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40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10
첫 시작은 건반.
그랜드 피아노가 강당에 사뿐히 음을 내려놓는다.
아리랑의 주선율을 간소화시킨 솔로. 그러나 선율은 곧 미완성된 채로 끝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콘트라베이스와 첼로가 음울하게 소리를 밀어 올렸다.
그 위를 바이올린의 피치카토(Pizzicato)가 절름발이처럼 걷는다.
이 불안한 곡조 사이를 하프가 오르락내리락 오가는 찰나, 청아한 플루트 소리가 피아노의 주제를 받아 내어 선율을 곧게 빼어 냈다.
잔잔한 파도 같던 분위기는 금관의 합류로 더 높고 넓게 소리를 확장시킨다.
마침내 바이올린이 주 멜로디를 받아 가장 높은 피치로 연주했다.
여타 찰현 악기들은 소리를 죽이고, 대신 브라스가 박자를 짧게 잡으며 곡을 긴박하게 몰아붙였다.
발을 굴리는 군마 위에서 우아하게 노니는 바이올린.
그 뒤를 다시 첼로와 목관이 뒤따르며 텐션을 북돋는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또 고조되는 가운데, 반대로 마가렛은 벅찬 감정을 억누르고 섬세하게 지휘봉을 흔들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고조되며 끝을 찍을 것 같으나, 사실 다음 구간에는 긴장과 흥분이 한순간 싹 함몰되며 외따로이 피아노가 등장한다.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피아노는 담담하게 술회를 해야만 한다.
역동적이지만 불안했던 젊음, 앞뒤 모르고, 방향도 잊고, 그저 달리기만 했던 그 시절은 필연코 지나고 말 것이다.
황혼의 목전에서 잔열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어둠이 밀려온다. 맹목의 시절은 끝났다. 우린 어른이 되었고 삶이 무엇인지 언뜻 이해하게 되었다. 미래는 결코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런 뜻의 주제가 등장할 때였다.
마침내 절정에 다다르고, 곡이 능선의 뒷부분에 발을 내디딘 순간.
피아노를 짓뭉개며 기타 사운드가 전면에 치고 나왔다.
‘……뭐, 뭐야!’
깜짝 놀라서 지휘봉을 놓칠 뻔했다.
깊게 집중해 있던 그녀는 옆에 밴드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그녀가 또 모르고 있던 사실은, 피아노가 운을 띄운 처음부터 밴드 사운드는 줄곧 연주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녀조차 위화감을 못 느낄 만큼, 밴드는 오케스트라에 완벽하게 융합하여 곡의 분위기를 받쳐 주고 있었다.
“……이익.”
그러나 조신했던 초반과 달리, 일렉트릭 기타가 강렬한 존재감으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스트랫 사운드가 마샬의 하이게인으로 예리하게 벼려졌다.
탐탐(tom-tom)만 치던 드럼도 마각을 드러냈다. 스틱이 스네어에 쩍쩍 달라붙으며 고함을 쳤다. 킥 사운드가 강당을 육중하게 제압했다.
두둥, 두두두둥…….
좌앙- 끼이익-!
주변부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완전히 잠식되고, 강렬한 드럼의 비트 위로 베이스 기타가 뚜렷하게 중심을 잡고, 그 사이를 오가며 피아노와 기타가 멜로디를 교환했다.
‘뭐야, 뭐냐고, 이런 게, 이 곡은 이런 것이…….’
순간 말자 씨가 될 뻔한 마가렛 여사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휘봉을 내던지지 않았던 건, 그녀도 역시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소리가, 좋다. 사운드가 탁월하게 귀에 감겨 왔다. 오케스트라는 짓눌렸지만 불협화음으로서 진행을 방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곡에 담긴 스토리가 풍성해지고 있었다.
피아노가 담담하게 말할수록 기타는 격정적으로 날뛰었다. 피아노가 단념하면 기타는 흐느꼈다.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같은 선율 안에서 기묘하게 엇갈렸다.
