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37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7
* * *
“턱 당기고. 어깨 펴고. 등 숙이지 마. 넌 발성할 때 몸을 웅크리는 버릇이 있더라. 좋아. 이대로.”
“네! 선생님!”
“그렇게 크게 대답할 필요는 없고. 그리고 말 놓자니까. 우리 동갑이라고.”
“네!! 알겠습니다! 열맨!”
“내 말을 잘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다음.”
“쌤! 저 머리 아픈데 침 좀 놔 주시면 안 돼요?”
“여기 한의원 아니다. 다음.”
“아앗…… 차가운 열사님도 좋아. 열맨…….”
“…….”
선배들을 진두지휘해서 편곡을 해 버린 게 좀 컸던 모양이다.
처음엔 날 움직이는 피규어 정도로 생각하던 다른 부원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바뀌었달까, 이젠 아주 광신의 기운이 퍼지는 듯도 했다.
김수림이 실실 웃으며 다가오더니 내 옆구리를 툭 찔렀다.
“쌤! 저한테는 뭐 없습니까?!”
“수림 선배는 왜 또 그래요. 알아서 잘하시잖아요.”
“흐흐. 근데 너 있으니까 엄청 편하다. 야. 네가 내년 회장할래?”
서울역 노숙자에서 여고생으로 복귀한 수림 선배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예쁜 후배를 보는 선배의 뿌듯함? 설마. 저건 수산시장에서 팔팔한 횟감을 발견한 초밥 장인의 눈이었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말 들으니까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네요.”
“아 왜에. 너 한 3년쯤 회장해라. 응? 어때? 내가 나서면 너 책임지고 당선시킬 수 있다!”
“…….”
뭔 미친 소리야 이 여자가.
우리 밴드부 부장 선거-눈 뜨고 거수시키는 아주 비민주적 선거이지만 어쨌든-는 1학기 말에 실시되므로 당장 내년부터 맡는다 쳐도 1년밖에는 못 한다.
그러나 듣고 보니 아주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너무 깊어서 제정신이 아니다.
“괜찮아. 2년만 꿇으면 3년까지는 연임할 수 있어!”
“이 사람 아직 약 기운이 안 빠진 거 같은데.”
“후후. 내 제안에 흔들리지 않는다니 역시 내가 인정한 남자.”
“그 인정 되게 싸구려 같네요.”
“아무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내가 나서면 너 확실히 당선 된다니까! 다름 아닌 부장 선거 경선 승리자로서 하는 말이야.”
뭘 진지하게 생각해 뭘.
게다가 그 경선이란 것이 초코바를 돌리냐 햄버거를 돌리냐에 따라 당선이 갈리는 수준이므로 그 제안은 논할 가치도 없었다.
난 얼쩡대는 수림 선배를 가볍게 들어다 소파에 앉힌 다음 클리닉을 재개했다.
“그냥 듣기엔 괜찮은데, 박자가 살짝씩 밀리고 있어. 여기는 밀리지 말고 밀어야지. 자, 내가 박수 쳐줄 테니까…… 그렇지. 그런 식으로. 감이 잡혀?”
“손목에 힘 빼고. 아령만 냅다 한다고 되니 그게. 손목에 스냅. 정확한 타점. 그게 깔끔한 스네어 소리의 비결이야. 좋아. 그렇게! 그 느낌으로!”
“넌 크로매틱 1시간 추가. 그다음에 다시 와.”
“아 선배는 또 왜요. 알아서 하시라니까. 얼른 절로 가세요. 아 쫌!”
아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하나.
갑자기 현타 오네 이거.
아무튼 이 모든 건 선배들의 전폭적인 지원…… 이라고 말하고 맘 편한 방관이라고 읽는 상황으로부터 기인했다.
선배 3인방과 나의 공통 이해 관계는 사운드의 질적 향상이다.
1학년들의 수준 낮은 음악 탓에 반고리관이 오늘내일 하게 생겼다고 해서 다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근데 이 선배들이 가르치는 일에는 쥐약이었다. 아주 먹통도 이런 먹통들이 없다.
김수림 버전 : 재수 없는 재능러 타입.
“들리는 대로 치면 되잖아. 아니 이게 안 들려? 안 들린다고? 미안. 넌 이비인후과를 다녀오는 것 외엔 답이 없겠다.”
박재준 버전 : 답도 없는 의지주의자.
