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42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12
* * *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날 아침 발바리는 경쟁심을 느꼈다.
“형님, 이런 거 못 봤어요?”
이희영은 사기꾼 중에서도 꽤 성공한 부류일 것이다.
공중파에 이름을 올렸으니까.
아닌 척하지만 본인도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천만 원? 천만 워어언? 에이 그것도 사기냐? 그 정도는 그냥 하룻밤 술값 아니야? 고소한 놈이 쪼잔하네.’
요컨대 몇 개월 살다 나오는 피라미들과 본인은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금융 세계의 음습한 암초에 은거하던 해적왕이다. 모비 딕에 달려들어 부서진 에이허브였다. 천리의 장난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였다. 이 좁은 감옥은 남자에게 부여된 가혹한 시련인 것이다…….
그런 이희영을 두고, 발바리를 비롯한 같은 방의 모두는 공통의 감상을 품었다.
‘불쌍한 놈이네. 잘해 줘야겠다.’
대한민국 검찰과 금융 감독원은 유능했다.
수백억의 돈을 해 쳐먹었으나, 국가 기관의 엄정한 손은 뒷주머니의 동전 하나까지 탈탈 털어 추징했다.
서비스로 얹힌 벌금까지 따지면 사실상 빚쟁이다.
잔챙이 사기꾼들이면 다시 나가서 본업(사기)에 복귀할 수라도 있지만 이름이 알려진 그는 그럴 수도 없다. 저렇게라도 자기 위안을 해야 속이 덜 쓰리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 남자가 돈 되면 뭐든 하리라는 건 굳이 추리까지 안 거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글쎄다. 처음 보는데? 뭔데 그게.”
“아니. 뭐, 누가 잃어버렸다고 해서…… 내가 또 누가 곤란하고 그런 거 못 보고 그러잖아요.”
“니가?”
“내가.”
“그런 놈이 그 많은 가정의 재정 상태를 곤란하게 만들었냐?”
“아니 그 사람들은 돈이 막 썩어나서 쓰고 싶어 안달 났었으니까. 내가 고객의 마음을 읽고 앞서 가는 서비스를 해 준 거지. 윈윈이란 거 못 들어 봤어요?”
“오늘 지랄 참 신선하네. 현지에서 막 잡아 왔냐?”
이희영의 사기 피해자들은 중산층에서부터 기초 수급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었다.
딱 상류층만 빼고. 진짜 정보들을 쥐고 있을 부자들이 꾼의 얄팍한 말에 넘어갈 리가 없는 것이다.
“아 아무튼. 형님은 못 보셨단 거죠?”
“몰라.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
그건 그림이었다.
자그마한 유선형의 오카리나와, 그로부터 떨어져나갔을 일부의 조각이 상상도로 그려져 있었다.
당연히 뭔지는 보자마자 알아챘다.
‘……아 놔, 이런 지조도 없는 놈. 언젠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더니. 이딴 사기꾼까지 고용해서 쓴다고? 에이 지저분한 놈 같으니.’
물론 이한열은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지만, 발바리의 뇌는 자기 좋을 대로 필터링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암. 상관없고 말고. 난 그놈과 달리 한 번 정한 일은 바꾸지 않으니까. 그게 전설적인 압구정동 삐끼, 귀수의 수제자 발바리의 방식이다. 음음.’
동부파의 영태도 지금은 잠잠했다.
그런 일이 있고 한참은 잠도 못 자고 전전긍긍했지만, 결국은 참아 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어떻게 나오나 떠본 것이겠다 싶었다.
괜히 반응해서 무죄를 입증하겠답시고 방방 뛰었다면 다음 날 아침 시체가 됐을 수도 있겠지.
그는 자신의 인내심과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려서 우유부단하게 시간만 보내다 보니 어쩌다 괜찮아졌다는 진실은 그의 머릿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거 뭔지 알아? 본 적 있어?”
아무튼 이희영은 방을 발발발 돌아다니며 탐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지은찬에게까지 그 발길이 닿았을 때 발바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역시는 역시였다.