그건 마치 애써 마음을 달래는 이성과, 그럼에도 뛰쳐나오려는 활화산 같은 본성이 나누는 대화 같았다.
‘좋아. 제대로 됐다.’
그 순간, 한열은 쾌재를 쳤다.
이 모든 건 물론, [음감]의 세밀한 감독하에 계산된 절묘한 사운드 컨트롤 덕분에 가능했다.
피아노를 마스킹하지 않으면서 기타가 존재감 있게 치고 나와야 한다.
이 명제를 실현하기 위해, 한열은 강당의 너비와 구조에 맞게 레조넌스 설계까지 파고들어야 했다.
그런 의도하에 앰프의 위치, 각도, 그리고 볼륨과 게인 노브의 적정량이 결정됐다.
극한의 [음감]과 [수리적 통찰]이 결합했을 때에나 가능한, 마법 같은 사운드 메이킹이 고작 고교 대강당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정묘한 의도와 결과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이 안에서 단 둘뿐이었다.
설계자인 이한열 본인.
그리고 원곡자이자 공연 음악으로 잔뼈가 굵은 이병호 교수.
“……허. 이거 미쳤는데.”
공연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소리는 공간에 따라 최종 질이 결정된다. 초고가의 하이파이 장비라도 플레이하는 장소가 굴다리 밑이라면 저가 붐박스만 못할 때가 많다.
공진 대비가 안 된 텅 빈 강당.
자체 흡음판이 되어 줄 관객도 변변찮다.
이런 곳의 소리는 빙빙 돌다 부밍을 일으키기에 일쑤다. 지금도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저건 뭔가. 저렇게 음량을 끌어올리면서 이토록 깔끔한 질감을 만들어 내기란…….
‘업계 최정상의 베테랑 프로라도 힘들 일인데. 누구지?’
사운드만이 아니라 곡 전개 자체도 탁월하다.
자신이 편곡했기에 잘 알았다.
여기서부턴 체념의 정조가 강하게 풍겨야만 했다. 적막하게, 담담하게, 그러나 단념 속에서도 도무지 감출 수 없는 허탈감에 치받혀야 했다.
특히 어려운 파트라, 이병호 교수는 이 부분을 공란으로 두고 제자들에게 숙제로 내주곤 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결과는 대단히 드물었다.
일부는 소리를 예쁘게 빼는 데만 몰골하고, 또 일부는 적막함을 표현한답시고 솔로 악기의 역량에 모든 걸 내맡기곤 했다.
‘말자는 후자였지. 자신이 없음에도 허세를 부리는 아이들의 특징이 꼭 그랬어. 본인은 편곡의 의무를 방기하고, 제대로 느낌이 나오지 않으면 꼭 솔로이스트를 타박하지.’
이른바 책임 전가 유형.
저런 고난이도의 감정 표현은 정상급 비르투오소만이 가능하겠지. 그걸 전공자도 아닌 학생들한테 시키는 것부터가 그녀의 무능과 무책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신선해. 이런 절묘한 답변을 내놓을 줄이야. 그것도 고작 고교 밴드부에서.’
질척한 삶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이해하고 납득한다고 담담해지던가. 애써 괜찮은 척, 격정을 외면하며 억누를 뿐이지 않나.
건반의 담담한 독백 아래,
울부짖는 일렉 기타는 바로 그것이었다.
저 밑바닥에 들러붙어 발버둥치되, 기어코 외피를 뚫지는 못한 채 들끓기만 하는 본능의 외침. 스스로 주저앉힌 울분. 어쩔 도리가 없는 한숨.
‘피아노도 기타도 각각은 그럭저럭이다. 괜찮지만, 딱 괜찮은 수준이야. 하지만 둘이 어울리니 기가 막힌 시너지를 발휘하는군. 기타 톤이 환상적이다. 적당한 수준에서 절제되어 있는 것도 좋아.’