“안 돼? 그럼 연습해. 연습하면 안 될 게 없어. 뭐? 3시간이나 했다고? 12시간 정도는 내리 쳐 보고 다시 말해! 건초염 안 걸려 본 자, 연습을 논하지 말라!”
이찬익 버전 : 만렙 스텔스 스킬 보유.
“응? 아, 그거? 어 그거…… 잠깐만 나 통화 좀 하고-. (그리고 어딘가로 사라져 답을 듣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니 1학년을 탓할 때가 아니었다.
이 작은 밴드부는 그 자체로 무능의 보고였다.
어딜 봐도 지뢰이므로 그냥 발목 하나 정도는 주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난 팔을 걷어 올리고 나섰고, 선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이다.
모이를 촉구하는 병아리 무리에 포위된 내 모습이 연상됐다. 내 젊음은 그저 모이 주는 기계로서 공허히 소모되겠지. 인생은 무상한 것이었다.
“후후. 수고가 많네.”
“……그러게요.”
“내가 딱 알아봤다니까. 넌 역시 감각이 있어. 이것 봐. 재능 없으면 이렇게까지 디테일한 조언이 가능할 리 없지.”
“그건 아닐걸요.”
“아 맞다니까.”
수림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수없는 삽질의 결과물이지.’
전생의 나는 얼마나 치열했던가.
내 무능을 고쳐 보기 위한 그 많은 분투들은 그대로 경험치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디테일한 조언들은 재능 덕이 아니다.
내 무능이 그들과 눈높이를 마주할 만큼 하찮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 내가 겪어본 시행착오들이니까.
물론 Rank B급 음감과 Rank A급 말빨이 시너지를 내기도 했지만, 역시나 근본은 삽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짐작일 뿐이지만 어쩌면…….’
난 얼마 전에 얻은, 그러나 아직까지는 별 효용을 찾지 못한 탤런트 하나를 떠올렸다.
* * *
“2번 비올라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모양이군요.”
“어머, 그래요?”
그때는 말하고도 실수했나 싶었다.
사람들은 왕비가 사치에 눈이 멀었다느니 아랫도리가 자유분방하다느니 남자만 보면 잡아먹는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직접 본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문보다 소탈하고 편안한 분위기라 서슴없이 말해 버린 것이었다. 혼자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니 왕비가 미소를 보내왔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음악에 조예가 높으신 모양이군요?”
쁘띠 트리아농에 작게 차려진 음악회였다.
브레게의 셀프와인딩 시계를 보고 깊게 감명 받은 왕비가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브레게는 왕비가 소문 같지는 않아도 순박하긴 하다고 생각했다. 귀족들이 주 고객이니만큼 그는 궁정 문화에도 정통했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이런 종류의 일에는 대개 능했지만.
“음, 뭐랄까요. 저한테는 대충 보입니다.”
“예? 뭐가요?”
“부품을 배치하는 법. 잘 조화시키는 구조. 그 모습이 합당하고 아름다운가. 전 그런 질문들에 강한 편입니다. 복잡 시계의 설계든 음계의 배열이든 본질은 같지요.”
“하지만 음악가가 아니라 시계 장인이 되셨네요.”
“박자를 변주하는 재능은 없었거든요.”
시계 바늘은 언제나 균일하니까요- 그렇게 덧붙이니 왕비는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별로 농담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후후. 재밌는 분이시네요. 아내 분한테 사랑받으시겠어요. 유머 있는 남자는…… 아.”
그의 기색을 읽었는지 왕비가 입을 가리며 말을 멈췄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아닙니다. 저야말로 왕비께 괜한 심려를 끼쳐드렸군요. 사과드립니다.”
“아뇨 제가 사과드려야죠.”
“아니…….”
줄다리기를 하다가 서로 미안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는지, 아니면 남의 상처를 엿봤으니 자신도 내보여야 한다 생각한 건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담담하게 이런 말을 꺼내왔다.
“하루는 궁 밖을 다니다가 쓰러진 아이를 보았어요. 비쩍 말라 있었죠. 근데 근처 빵가게에는 케이크밖에 남은 게 없다지 뭐예요? 빈속에 배탈 날 수도 있지만 일단 들려 보냈죠. 그런데…….”
“……아, 그.”
“후후. 들어 보셨나 보네요. 다음 날에는 제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는 식으로 퍼져 있더라고요. 재밌지 않나요?”