“몰라? 알아? 이 새끼 진짜 벙어리인가? 에이 씨 됐다. 됐어. 이 저능아를 데리고 내가 뭔…….”
지은찬은 잠시 그를 흘겼을 뿐, 이내 대꾸 하나 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희영은 몇 번 집적대다 혀를 차며 물러섰다. 발바리는 얼결에 한숨을 쉬었지만, 그건 안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어쨌든, 한열이 ‘패가 많다’고 한 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오카리나의 조각을 찾는 사람은 계속 등장했다. 발바리가 발견한 것만 5명이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교도관도 한 명 껴 있었다.
이렇게 되면 며칠 뒤에는 교도소 전체가 그게 뭔지도 모르고 보물찾기에 나서겠지.
원래 보물이란 게 그렇다. 원피X가 뭔지 알아서 찾아다녔나. 남들이 다 찾으니까 얼떨결에 찾고 그런 거지 뭐.
‘아주 돈지랄을 하는구만. 돈지랄을 해. 물론 나랑 상관은 없지만. 정말이지만!’
가슴이 뛰는 건 분명 부정맥 때문이다.
아무튼, 하루가 별일 없이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달이 높아질 수록 빛은 무거워졌다. 폭포처럼 달빛이 쏟아지고, 사람들은 빛의 물결에 휘말려 덩달아 깊게 침잠했다. 고요와 수면의 시간. 발바리는 홀로 잠 못 이룬 채 뒤척이고 있었다.
‘젠장. 괜히 심란하잖아.’
맞다. 이건 그거다.
내가 차 버린 여자가 남의 옆구리에 있을 때 느껴지는, 그 뭐라 하기 힘든 박탈감.
아니 좀 다른가. 좀 더 면밀하게 말하자면, 방금 찬 여자가 1초의 망설임 없이 다른 남자에게 작업을 걸 때의 느낌에 더 가깝다.
분명 미련은 없는데 왠지 진 거 같잖아. 뭐야 이거. 기분 더러워.
그런 헛생각에 번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슬쩍 곁눈질을 해 본다.
‘……뭐야. 지은찬?’
지은찬이 스륵 걸어가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게 아닌가.
쓸데없이 큼직한 눈은 퀭했고, 왜소한 몸보다 한 치수 큰 죄수복은 바닥에 사락사락 끌렸다. 영락없는 귀신 룩이다.
몰골만으로도 소름이어서, 그는 더 놀라워야 할 사실을 늦게야 깨달았다.
‘어? 문이 왜 열려 있지?!’
당연히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었다.
지은찬은 그걸 또 어떻게 알고 나간 것인가.
설마 이한열이 벌써 타깃을 확정하고 탈옥 계획까지 세운 것인가?! 교도관도 돈으로 매수한 거야? 신성한 사법 공무원이 이래도 돼?
발바리가 평생 해 본 적 없는 국가의 안보를 걱정할 때였다.
텀을 두고 또 한 명이 스르륵 일어서더니 문가를 기웃대는 게 아닌가. 이희영이었다.
‘저 새낀 또 뭐야?!’
잠깐 머뭇거리더니 그도 문을 열고 나선다.
그래.
저놈도 사기 쳐 본 가닥이 있어서 지은찬에게 뭔가 있다고 감을 잡은 것이다.
그 순간 발바리의 가슴에 일말의 망설임은 사라졌다.
7살쯤에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투기한 법질서 수호의 정신이 용솟음쳤다. 이런 부조리를 눈 뜨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의 결심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었다.
-너네만 꿀 빨게 놔둘 순 없다! 같이 가든가 다 같이 망하자!
발바리도 살금살금 뒤를 쫓는다.
하지만 교도소 복도는 휑했다. 그사이에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발바리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게 혀도 코도 다 개 같았다.
놀라운 후각에 힘입어 킁킁대며 추적하길 1분여간. 그는 어느새 목공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몸을 숙여 안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날 왜 부른 겁니까? 이제 연락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피차 그러는 게 낫다고 말한 건 당신네들이면서.”
