한 일은, 솔직히 말해, 채굴에 불과했습니다. 비유하자면 곡괭이 들고 땅을 파서 원석을 캐냈을 뿐인 일이죠.
이 말의 핵심은 10년 뒤의 기술을 당장이라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시당할 때 얼른 채와야지.’
물론 그의 가치는 그게 끝이 아니다.
그래핀 공정을 안정화시킨 이후로 CC전자는 매년 디스플레이, 반도체, 연료 전지의 수준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리며 선두주자로서의 쐐기를 확실히 박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구순범 교수의 연구소가 있었지.
나중에 껑충 뛸 그의 몸값을 생각하면 방금의 계약서는 거의 불공정 계약에 가깝다.
‘상황이 나아지만 지금보다 더 우대해 줘야지. 그 ‘영험한 도장’이 활약할 기회를 자주 드려야겠어.’
우리가 들른 이 부지는 탄소섬유 생산 공장이 건설될 예정이지만, 구 박사의 컨설팅을 받아 그래핀 공정 관련한 기반시설까지 미리 설계해둘 예정이다.
개발이 완료되면 바로 공장에서 찍어 낼 수 있도록.
물론 난 경영에는 취미가 없고 돈도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무기는 많을수록 좋다.’
이길재 외에, 앞으로 날 귀찮게 할 한가한 작자가 세상에 또 나타날까?
모른다.
‘그분’이란 자는 누구인가.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가.
역시나 알 수 없지.
그러나 그 자식이 볼드X트 같은 놈이라 그분인지 아님 그냥 밀양 박씨 박 그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높은 확률로 내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의 준비를 해둬야 한다.
그리고 이곳은 여차할 때 내 히든 카드가 되어 주겠지. 보기만 해도 넉넉한 땅덩이를 앞에 두고 난 뿌듯한 미소를 흘렸다.
‘무럭무럭 커라!’
* * *
공장을 둘러보고 돌아와 설렁탕 한 그릇씩 박살 낸 다음, 우린 커피숍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이 업무에서 잡소리로 옮아갔을 즈음에야 나는 한 남자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삼촌. 오늘따라 말씀이 적으시네요?”
현지 쌤의 삼촌이자 내 금융 대리인인 남자가 한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앉아 있었다.
나도 깜빡했는데, 그는 하루 종일 우리와 함께 있었다.
삼촌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투자의 귀재가 아니라 예언자나 백발필중의 족집게 무당쯤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UI를 인수할 때도 따라와 3대주주이자 대표 이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사장님 뵐 때 거의 함께 하곤 했는데……
뭐랄까, 오늘따라 클로킹이 완벽하셨다. 힘도 좀 없어 보이고.
“……응? 아. 그냥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뭐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설마 또 도박하시는 건 아니죠?”
“설마.”
바로 부정하기는 했는데 뭔가 낌새가 기묘했다.
내 [눈치]가 그의 표정과 숨소리의 질감을 빠르게 더듬었다. 답은 얼마 안 가 도출됐다.
“요새 돈 부족하세요?”
“음. 역시 넌 못 속이겠네.”
“왜요? 제가 벌어다 드린 걸로도 부족하다고요? 그렇게 분별력이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날 뭘로 보는 거야? 막 낭비한 거 아니다. 너 따라서 돈 넣다 보니까 당장 유동자금이 없을 뿐이지.”
하기야 내가 어디 투자한다면 있는 돈 없는 돈 닥닥 긁어모아서 따라오곤 했지.
그의 전 재산 대부분이 주식에 박혀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생활비까지 쓸어 넣을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뭔가 미심쩍어 일단 선을 그어 두었다.
“돈 안 빌려 드릴 거예요.”
“나도 그 정도까지 염치없지는 않다.”
음? 생각보다 담담한데? 사채 같은 문제는 아닌가? 그럼 뭐지…….
빨리 진실을 뱉어 내라는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더니 삼촌이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현지랑은 잘 지내고 있냐?”
“음? 그렇…… 죠? 이 화제 전환은 뭐지?”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하는 말이야.”
