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46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16
* * *
오늘의 스파링은 평소보다 강렬하고 번다했다.
손은 복부를 치려다 다리를 휘감았고, 스텝을 밟던 발은 단지 이동 수단이 아니라 공격의 도구가 됐다.
타격은 위아래로 복잡하게 쏟아졌다. 칠 수 없다면 달려들어 잡고, 얽고, 죄어 왔다.
무제한급 MMA.
공격의 방법이 다양해진 것만으로 판단에는 몇 배의 연산이 동원됐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던 방식에도 업데이트가 필요했다. 시선, 무게 중심, 어깨의 움직임, 간격, 링 위의 모든 징후들은 새로운 규칙으로 다시 정립되어야 했다.
물론, 그런 페널티는 내게 별다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팡-! 팡팡-!!
“……으윽!”
태클하려던 시도를 한 박자 앞서 전진해서 차단.
낮은 훅으로 안면을 노리니 자지러지며 물러선다.
흔들린 리듬의 틈을 비집고 잽을 꽂으니 페이스가 급격히 흐트러진다. 찰나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복부를 타격.
무의식적으로 바디를 가드하기에 바로 훅으로 턱을 흔들어 주었다.
그대로 기절.
“……이런 미친.”
텁석부리의 중년 남성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가 황급히 입을 단속했다.
이해한다.
링 위에는 세 명이 비슷한 포즈로 주저앉아 있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기절시켜 드렸으니 앉은 자세도 비슷할 수밖에.
1대3의 상황이 2분 안에, 그것도 전자의 일방적 구타로 정리됐으니 욕설은 당연했고 몰래카메라를 의심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저거 뭡니까?”
“나도 몰라. 그냥 어느 순간 뿅하고 등장했어.”
이정철 관장이 낄낄 웃으며 답했다.
“저런 놈이 왜 프로는 안 한다는 건데요?! 효도르도 갖고 놀겠구만!”
“난들 아냐. 어쨌든 데려다가 좀 가르쳐 봐.”
“……가르침? 그딴 게 필요 있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본인이 그렇게 원하니 들어 줘야지.”
MMA를 배워 보고 싶다 하니 이정철 관장이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이름이 권철이었던가.
밑바닥부터 자수성가해서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말 한마디에도 거드름이 디폴트로 깔려 있던 작자였지.
내가 프로들 틈에 껴서 그에 준하는 트레이닝을 받겠다 요구하니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배때지에 낀 거만을 성심성의껏 다이어트시켜 드린 게 지금 상황이었다. 연습 잘하다 괜히 날벼락 맞은 선수들만 불쌍하다 하겠다.
난 글러브를 벗으며 링을 내려왔다.
“뭐 더 필요합니까? 아마추어 말고 프로를 올려 보시든지.”
“……야 괴물딱지. 너 진짜 선수 할 생각 없냐?”
“이 체육관은 그게 필수입니까? 그럼 됐고요.”
“시부럴.”
권철은 최고급 스테이크집에 방문해 최고급 풀을 씹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깝다 이거겠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호신용입니다. 선수가 될 생각은 없어요.”
“호신? 너한테 호신이 필요할 일이 뭔데? 뭐, 고릴라가 반응하는 페로몬이라도 선천적으로 타고났냐? 동물원에만 가면 걔들이 막 담장을 넘어와서 그래?”
“대충 그런 걸로 해 두죠.”
“좋아.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이거지. 근데 내 지도가 필요하겠냐?”
“왜요?”
“너 복싱만으로 세 명을 때려 눕혔잖냐. 아니, 그게 복싱이 맞긴 한가? 아무튼. 그리즐리한테 주짓수를 가르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데.”
난 피식 웃었다. 그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방금 나는 MMA선수 세 명을 상대로 복싱 기술만 사용해서 제압한 것이었다.
이걸 보고 복싱이 MMA를 이겼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내가 그들을 압도할 수 있던 이유는 가끔 나조차 기가 막히는 수준의 신체 능력 때문이다.
<슈거 레이 로빈슨>의 감각으로 격투의 맥을 잡고 초인적인 힘으로 짓뭉갠다. 여기서 인간의 기술이 기여한 바는 극히 미미했다.
“모르는 거보단 낫겠죠.”
일단은 그렇게 둘러대었다.
내가 MMA를 배우려는 건 기술적인 활용이 목적이 아니다.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나쳤지. 이건 단적으로 말해, 좀 더 간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다.
‘잘 알아야 더 잘 때려잡지.’
움직임의 추이. 버릇. 호흡의 리듬. 그런 정보들을 입력해 두는 것과 아예 제로베이스에서 상대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니까.
그러니까 난 기술을 단련하기보단 이해하고 싶어서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MMA에 익숙해진 다음엔 크라브마가를 도전해 볼 생각이다.
잠깐 상대해 봤을 뿐이지만, 빨간마스크의 격투 스타일은 MMA와 크라브 마가 양쪽을 마스터해서 잘 섞어 낸 느낌이었다.
