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43화>
14. 막을 테면 막아봐 - 13
* * *
발바리에게 연락을 받고도 난 하루를 쌩으로 뭉갰다.
결국 이럴 거면서 왜 괜히 시간낭비를 했느냔 말이야. 밀당을 그리 좋아하시니 나도 밀당 좀 해드렸다. 안달 좀 나보라지.
근데 어택이 좀 심하게 들어갔던 모양이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사이에 사람 얼굴이 곤죽이 돼 있었다. 안부를 묻기에도 좀 민망한 수준이었다.
“안색이 꽤나 박살나셨네요.”
“…닥쳐. 내가 하루 동안 맘고생을 얼마나 했는 줄 알아?”
“내가 알 바인가? 내가 손 내밀 땐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니.”
“쳇. 원래 남자한텐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거다.”
약속시간에 반나절 늦은 여친이 늘어놓을 법한 변명이었다. 당연히 나는 온 힘을 다해 질색해주었다.
그러나 발바리는 내가 그러든 말든, 다 죽은 낯빛으로도 호기로운 미소를 피워내는 것이다.
“그리고 인마. 나 아니었으면 넌 영원히 단서도 못 잡고 헛발질만 했을 걸?”
“얼레. 엄청 자신만만하신데?”
“후후. 그 전에. 먼저 계산할 게 있지 않나?”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검지와 엄지를 비비는 발바리였다.
숫제 맡겨놓은 걸 내놓으라는 태도라서 난 픽 웃고 자리를 일어나버렸다.
“야! 야야!! 그렇다고 그냥 가면 어떡해! 이 새끼야! 아니 새끼님! 아, 아니, 이게 아니고!”
세 발자국을 다 딛기도 전에 내 칭호는 새끼에서 형님으로 급속 진화를 이룩했다.
다시 돌아와서 앉으니 그제야 우리 사이에 상하관계가 정립됐다. 몇 초 사이에 발바리는 몇 년을 건너뛰어 푸르죽죽 늙어있었다. 그가 바르게 정좌한 자세로 날 힐끔대며 중얼댔다.
“…농담도 못 하겠네, 시벌놈.”
“이거 왠지 집에 가스불을 키고 나온 거 같은데….”
“에, 에헤이. 이, 이건 그냥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라니까, 동생. 아니 동생님! 이 삼촌이 동생한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니까! 하, 한 번만 믿어봐!”
“좋아요.”
난 면회실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얘기가 흥미로워야 할 겁니다. 유익하기도 해야 하고. 잘 채점해볼 테니 어디 한 번 분발해보세요. 점수가 높을수록 제 적극성이 달라질 거란 점은 유념하시고”
“…….”
그러자 발바리가 몸을 숙이고 바싹 다가왔다.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더니 톤을 팍 죽여 속삭인다.
“지은찬이라는 놈이다. 네가 찾던 물건은 녀석한테 있어.”
“그게 누구죠?”
“몰라? 하기야 꽤 시끄러울 법한데 기이하게 조용하긴 했지. 너네 학교. 전 씨 집안 막내를 덮쳤다가 잡힌 놈 있잖냐.”
“…전상진?”
“그래, 아마 그런 이름이었지.”
이 공교로운 우연에는 뒷골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내가 잡아다 직접 처넣은 놈을 그동안 그렇게 찾고 있었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아니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이상할 게 무언가. 도리어 처음부터 각 잡고 의심을 했어야 했다.
그날 밤, 호송되던 지은찬을 우연찮게 알아본 원장선생님을 나는 기억했다.
단단한 표피를 가로지른 균열을 보았다. 그 틈새로 넘쳐흐르던 해묵은 감정들을 감지했다. 잊고 있던 과거의 편린에 강하게 치인 남자의 표정. 그날 밤은 내게 그렇게 기억됐다.
그러니까 나는 떠올리지 못한 게 아니라 그러지 않은 것이다.
