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45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15
* * *
“아버님 계십니까?”
드물게 등장하는 호칭이었다.
장진욱은 공사를 철저히 구분하도록 배웠고, 사적인 영역이 두 부자 사이에 좁아질수록 호칭은 한쪽으로 옮아갔다.
이젠 본인 앞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단어.
그걸 의식적으로 꺼낸 것은 이 집사님에게 괜한 우려를 끼치기 죄송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장진욱에게 있어 이 노인은 이 집에 두고 온 유일한 미련이었다.
이 집사는 어딘가 난처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예, 하지만 지금은 손님을 뵙고 계십니다. 꽤 긴요한 얘기를 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손님?”
“꽤 오래 걸릴 듯합니다. 별채에 계시면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
누군지 말하지도 않고, 잠시 기다리라는 언질조차 않는다.
자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 집안을 오래 겪어 온 이 집사만의 독특한 배려임을 장진욱은 알았다.
그는 불편한 화제를 우회하게 만드는 기묘한 화법에 통달했다.
그가 방지해 온 부부 싸움이 몇 건이며 응당 아들들의 종아리에 작렬했을 사모님의 회초리를 잠재운 건 또 몇 번인가.
즉, 저 안에는 대면하면 장진욱이 불편할 누군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장진욱은 픽 웃었다. 누가 있을지는 익히 짐작됐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물러나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집사님, 제 눈치 그리 보실 것 없으십니다. 예전처럼 어리진 않으니까요.”
“……제가 어찌.”
“잠깐만 얘기하고 나오도록 하지요.”
막지도 제지하지도 못하는 이 집사의 난처함을 애써 뒤로하고, 장진욱은 응접실로 성큼 걸어갔다.
노크를 하려 손을 들었을 때,
그러나 안에서 들려온 한마디 음성이 그를 돌처럼 그 자리에 굳혔다.
-당신이 제 아들이었다면…….
왜일까. 스스로도 기묘했는지 장진욱은 멈추어 선 팔을 묘하게 내려다보았다.
생각과 몸이 일치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분명 두드리라고 뇌에서 명령을 내려다보냈는데 가슴 언저리에서 신호가 교란된 것만 같다.
다시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안에서 들려온 웃음소리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허공에 붙들린 손아귀가 빈 곳만을 거칠게 움켜쥔다. 팔뚝의 혈관이 움트고 굽혀진 손의 관절마다 밀려난 피로 창백했다.
몸의 이쪽과 저쪽이 길항하는 듯, 그는 몇 초 동안 그 자리에 고착돼 있었다.
단지 몇 초뿐이었다.
장진욱은 곧 숨을 가다듬고, 착색된 안색을 안정시키고, 살짝 틀어진 넥타이를 틀어쥐고 반듯하게 고쳤다.
철혈의 기업가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데는 찰나면 족했다.
그는 되돌아 나와, 안절부절못하는 이 집사에게 정중히 고했다.
“아버님이 얘기가 길어지실 거 같더군요. 다음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럼 왕래하셨다고 가주님께 말씀을…….”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발자국을 거실에 찍으며 온 길을 익숙하게 되돌아 나갔다.
이 집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도련님. 건강하신 걸 오랜만에 보니 이 늙은이도 마음이 놓입니다. 가끔 들르시지요.”
장진욱은 단정한 미소로 회답했지만, 말로는 끝내 되돌려주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니, 앞마당은 드센 겨울바람과 쨍한 햇살이 영역다툼을 하고 있었다.
장진욱은 어디 발을 뻗을 곳을 찾지 못해 한동안 그 자리에 멎어 있었다.
그 순간 흘러나온 말은 한숨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넌 죽어서도 거기에 있구나. 이길 수가 없어. 도무지 이길 수가…….”
* * *
“……아이고, 이 입이 무슨 실례되는 말을. 늙어서 가끔 이렇게 헛소리를 합니다. 하하.”
“아뇨, 괜찮습니다. 저야 영광인걸요.”
장건철 회장 특유의 필요 이상으로 겸양하는 말도 듣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가 무슨 배부른 소리를. 차남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였고, 장남은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LS의 국내 재계 순위를 역전시키며 그 드물다는 ‘호부호자’가 되는 기업인이다.
이 정도면 자식 농사가 풍년이다 못해 소출이 미쳐 날뛰어서 시장 가격의 교란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놀랐습니다. 갈라진 강물들도 다 바다로 통한다는 건가요. 역시 비범한 사람은 생각부터가 다르군요. 예술적 식견은 물론이고,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는 안목에, 정치의 맥을 짚는 통찰까지. 정말…….”
탄복, 경외, 소유욕, 기타 등등의 감회들이 동공에서 폭죽 놀이를 하고 있었다.