“…….”
“……왜 말이 없…….”
인기척은 두 명이었지만, 지은찬의 말이 끝났음에도 침묵은 한참 계속됐다. 공기 중에 불온한 기색이 덩치를 불린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지은찬이 탄식 같은 혼잣말을 흘렸다.
“……당신. 그쪽에서 온 사람이 아니군.”
“후후. 그래.”
목소리를 듣고 발바리는 또 깜짝 놀랐다.
‘……영태?!’
동부파 행동대장 김영태의 목소리였다.
자다가도 꿈에서 들려와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둘이 무슨 관계여서 저기서 저러고 있단 말인가?
그는 숨을 죽이고 귀만 쫑긋 세웠다.
“네가 단독범일 리는 없지. 하지만 뭐, 네가 입을 안 여니 우리로서도 알 수가 있나. 그래서 이런 식으로 떠볼 수밖에 없었다.”
“……하. 그럼 이제 어쩔 셈이지?”
“그거야 위에서 결정하실 일이지. 네가 알 건 없고. 그보다 넌…….”
덜컹. 뭔가가 밀리는 소리. 뒷걸음치는 발소리. 또각또각. 불길한 소리들이 격자무늬처럼 엇갈렸다.
“뭐, 너도 더 살아 봐야 뭐 하겠냐. 어차피 망한 인생. 내가 수고를 좀 덜어 줄게.”
발바리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젠장. 이거 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일이잖아? 안 돼.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지금이 바로 손절각이다.’
판단은 빨랐고 생존 본능은 그보다 더 빨랐다. 바로 등을 돌려 돌아가려 할 때였다.
“……결국 이렇게 되나.”
한마디.
그를 멈춰 세운 건 그 한마디였다. 체념의 한숨과 납득의 읊조림. 그건 삶을 군더더기처럼 다루던 누군가의 말버릇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아냐.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그게 뭐. 나 따위가 뭘 어쩔 건데.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늘 했던 걸 또 할 뿐이야.
그러니까 움직여.
빌어먹을 다리 새끼야 움직이라고!!
-분하지도 않나요? 어쨌든 당신을 먹이고 키워 준 양부였잖습니까.
그는 결국 움직였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것이었다.
마침 두 남자는 바닥에 얽힌 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영태가 상위에서 은찬을 깔아뭉갠 채 칼날 끝을 내리찍으려는 찰나. 발바리는 볼 것도 없이 발을 박찼다.
“이게 바로 타짜의 손맛이다 새꺄!”
그러고는 달려든 관성을 한껏 담아 영태를 걷어차 버렸다.
“크윽!”
의도치 않게 관자놀이에 직격했다. 얻어 걸린 행운에 본인도 놀라서 어버버하고 있으니 은찬이 잽싸게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 해! 빨리 뛰어!”
“어?! 그, 그래!”
“이런 건방진 새끼들이……!”
평생을 갈고닦아 도주에 최적화된 다리는 살기를 뒤에 두고도 민활하게 움직였다.
머릿속이 파르르 움직이며 동선을 계산했다. 도박장에 들어갈 때마다 하던 일이라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쪽!”
영태는 조폭 행동 대장답게 빠르게 회복하고 기세 있게 따라붙고 있었다. 텅 빈 복도에서 발소리는 읽기 쉬웠다. 그는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발바리 놈……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놔뒀을 것을. 괜히 나대서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놈도 살생부에 있었지만, 제 스스로 몸을 사리기에 봐줬을 뿐이었다.
이렇게 나온다면 굳이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영태는 사시미 앞뒷면을 바지에 슥슥 닦으며 날에 광을 먹였다. 입가가 살기로 물든다.
‘여기에 있군.’
복도를 걷던 발이 멈춘다.
사냥꾼으로서의 후각이 반응했다. 본인들은 잘 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공포 섞인 숨소리는 십 미터 밖에서도 선연했다.