난 내가 모르는 원장 선생님의 얼굴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늘 그래왔듯, 나는 익숙하게 내 안의 망설임을 제압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계속 말씀해보시죠.”
“그놈이 습격당했어. 거의 죽을 뻔하던 걸 내가 구해냈지. 그대로 죽었으면? 넌 네가 찾던 걸 소각장에서 잿더미로 발견하게 됐을 걸?”
“…습격? 누구한테?”
“동부파의 영태라는 놈인데, 내가 알기로 빨간마스크 직속이다. 작업 하다 몇 번 부딪혀봐서 대충은 알지. 지금은 내가 독방에 가둬뒀다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들 아냐? 물어봐도 그 부분은 입 꾹 다물더라고. 아주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자세가 글러먹었다니까?”
머리가 복잡해서 팔짱을 끼고 인상을 팍 쓰고 있었더니, 발바리가 괜히 안절부절 못하며 얘기를 진척시켰다.
“그래서, 어쩔까? 그놈 애지중지하는 꼴을 보면, 생명의 은인이라도 순순히 내주진 않을 거 같고…. 네가 방침을 정해줘. 훔칠 수도 있고. 여차하면 때려눕히고 뺏어올 수도 있다.”
“아니, 일단은 그냥 놔두세요. 회유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럼 얘기가 좀 복잡해질 텐데.”
“어쩌면 협력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경거망동하지는 마세요.”
“뭐 네가 그렇다면야 그래야겠지만….”
발바리가 입맛을 다시며 말을 흐렸다. 난 그가 미적지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았다.
이렇게 되면 발바리는 계속 지은찬에게 붙어 있어야 하니까.
같은 상대에게 노려지고 있는 상황, 떨어져서 신경을 분산시켜도 모자랄 판국에 이런 방침은 달갑지 않겠지.
“당신이 안달 난 이유는 인지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 우선은 둘 모두 이감하는 게 먼저겠네요. 그자가 독방에서 나오기 전에.”
“그렇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 부분은 제가 알아보지요. 당신은 지은찬에게 계속 붙어서 동향을 전해주세요.”
남은 짧은 면회 시간 동안, 우린 대략의 계획을 공유하고 합의했다.
면회시간도 거의 끝나갈 무렵.
한결 숨이 트인 얼굴로 발바리가 자투리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원래도 쉴 새 없이 헛소리를 양산하는 작자라 그냥 흘려듣고 있는데, 순간 흘려들어서는 안 될 말이 예고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난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응? 뭐야. 그쪽을 통해서 엮인 게 아니었어? 그게 아니면 네가 동부파니 빨간마스크니 다 어떻게 알고 있는데?”
“아니 그건….”
…왜 여기서 위화감을 못 느낀 거지?
그러고 보니 우린 기묘할 정도로 얘기가 매끄럽게 통했다.
사실 잘 따지고 보면, 우린 같은 도박판을 딱 한 번 공유했을 뿐인 사이인 것이다. 별다른 접점이 없다.
나야 귀수의 기억을 보았으니 대강의 사정을 알지만, 발바리는 어떻게 내 사정을 알고 얘기를 맞춰왔단 말인가.
“…그 얘길 마지막으로 좀 해주시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컴팩트하게.”
그리고 이후 1분 여간 발바리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내가 그날 접한 모든 정보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이었다.
* * *
교도소를 나오자마자 나는 연희재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이감 말입니까?
“예, 방법이 있겠습니까?”
-음, 이감 요청이야 흔히들 하는 일입니다만… 많이 급하신가요?
“예.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좋겠네요.”
-당장 생각나는 방법이야 몇 개 있는데, 급하신 문제라면 그냥 로비를 하는 게 빠릅니다. 씁쓸한 사실입니다만, 한국에선 떳떳하지 않은 방법이 가장 직방이죠.
“이번에는 좀 씁쓸해지죠 뭐.”
-제가 알아보도록 할게요.