뭐랄까, 호감도가 미터기를 뚫고 쭉쭉 오르는 게 헛것으로 보일 것만 같다. 기껍고 감사하긴 한데 엄청시리 부담스럽다.
방금 안 사실인데, 난 내 생각보다 이런 일에 면역이 없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 내 재능에 반해서 무조건적인 팬심을 보내 온 적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 없었지.’
윤하와의 애정은 그냥 형제애에 가깝다.
양동명은 날 스승처럼 여길 뿐 내 재능에 매료된 게 아니다. 밴드부 사람들도 날 인정하고 따르긴 하지만 전폭적인 애정이라면 좀 미묘했다.
‘그럴 만한 계기가 없기도 했지. 설사 있었다 해도 그들에겐 제대로 볼 안목과 경험이 부족했을 것이고.’
반면 윤정희는 내 유능함을 알아볼 만한 눈도 있고 인정도 했지만 그게 애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재능은 도구일 뿐 결코 목적일 수는 없었으니까.
장건철 회장은 팬으로서 내게 팍 꽂힐 조건을 여러모로 갖추었던 셈이다.
“……아, 이거 참. 오늘은 더 오래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아아.”
어쨌든 사안의 다급함과 나 자신의 참을 수 없는 멋쩍음이 잘 맞아떨어져 그 자리는 빠르게 흐지부지 됐다.
장 회장은 안절부절못했고 나는 부끄러워서 낯이 익어 버리기 직전이었다. 예술을 논하기에 썩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셔도 좋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제가 불러다 놓고 이거 참. 면목이 없군요.”
“시간이야 또 있으니까요.”
“다음엔 정식으로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깜짝쇼는 오늘로 충분하니 다음부턴 미리 연락을 드리죠.”
그리고 난 장회장의 직통 번호가 적힌 명함을 그 자리에서 득템했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회장 명함치곤 수수했지만, 이 종이 한 장 팔겠다면 경매장에 몰려들 경제인들이 수두룩할 것임을 생각하니 그 자체로 묵직했다.
“죄송해서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당장 생각나는 게 없군요. 작가님은 필요하신 거 없으십니까?”
“그거라면…….”
사실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지.
난 아까부터 하고 싶어 입이 근질대던 말을 바로 꺼냈다.
* * *
“이쪽으로 오시지요.”
장건철 회장과의 회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난 여전히 저택을 떠나지 않았다. 이 집사라 자신을 소개한 노인의 안내로 이 집을 투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냥 떠나기엔 아쉽지. 암.’
내 요구는 간단했다.
-회장님의 컬렉션을 좀 구경하고 싶습니다.
이 저택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찌릿대는 [율리시즈의 나침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예술 문화에 애정과 관심이 지대한 부호의 집인 것이다.
그의 집안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의 카르마가 깃들었을지는 상상만 해도 아찔할 지경이었다. 느껴지는 감각도 범상치 않았다.
‘……적어도 세 개 이상.’
카르마의 감각은 랭크의 고하보다는 다수가 밀집해 있을 때 더 강렬하다. 서른 개 넘게 수집해 본 경험으로 대충 가닥이 나왔다. 여기는 그야말로 보물 창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회장의 컬렉션을 기대하는 결정적인 이유.
‘장건철 회장이 에릭 클랩튼의 블랙키를 경매에서 매입했다는 게 기사로도 떴었지.’
앞서 내가 슬로우 핸드(Slow Hand)란 칭호에 대해 얘기했던가.
존 메이어가 물려받아 유명해진 이 말은, 본래 과거부터 지금까지 줄곧 기타 본좌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에릭 클랩튼의 것이었다.
그리고, 블랙키(Blackie).
에릭 클랩튼이 가장 즐겨썼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의 애칭.
복각하여 커스텀 제품으로 팔리는 가격도 만만찮지만, 클랩튼 본인의 손때가 묻은 악기라면 그야말로 억대를 호가하는 소장품이다.
‘꽤 오래 쓴 진품이라고 하던데…… 혹시 탤런트가 묻어 있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에 벅찬 가슴이 뛰었다.
이 집사의 안내를 받아 장 회장의 컬렉션이 모인 회랑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대박.”
새하얀 대리석이 햇살을 받아 말갛게 달아오르는 곳.
빛이 천연의 색을 뽐내며 뻗어가다 곳곳의 유리에 왜곡되며 눈부신 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반짝이는 곳마다 꼭 반짝이는 작품이 하나씩 있었다.
석상. 그림. 기하학적 구조물과 고고학적 유물들.
난 감상하는 척하며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물론 내가 끄덕인 이유는 예상대로 이곳에 카르마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거 만져 봐도 될까요?”