그는 히죽 웃으며, 기척이 느껴지는 방의 안쪽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끼익-.
문이 가냘프게 신음한다.
어둠 속의 윤곽이 겁에 질려 떤다. 영태는 사시미를 직각으로 세워 들고 돌진할 준비를 마친다.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 음?”
“히이익!”
어둠에 익은 눈이 저편의 음영을 밝혀냈다.
그건 발바리도 지은찬도 아니었다. 이희영이 발발 떨면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이었다.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아아. 으아.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넌 여기서 뭐 하는 거냐.”
“기, 길을 잃었습니다.”
“뭐야?”
“누가 문 열고 나가길래 뭔가 싶어서…… 근데 밤 되니까 길 하나도 모르겠어서…… 죄다 까매서 너무 무서워…… 끄어어엉.”
영태가 결국 울음을 터뜨린 이희영을 황당하게 바라볼 즈음.
그때 발바리와 지은찬은 교도관 당직실 앞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영태와 5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심지어 그들은 영태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육안으로 확인했다.
“……어쩌려는 거냐.”
“이제 이 방법 밖에 없어.”
미친 짓이었지만, 발바리는 평생을 통틀어 가장 미친 짓을 5분 전에 이미 저질렀다. 이제는 가릴 것도 없었다.
‘그때도 이렇게 용기를 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이제 와선 의미 없는 감상.
발바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아예 부숴 버릴 기세로 당직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콰콰쾅쾅쾅!!
그리고 지은찬과 함께 빠르게 이동.
그들이 꺾어진 코너의 사각지대로 들어선 순간.
대경실색한 교도관이 당직실을 박차 나왔고,
“뭐, 뭐야?!”
영태 또한 그 소리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소음의 방향을 따라 몇 걸음 걷자마자 교도관과 마주쳤다.
두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맞부딪치며 감상을 틔웠다. 하나는 당혹으로, 하나는 어이없음으로.
“……너 그거 뭐야.”
“교도관. 이건…….”
“그 칼 뭐냐고 새끼야. 하, 왠지 뽀찌가 두둑하다 했지. 시발 떡이나 치는 줄 알았더니만…… 야, 너 그걸로 뭐 하려고 했어.”
“…….”
“대답 안 한다 이거지? 개새끼야. 엎드려. 넌 독방이다. 죽고 싶을 때까지 갇혀 있을 줄 알아.”
그럼 그렇지.
교도관이 미쳤다고 살인을 묵과하겠나. 그냥 간단한 일탈을 봐주는 일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도관이 진압봉을 꺼내드는 모습까지 본 뒤에 은찬과 발바리는 조용히 발을 옮겼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야 둘은 참았던 숨을 몰아서 내쉬었다.
“후, 후우우…….”
“헉. 허어억. 미, 미친.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으아. 시바아아알…….”
발바리는 바닥에 엎드려 작게 절규했다. 은찬은 그런 발바리의 등에 대고 작게 말했다.
“……고맙다.”
“시발 그럼 고마워야지. 안 고마우면 넌 인간도 아냐.”
둘은 벽에 기대어 나란히 앉았다.
“한동안은 괜찮겠지. 놈이 독방에 갇혀 있을 때까지는.”
“그래서 교도관을 이용한 거군. 머리가 좋은데.”
“내가 살아남는 거에는 머리가 존나게 잘 굴러가요.”
“그럼 이제 어쩔 거냐. 놈이 독방에서 나온 다음에는? 너도 이제 놈들의 타깃이 됐을 거 같은데.”
“……그래. 시발스럽게도 그렇지.”
물론 대책 따윌 마련해 두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책을 떠올리자마자 차후 계획은 자연스럽게 세워졌다. 어차피 의지할 구석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발바리는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꺼냈다.
손 위에는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소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이한열 : 010-XXX-XXXX]
“근데 왜 타짜의 손맛이라면서 발차기를 한 거냐?”
“후후. 타짜 세계에선 원래 구라가 중요하거든. 블러핑이라고 아냐?”
“오묘한 세계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