발바리도 지은찬도 가석방 심사 대상이 아니고, 설사 대상이라 해도 꺼내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돈을 뿌려서라도 다른 교도소로 이감을 시키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
물론 그 교도소도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으니 로비로 독방도 얻어다주고 교도소장도 포섭하고….
‘…젠장.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네.’
그냥 지은찬을 대면해서 조각을 터치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가 면회를 거부하지만 않았어도 어떻게 살살 꾀어볼 텐데, 그럴 수도 없으니 일이 자꾸만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가 폭풍의 눈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
저 새까만 밑바닥에서, 그를 중심으로 진실과 암투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대로 그를 놓쳐선 안 된다는 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조만간 로펌에 정식으로 의뢰를 요청할 일이 있을 듯합니다.”
-어머, 어지간한 일은 그냥 얘기해주시면….
“아뇨, 좀 더 제대로 해야 될 일이라서요. 로펌 차원의 대대적 지원과 체계적인 탐문 수사가 필요합니다.”
발바리의 누명을 벗기려면 귀수의 죽음을 근본부터 파헤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LS보안팀보다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확실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언제쯤 방문하실 예정이신가요? 대표님과 약속 시간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음, 저는 최대한 빠르면 좋겠습니다.”
-혹시 오늘 가능하십니까? 공교롭게도 지금 옆에서 퍼져서 주무시고 계십니다만.
“…그럼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이.”
-괜찮습니다. 아주 한가해보이시니 등짝을 후려서라도 테이블에 앉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인간에겐 다소 엄격한 게 딱 맞습니다.
아버지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요, 변호사님.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펌 대표님의 낮잠을 방해할 일은 없게 됐다. 교도소를 나오는 길목, 새까만 벤츠 세단과 함께 낯익은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 팀장님?”
이상용 팀장이 하얀 이를 드러내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회장님께서 널 찾으신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제 쪽에서 지금 약속이 잡혔네요.”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 * *
동부파는 와해 직전이고 내 한 몸 지킬 힘은 이미 갖췄다 자부한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장건철 회장과의 인맥이 필요한가?
물론 예전만큼 절실하진 않지만, 굳이 답하자면 여전히 그렇다고 하겠다.
‘난 아직 약하다.’
물리적인 근력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의 문제다.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권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지금 시점에서 강력한 권력자가 날 찍어내려 작정하고 언론과 사법기관을 총동원한다면 내가 버텨낼 수 있는가?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망명할 계획을 짜는 게 현명할 걸.
동부파의 배후에 미지수의 거대한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지한 이상, 그리고 내 정보가 빨간마스크를 통해 유출됐음을 안 이상, 난 나를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둘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건철 회장 정도면 더할 나위 없는 보험이지.
날 실은 세단이 도착한 곳은 LS사옥이 아니라 평창동의 주택가였다.
오매. 이거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인 거 아닌가. 고작 한 번 본 사람을 대뜸 주택으로 불러들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나 장건철 회장은 내 상상보다 더 배포가 어마무지한 사람이었다.
황공하게도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저택과 나이든 남자는 꽤 잘 어울렸고, 그래서 언뜻 한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혹시 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한열 학생.”
사근한 미소에 주름이 단정하게 접힌다.
아.
입가에 장난기가 묻은 걸 보고 서로 간에 인식의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날 순진하고 젊은 예술가로, 그러니까 그날 민욱공원에서 본 모습대로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내 정보가 실로 깔끔하게 차단되어 왔던 모양.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전 보안팀장 씨, 당신 참 열심히 살았군요.
아무튼
-짠, 그때의 할아버지가 사실은 재벌 회장이었답니다. 몰랐죠?
딱 그런 표정이시라 조금 난감해졌다.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어쩐지 하늘과 땅과 지나가던 참새까지 무안해질 분위기라 나는 필사적으로 놀란 연기를 해야만 했다.
뒤쪽에서 이 팀장이 웃음을 참는 듯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