“원래는 안 됩니다만 회장님께서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라 했으니…… 조심히 만지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아기 다루듯하겠습니다.”
띠링-!
[어느 유목민의 안력](Rank D)
띠링-!
[어느 서예가의 일필휘지](Rank D)
띠링-!
[어느 마술사의 심폐지구력](Rank D)
괜찮다 싶은 것도 있고 이게 뭔가 싶은 것도 끼어 있었다.
마지막은 마술사가 마술에는 재능이 없는데 하필 숨은 잘 참아서 탈출 마술의 대가가 되었다는…….
아무튼.
그중에 얻은 것 자체가 황송한 탤런트라면 단연 이것이었다.
[도마 안중근의 사격실력](Rank C)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FN M1900 권총이 다름 아닌 여기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다!
일본의 골동품점에 떠돌아다니던 것을 직접 픽해서 가져왔다는데, 재밌는 점은 장건철 본인도 이 총의 정확한 내력을 모른다는 것이다.
“가주님께선 남다른 안목이 있으시지요. 본인도 잘은 모르지만, 유독 느낌이 좋은 것들이 있다 하십니다. 그중엔 진짜 유물로 밝혀진 것들도 다수죠. 지금은 다 박물관에 보냈습니다만.”
“……이 총은.”
“글쎄요. 이건 감정사들도 확답을 못 해서. 훼손도 심하구요. 안중근 의사의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있지만, 설마 그렇게 형편이 좋을 리 있겠습니까?”
아니, 형편이 참 좋네요.
장 회장의 감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쯤 되면 무형문화재로 등록해야 옳다…….
어쨌든.
그 이후로 좋은 작품들은 간간이 보였지만 카르마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은 채 회랑의 중심부에 다다랐다.
그리고-.
“……아.”
“음, 별로인가요? 저건 만져 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집사님이 내 탄식을 제대로 읽어 낸 모양이다.
에릭 클랩튼의 블랙키에는 안타깝게도 카르마가 깃들지 않았다. 기타 능력을 얻을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카르마는 고인의 것이 아니면 깃들지 않는 건가. 에릭 클랩튼은 아직 정정하지.’
지금껏 표본은 다 그랬지만, 100퍼센트 확신은 못 하고 있었다.
왜냐면 젊어서 평생분의 운과 재능을 다 쏟아 역작을 만드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경우라면 드물게 예외가 될 수도 있으리라 희망을 가져 본 것이다.
음악가의 전성기 시절, 명곡을 수없이 써 낸 악기라면 어쩌면…… 그런 행복 회로를 돌려 봤지만 아무래도 꽝이었던 모양이다.
“가주님의 수집본은 여기까지입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예, 이만. 음?”
하지만 이상했다.
여전히 안쪽으로부터 전해져오는 감각에 [율리시즈의 나침반]이 강렬히 진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중에 가장 격렬했다.
이렇게까지 힘차게 날 이끈 감각이 있던가?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집사님, 이 안쪽에는 뭐 없나요?”
“음, 안쪽 말입니까? 거기는…….”
물론 난 거기가 소각장이라도 쳐들어갈 의향이 있었으므로 대답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난 그날 두 번째로 Rank A급 재능을 얻게 되었다.
* * *
“왜 그렇게 싱글벙글이냐?”
이 팀장이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물론 난 너그러이 가납했다. 오늘 자정까지는 마더 테레사 텐션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쇼핑이었습니다.”
“……뭔 소리야. 회장님 집이 뭔 아웃렛이냐?”
“후후. 우후후후…….”
“동공이 아주 가셨네. 야, 가기 전에 너네 직원들은 데리고 가.”
묘한 워딩이 날 천상계에서 지상으로 불러들였다.
“직원?”
“그래.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더라.”
그제야 뽕에 취해 있어서 보이지 않던 광경이 보였다.
뚱한 얼굴의 이 팀장의 옆으로,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은형욱과 이정숙이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정보 조직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원정을 보냈던 두 요원이 돌아온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많이 배웠다. 더 데리고 있고 싶었는데…… 뭐, 본인들이.”
“저희 버리시나 싶었습니다. 사장님.”
“방치 플레이도 살짝 짜릿하고 나쁘진 않았지만요.”
“당신은 좀 닥쳐 줘…….”
이정숙이 덧니를 드러내며, 그 엉망진창인 입담과는 별개로 아담하게 웃었다.
“그래도 빨리 일을 해 보고 싶어서 왔답니다.”
“잘 오셨습니다, 두 분 다.”
안 그래도 둘이 필요하던 타이밍이었다.
“두 분이 알아 봐주셔야 할 게 마침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