난 그런 빨간마스크에게 단체로 둘러싸여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수준까지 내 기량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뭔가 엄청 재수 없네. 너 그냥 아마존에 가서 단련하지 그러냐? 괴수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서.”
말은 그러면서도 권철은 날 받아들이고 싶어 근질대는 낌새였다.
옆에 두고 살살 긁으면 꼬드길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품는 듯했다.
UFC에 보내서 떼돈 번 슈퍼스타를 키워 본 적 있다 이거지. 난 그가 헛꿈을 꾸도록 배려해 드리고는 권철 체육관을 나섰다.
오는 길에 이정철 관장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이제 모델 계약도 다 끝났겠다. 그럼 이제 우리 체육관은 안 올 거냐?”
“뭐, 가끔 피자라도 사들고 갈까요?”
“애들 운동하는데 그럼 되겠냐. 나한테만 갖고 와. 나만 먹게.”
“예입.”
생각해 보면 신세를 많이 졌지.
관장님 자체보다는 그가 모은 컬렉션의 도움이 지대했다만, 어쨌든, 감사의 마음은 있었다.
“아아. 너도 가고 현지 씨도 없으니 우리 체육관도 이제 망하겠구나-.”
인생의 내리막길에 멀거니 서서 찬란했던 과거를 올려다보는 표정으로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가당찮았다.
“이젠 간판 모델만 다섯 명이던데요. 아주 잘나가시더만.”
“너만 하겠냐. 이건 말하자면, 질보다 양 전략이지. 아이돌을 왜 네다섯 명씩 뭉쳐서 내보내겠냐? 그중에 한 명만 얻어걸려도 대충 중박은 친다는 마인드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은 트레이너가 아니라 마켓팅을 했어야 해.
“현지 쌤은 요새 안 나오시죠?”
“그래. 너 안 나오고부터 발길을 딱 끊더라. 에잉. 쓸데없이 사람이 단호해서는. 계약도 기어코 일주일 단위로 하자더니 내 이럴 줄 알았지.”
“현지 쌤 성격에 그것도 많이 참은 거예요.”
“난 너나 현지 씨나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타고났으면 난 편하게 얼굴 팔아먹고 살 텐데 말이야.”
애초에 현지 쌤이 체육관에 오신 것도 내가 걱정되어서였다.
내가 없는 체육관에 굳이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모델 일은 돈이 되지 않느냐고? 설마.
‘그런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살았겠지.’
양호실 단골이었어서 잘 안다.
양호실 휴지통 안은 거즈나 소독 솜이 아니라 기획사 명함이 늘 막대한 지분을 점유하고 있다. 매일같이 버려도 지겹도록 쌓이는 거겠지.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보다 몇 십 배는 간단하게 돈을 긁어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양호 쌤은 화려하게 차려입느니, 안전모를 쓰고 굴삭기 기어봉을 화려하게 조작하는 여자였다.
이젠 나도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쌤, 바쁘세요?
생각 난 김에 문자를 보내 보았다. 답장은 한참 뒤에나 돌아왔다.
-알바 중. 바쁨. 미안. 왜?
이런저런 텍스트를 쳤다가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제아무리 Rank A급 [언어] 재능이 있어도 단어가 골라지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짜낸 문장은 고작 이런 수준이었다.
-그냥요. 언제 한 번 뵈러 갈게요.
-그래.
이번 답장은 아까 보다 훨씬 빨랐다. 심지어 한 번 더 오기도 했다.
-기다릴게.
* * *
“역시 네가 있어야 된다니까. 이제야 뭐가 좀 되는 느낌이네.”
윤정희가 뿌듯하게 웃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툭툭 두드렸다.
축제가 바로 코앞이었다.
모두가 들뜨고 선생들도 본격적으로 놀자판인 와중에 학생회실만 홀로 엄중했다.
말이 좋아 축제지, 관리자 입장에선 광기가 정식 허가를 받아 영업을 개시하는 날인 것이다.
일반인은 또라이에 입문하고, 원래도 또라이였던 자들은 무법자로 전직하는 단 하루. 안전 수칙이란 스팸 메일 수준으로 하찮게 취급될 것이다.
안전 책임이 있는 학생회는 긴장을 바짝 세운 채, 마지막까지 안전 교범을 철저히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도 부득이 끌려와 일을 돕는 중이었다. 배윤하가 하도 앓는 소리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뭐, 요새는 비교적 한가하거든요. 저번 일 신세도 갚을 겸해서.”
“어머? 고작 이걸로 퉁 치려고 했니?”
“그런 눈으로 보셔도 할 수 없어요. 축제 당일엔 저도 밴드부 일로 바쁘거든요.”
“매정하네-. 예전의 한열이는 좀 더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윤정희가 답지 않게 불평을 하며 기지개를 쭉 핀다.
그러더니 11자로 들어 올린 팔을 그대로 책상에 얹으며 엎드렸다. 권태로운 햇살이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표정을 늙은 고양이처럼 노곤하게 풀어헤쳤다.