그것 또한 가산점이었다.
실력의 한계를 편곡과 사운드 메이킹으로 극복했다는 점. 모자란 실력을 끌어올려 곡의 본질에까지 닿게 하는데 편곡자의 모든 포인트가 집중돼 있다.
분명 대단히 유능하고, 사려 깊은 음악가의 지휘 하에 조율됐겠지.
이 교수는 그 과정을 상상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젠 거의 빨려 들어갈 듯 음악에 몰입해 있었다.
‘다음은 뭐냐. 또 뭐를 보여 줄 거냐.’
고조된 분위기는 해소될 길 없이 그저 계속해서 한탄을 쌓아 갔다.
굴곡 없이 직진하는 곡의 구성은 전통적인 협주곡보다 락 음악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그렇다.
이건 더 이상 오케스트라 버전의 아리랑이 아니었다. 락 밴드의 아리랑을 오케스트라가 온 힘을 다해 떠받치고 있었다.
한 방 먹었음에도 말자 씨는 힘차게 지휘봉을 쥐었다.
‘……제법. 하지만 이건 어떨까.’
피아노 독주가 끝나고, 다시 브라스와 찰현 악기들이 소리를 키웠다.
가장 현란하고 난해한 파트였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엇갈려 가며 주선율을 토해 내고, 잠잠해지면 그 자리를 플롯과 오보에가 채우다가, 배경으로 깔리던 브라스가 느닷없이 전면에 튀어나왔다.
한(恨)으로 승화되기 직전의 혼잡한 번뇌들을 표현한 구성이었다.
온갖 기교가 응집된 30초.
특히나 B타입의 편곡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C타입으로 바꿔야만 했던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런데.
응당 물러서 오케스트라의 기교에 무대를 헌납했어야 할 밴드 사운드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꺾이기는커녕 이를 악물고, 악에 받쳐서 선율에 따라붙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뭐야, 뭐야? 뭐지? 이 소리들이 다 어디서……?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경악스러울 만큼 훌륭했다.
말자 씨조차 반사적으로 인정해 버릴 만큼. 이병호 교수는 아예 벌떡 일어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무대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그 비결은.
이한열이 두드리고 있는 신디사이저에 있었다.
‘…….’
[편곡]을 얻은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원작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 소리를 배치했는지. 어떤 의도가 깃들었는지. 어떤 고민이 있었고 어떤 논리에 따라 곡이 구성됐는지.
그뿐일까.
Rank B에 달하는 압도적인 재능, 그건 이해를 넘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을 만한 거인의 시야를 제공했다.
그랬기에, B타입 악보를 받자마자 그에게 든 생각은 의아함이었다.
‘왜 이렇게 편곡했지?’
나라면 더 잘할 수 있다. 당신의 의도를 당신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더 완벽하게, 더 면밀하게, 더 효율적으로.
무엇보다.
더 아름답게.
이한열은 건반을 두드렸다.
박재준이 복잡한 바이올린 소리에 밀려 기타 연주를 멈춘다.
그러나 괜찮다. 신디에 내장된 모듈에는 일렉 소리도 저장돼 있다. 바로 전환. 일렉 소리를 매끄럽게 이으며 찰현 소리를 가볍게 따라잡았다.
바이올린이 고통을 호소한다. 비올라는 가슴으로 한탄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들은 엮이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겉돌았다.
기타 사운드를 외피로 입은 신디사이저가 그 사이를 질타한다.
그 순간 한탄은 고통을 찰나나마 무마하는 위로가 됐다. 고통은 홀로는 그저 고통일 뿐이었으나 한탄이란 통로를 거치며 응집됐다. 눈물이 됐다. 한데 묶이어 어딘가로 한없이 치솟았다.
이한열은 건반을 두드렸다.