잠자코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현지 쌤과의 교류가 많이 없었다.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던 침법 수업도 요새는 보름에 한 번 꼴로 줄었고. 체육관에서도 시간이 안 맞아 엇갈리기 일쑤였다.
“글쎄요 저도 요새는 안 뵌 지 꽤 되어서…….”
“현지, 잘해 줘. 그래 봬도 외로움 많이 타는 애다.”
“…….”
이 화제는 대체 뭘까.
의아했지만 난 잠자코 기울 기울였다.
“우리가 걔 어렸을 때부터 맡아 기른 건 알지? 왜인지는 알아?”
“대충은요. 부모님을 여의었다고…….”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기도 해. 걘 그 전부터 버려지다시피 했으니까.”
“무슨…….”
“그 부모들이란 게 쓰레기였거든. 내 동생년부터 해서 그 호로새끼까지. 현지가 얼굴이 제법 반반하지 않냐. 그것 때문에 불화가 좀 있었지.”
“……왜요?”
“내 동생도 그놈도 썩 잘난 얼굴은 아니거든. 근데 저런 애가 떡하니 태어났잖냐. 남편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겠어?”
친자 확인을 하고 싶었…… 설마?
“그래. 현지는 아직도 친부가 누군지 알지도 못해. 내 동생이 안 가르쳐 주고 날랐거든. 그러다 타지에서…… 뭐, 그런 거지.”
“……이런 말 저한테 해 주셔도 되는 거예요?”
“걔 성격에 스스로 말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너니까 해 주는 말이야. 현지가 넌 좀 각별하게 생각하잖냐.”
참고로 지금은 김 사장도 돌아가고 커피숍에는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재즈 음악이 주변을 덤덤하게 떠돌아 다녔다.
“그래서 걔가 불쌍한 것들만 보면 반사적으로 상관하는 거야. 걘 사랑받고 자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남녀 문제에도 둔감하지.”
“그건 왜요?”
“생각해 봐라. 겨우 다섯 살 된 애가 불륜이니 뭐니 하는 말을 매일같이 들으면서 살았어. 애틋하고 달콤한 사랑, 뭐 이런 데에 환상이 있겠냐?”
“…….”
“뭐 방어기제 그런 거라는데…… 아무튼, 거기다 걔가 좀 예쁘냐. 어렸을 때부터 난리가 아니었거든. 더러운 새끼 본 게 한둘이 아니야.”
젠장. 잠깐만 떠올려도 수십, 수백 가지 상황들이 상상이 됐다.
난 조심스럽게 입을 우물거렸다. 지금 정신을 놓았다간 입 안에서 핏물로 홍수를 낼 수도 있겠다.
“그랬던 걔가 너하곤 좀 편하게 지내니까…… 삼촌으로서 마음도 놓이고. 보기도 좋고 그랬지.”
“……글쎄요. 그랬나요? 저라고 해도 딱히…….”
“뭐, 너도 흑심이야 있겠지.”
“으아니. 그렇다고 저의 순정을 그렇게 막…….”
“뭘 새삼스럽게. 근데 너한테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뭔가가 있어. 눈치가 좋다고 해야 되나. 근본적으로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고 거기에 맞춰 주잖아.”
그랬나? 잘 모르겠다. 적어도 의식해서 그래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현지도 너한테는 그나마 살가운 거겠지. 선을 지켜 주니까. 일정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으니까. 결정적으로, 네가 ‘보살펴야 하는’ 학생인 이상 현지는 네 곁에 있겠지.”
“…….”
“하지만 그 이상은 없어. 난 그게 걱정이다. 그 녀석도 언제까지고 강하진 않을 텐데 자꾸 품기만 해. 누군가의 품에서 쉴 생각은 애초부터 하질 않아.”
“삼촌,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삼촌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길게 신음을 했다.
“커피 다 마셨네. 이만 일어서자.”
잔을 트레이에 담고 자리를 뜬다. 일련의 동작이 이를 데 없이 단호하여 난 더 묻지 못했다. 물어도 말해 주지 않으리란 걸 나는 알았다.