재밌기는커녕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왕비는 브레게로부터 시선을 떼어 쁘띠 트리아농의 소박한 정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행이란 건 늘 밖에서 오죠. 어디에 있든, 어떻게 하든 반드시 뒷문으로 방문해 오곤 해요. 제가 비난받는 건 아마 제가 왕비이기 때문이겠죠. 피할 수 없는 제 숙명일 거예요.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인간은 주어진 불행에 허우적거려야만 할까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왕비는 자리에 일어나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부디 힘내시길.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답니다.”
그리고 그녀는 궁정 악사를 긴히 불러 비올리스트를 탓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그 순간 그녀의 옆모습은 화려함 속에도 질박했다. 아, 이 외딴 궁정에 야생초가 잘못 뿌리내려 자라났구나. 그럼에도 묵묵히 살아가는구나.
브레게는 그녀가 주문한 시계를 어떻게 디자인할지 그 순간 결정했다. 오랜만에 시계 장인으로서의 심장이 뛰었다.
‘……좋아. 괜찮은 작품이 만들어 질 거 같은데.’
그러나 그 시절, 프랑스는 찬란하고도 잔혹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No.160 워치를 결국 만져 보지도 못하고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었다.
* * *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의 공학적 상상력](Rank C)
‘……흠, 이걸 얻은 다음부터 뭔가 정리가 잘되는 느낌인 거 같기도 하고.’
처음엔 그냥 시계 잘 만드는 재능인가 싶었지만, 청색 탤런트이니만큼 그보다는 보편적일 거라 생각은 했었다.
그렇다면 브레게의 말이 힌트가 될 것이다.
재료를 배치하고 조율하여, 유기적 구성 속에서 빈틈없이 맞물리게 하는 재능. 더하여 그 안의 미적 요소까지 꿰뚫어 보는 안목.
그게 용수철과 톱니만이 아니라, 소리와 음계를 쌓고 아우르는 데도 도움이 된다면…….
‘내게는 아주 좋은 재능이 되어 주겠지. 아직까진 모이 주는 일 정도에만 체감되지만.’
그런 견지에서 보면 수림 선배의 말은 총체적으로 틀렸다.
경험도 일천하고, 말빨도 음감도 엉망이며, 브레게의 [상상력]도 탑재하지 못한 회귀 전의 17세 이한열이 제대로 된 음악적 조언을 해낼 리 없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한창 개인 연습 중인데, 수림 선배가 박수를 짝짝 치면서 주의를 끌었다.
“자. 여기까지. 오늘은 관현악부랑 협주 연습하는 날인 거 알지? 다 같이 짐들 챙기고.”
“그거 선배들하고 한열이만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저희까지 다…….”
“당연히 밴드부는 일심동체니까. 지금 선배들이 적진에 돌격하겠다는데 그냥 보낼 거야? 가서 응원해 줘야지.”
“……하여간 파이팅이 지나치게 넘치신다니까.”
하지만 1학년들도 편곡된 버전을 들은 상태였다. 이거면 싸움 좀 되겠다는 각이 섰는지 표정들이 희희낙락이다.
우린 악기를 챙기면서 동시에 말자 씨를 향한 적개심과 투쟁심까지 장착하였다.
그렇게 대강당으로 향하는 길.
“수림 선배, 저 잠깐 어디 좀 들렀나 갈게요.”
“응? 어디?”
“잠깐이면 되니까요.”
통보만 하고 잠깐 무리에서 빠져나와 양호실을 들렀다. 늘 그렇듯 문은 열려 있었지만…….
‘……오늘도 없네.’
벌써 이틀째 현지 쌤이 학교에서 보이질 않았다.
물론 가끔 유령처럼 사라졌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자리에 계시던 게 부지기수이지만…….
‘에이, 삼촌한테 괜히 그런 말을 들어서…….’
뭔가 찜찜했다. 설마 별일 없으시겠지?
현지 쌤한테 별일 없으시냐고 문자도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별일 없음. 완전 무탈. 지금 출장 중.
그냥 평소의 선생님이어서 왠지 안심됐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 담탱 고윤숙한테도 문자 하나를 보내두었다.
-아 왜 나한테 그 여자 사정을 묻는데. 나야 당연히 모르지.
-모르면 조사하세요. 동료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어서 쓰나?
텍스트로도 짜증이 전해져오는 듯했지만 가뿐히 무시해 주었다. 짜증 나면 지가 어쩔 건데. 아직 칼 손잡이는 내가 쥐고 있는 것을.
“같이 가요!”
그다음에야 나는 발발 뛰어서 밴드부를 따라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