김수림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질척한 동행에 가로막혀 멈췄다. 하지만 괜찮다. 신디에는 베이스 기타 모듈도 내장돼 있다. 제2신디에 손을 올리고 둥둥- 저음부를 커버했다.
콘트라베이스는 자책했다. 반면 첼로는 세상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자책과 원망은 교차하지 않고 영원히 평행선만을 그렸다.
베이스 사운드를 흉내 낸 신디사이저가 그들에게 갈마들었다.
그 순간 자책은 타인을 이해하는 다리가 됐다. 원망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표지가 되어 주었다. 울음이 됐다. 한데 엮이어 어딘가로 더 깊게 가라앉았다.
복잡하게 흩뿌려진 선율들이 시간이 갈수록 하나의 소리 아래에 일사불란하게 밀집했다.
고조되고, 반대로 침잠했다.
그것을 무어라 할까.
이름 짓기엔 지나치게 한순간 사라지는 그것.
고통의 절정에서만 보이는 야트막한 빛줄기 같은 것.
그것을, 누군가는 한(恨)이라 부르지 않았을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김수림과 박재준이 다시 연주를 받아 가고, 드럼은 고조된 분위기를 끝까지 끌어올리며 비트를 쪼개고 쪼갰다.
두둥, 지잉, 지이잉, 둥둥.
쿵-.
마침내, 밴드 사운드가 경주를 마친 듯 침묵했다.
오케스트라는 그 여운을 장식하듯 느리고 깊은 저음부를 연주했다.
곡이 마침표를 찍기까지 10초 남았을 무렵.
이한열은 다시 소리를 피아노로 돌린 뒤, 건반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속삭이듯이. 한바탕 울고 난 뒤에 개인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이. 고통 속에서 한 줌의 희망을 담아.
마지막 온점을 길게 찍었다.
디잉-.
그리고 강당은 한참 동안 적막으로 속을 앓았다.
한열은 눈을 감은 채 마지막 건반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런 한열의 옆으로 수림이 질척질척 다가오더니, 힘이 다 빠진 얼굴로 말한다.
“한열아.”
“……네.”
“우리가 편곡한 것보다 좋잖아. 이거.”
“그러게요.”
부정도 안 하는 건방진 후배에게 돌려줄 것은, 철야의 선고뿐이었다.
“돌아가면 편곡 처음부터 다시 하자. 나 더 잘하고 싶어졌어.”
“공교롭네요.”
“뭐가?”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익!!”
그 순간 말자 씨의 잇새로 울분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밴드부 쪽을 노려보며 움켜쥔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하지만 그 말들은 제 안에서 치고 받히며 8차 추돌 사고까지 벌어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후의 항의를 내뱉으려는 순간-.
짝짝짝-!
이병호 교수가 열렬하게 손을 맞부딪쳤다.
그는 무대에 다가오다 못해 2층 난간에 거의 매달린 상태였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그 손뼉만으로 환호를 치는 듯했다.
그러자 학생회 임원들도, 떨떠름한 표정의 선생들도 뒤따라 박수를 쳤다.
말자 씨가 거의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터뜨리는 것을 보며, 김수림이 의기양양하게 단상을 올랐다.
“어때. 우리 나쁘지 않았죠?”
“…….”
“몇 번 더 맞춰 볼까요? 근데 관현악부는 연습 상태가 좀…… 그래서 지금은 각자 연습해야 될 때가 아닌가 생각도 들고 그러네. 어떻게 생각해요?”
한열은 거기까지만 듣고 두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방금 전의 협주를 떠올렸다.
모든 게 합치되고 온전해진 찰나, 그걸 끌어낸 두 손이 거기 있었다. 자신의 팔뚝에 붙어 있는 게 믿어지지 않는 손이었다.
그는 방금의 감각이 어디 달아날 새라 손을 꼭 쥐었다. 방금 쳐 낸 악상을 한 소절이라도 잊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암기]를 굴렸다.
그 가운데.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벗어던졌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