* * *
‘이런 젠장. 이 교도소가 무슨 랜드마크인가. 여기가 뭐라고 자꾸 넘어오는 건데…….’
발바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왠지 모르게 아는 얼굴이 많아진다.
초반에는 괜찮았다. 발바리는 도박판의 전설인 귀수를 담근 자로서 대우받았다. 살인범이므로 두려움의 대상이고, 귀수를 잡았으니 경배 받았다. 그는 빠르게 방의 중심이 됐다.
-내 돈의 원수를 해 줘서 고맙소!
뭐 그런 거다.
도박판 출근해 본 사람치고 귀수한테 안 닦여 본 사람이 없을 테니까.
이 와중에 ‘나 사실 누명 쓴 건데.’라고 말해 봐야 분위기만 싸해질 테니 발바리는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 ‘아는 얼굴’이 동부파의 조폭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얼마 전 영태라는 이름의 사내가 입소해 한 방이 됐다. 영태는 조용했고 웃는 상이어서 언뜻 온화해 보였다. 웃고 있으면 안 그래도 작은 눈이 뵈지도 않았다.
그러나 발바리는 안다.
저놈은 동부파의 행동대장 중 하나였다.
‘……젠장. 저놈하고는 엮이지 말자. 분위기가 싸해.’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발바리는 등골을 저미는 오싹함을 느꼈다.
가소롭다는 투의 눈. 허세를 간파하는 시선. 진짜 조폭의 눈에 이 방의 분위기는 꼬마들이 전쟁놀이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주머니 속으로 주먹을 쥔다. 손 안에서 명함 하나가 꾸깃 구겨졌다.
어느 날 교도관이 전해 준 것으로 거기엔 이한열의 직통 전화가 적혀 있었다. 잠깐이나마 쏠렸던 마음을 다잡듯이 그가 심호흡을 했다.
‘안 해! 안 한다고! 전설적인 압구정동 삐끼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꼬맹이한테 도움 따위 구걸할쏘냐!’
조용히만 있으면 된다. 조용히만. 괜히 깝치지 말고 조심하자.
그런 발바리의 눈에 창가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수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저놈이 뭐기에 찾으려는 건데?’
지은찬.
살인미수로 무기징역까지 받은 불운의 사나이. 항상 혼자 다니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 특이점은, 천으로 곱게 싼 뭔가를 품에 두고 애지중지한다는 점이다.
발바리는 단 한 번 그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지은찬은 한밤중에 화장실에 앉아 그걸 꺼내어 보고 있었다.
언뜻 분홍색 조각으로 보이던 것.
그리고 도박판 경력 20년 차인 그의 눈썰미로 볼 때, 그 조각은 분명 이한열이 찾던 것이다.
‘쳇, 몰라.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휘휘 걷고 있을 때였다.
대체 언제 접근해 왔는지, 영태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발바리, 귀수 네 손으로 담갔다며? 그거 진짜야?”
“……뭐?”
그 순간, 반달로 휘어진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동공을 관통해 버릴 듯한 시선. 침을 꿀꺽 삼킬 즈음 그가 가볍게 던지듯 말한다.
“거짓말. 네가 죽인 거 아니잖아?”
“…….”
아니야. 내가 죽인 게 맞아. 너도 죽여 줄까.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의 입은 들러붙은 듯 꼼짝도 않았다.
겨우 숨이나마 뱉었을 때 영태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대답 따윈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태도로.
-제, 젠장. 빠, 빨간마스크 직속인가? 날 잡으러 왔나? 왜, 왜왜? 나 아무것도 아, 안 했는데? 으아아아아- 따위의 상념이 순식간에 뒷골을 치고 지나갔다.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아까 보다 강하게 명함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래. 인생 선배로서 전화 한 번쯤 해 주어도 좋겠지. 녀석도 얼마나 곤혹스러웠으면 원수인 나를 찾아왔겠나. 한 번쯤 너그러운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