둘뿐인 학생회실은 조용했다.
먼지 한 올조차 조심스레 떠다니는 적막 위에 난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을 무심하게 추가했다. 사그락. 사그락.
“……좋네.”
“예?”
“햇살은 따듯하고. 조용하고. 무엇보다 오늘 찻잎은 품질이 유독 좋았어. 향기에 안긴 듯해. 포근하고 달콤해.”
읊조리는 듯이, 묘한 리듬감이 깃든 목소리.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게 윤정희의 입에서 나왔으므로 난 의아했다.
그녀는 타인의 환심을 사는 말은 곧잘 꾸며 내지만 자신의 감상을 쉽게 내어 놓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그녀는 풀어져 있었고 감정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그녀답지 않았다.
난 작금의 이상 징후를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선배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후후.”
원래 두뇌가 수용 한계치를 넘어 작동하다보면 살짝 고장 나기도 했다. 난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놀러 가지 않을래?”
“네에?”
“어차피 점심시간 다 됐잖아. 나 오늘 도시락도 싸 왔는데.”
“……좋은 식당 놔두고 웬 도시락이에요? 서민 코스프레?”
“낭만이라고 해 줘. 자, 어서.”
벌떡 일어서더니, 이젠 아주 팔짱을 끼고 날 일으키는 게 아닌가. 난 아연한 심정으로 그녀의 손에 끌려갔다.
여러모로 오늘의 윤정희는 텐션이 엉망진창이었다.
우린 직권 남용으로 자물쇠까지 풀어 버리며 옥상에 돗자리를 깔았다.
“……뭐예요. 무슨 일 있어요?”
다소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서비스 센터에서도 질색해서 돌려보낼 정도로 고장 상태가 심중했으니 하는 말이었다.
“글쎄? 그냥 오늘 같은 날도 있는 거지. 요새 너무 달렸어. 힐링이 필요한 타이밍이야.”
“이게 힐링이에요?”
“물론. 난 가끔 먹지도 않을 도시락을 싸거든. 오늘은 운이 좋았네.”
별게 다 힐링일세.
아무튼 예쁜 함에 담긴 도시락이 하나씩 속을 드러냈다.
상큼한 과일. 두툼한 샌드위치. 각이 제대로 잡힌 오니기리. 차림은 간단했지만 색 배합과 데코까지 제대로 신경 쓴 도시락이었다.
“뭐, 감사히 잘 먹을게요.”
“그러렴.”
“오.”
한 입 물자마자 입안에서 풍미가 터졌다.
밥알들이 미각을 농락하듯 굴러다니다 그냥 녹아 버렸다. 뭐야. 뭘 어떻게 만들면 이렇게 되는 거지. 간만에 [요리] 재능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맛이었다.
새삼 느끼는 거다만 그녀는 요리를 대단히 잘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좀 의외였다.
“소원 성취 하시겠네요.”
“음?”
“꿈이 현모양처라고 하셨잖아요. 이런 도시락 싸 주면 남편은 아주 날아다니겠는데.”
“넌 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니?”
“공교롭게도 기억력이 좋은지라.”
샌드위치 하나를 꿀떡 넘기고 보니, 그녀는 옥상 아래쪽을 가만히 부감하는 중이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 벤치에 익숙한 얼굴 둘이 찰싹 붙어 있었다. 배윤하와 전상진이었다.
오호라.
난 일을 시키고 둘은 밖에서 노닥거리고 있다 이거지? 좋아. 너넨 설교 예약이다. 귀에서 피가 날 때까지 잔소리를 해 주지.
그런데 그 순간 번뜩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지금이 타이밍이네.’
분위기도 썩 나쁘지 않은 듯해서 물어봤다.
“둘이 사귀는 건 괜찮아요?”
“응?”
“거 왜, 그동안은 무슨 며느리 감별사처럼 굴었잖아요. 막 트집 잡아서 괴롭히는 시어머니처럼.”
“뭔 비유가 그러니?”
“아무튼.”
그녀가 쿡쿡 웃더니 샌드위치 끄트머리를 작게 베어 물었다. 오물대면서 그녀가 답했다.
“왜? 윤하 좋은 아이잖아. 착하고, 똑똑하고, 좀 계산속일 때가 있지만, 그것도 정상 범주 안이고. 너도 잘 알지 않아?”
“알죠. 근데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닐 거 같아서 말이죠.”
“예리하네.”
이제 그녀는 고개를 꺾어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새하얀 목덜미가 눈부시다.
“젠린의 아가씨가 곧 입양자를 선별하러 한국에 들를 거야. 우린 윤하를 추천할 생각이고.”
“……음.”
벌써 그럴 때가 됐나.
난 그 한마디로, 둘의 연애가 간단히 허가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윤하가 젠린에 입양되면 괜찮은 연결 고리가 될 거라 판단했군요. 둘의 관계는 방해는커녕 권장해 마땅할 일이 되었고.”
“그래, 맞아. 너무 계산적인 이유라 실망했니?”
난 어깨를 으쓱였다.
“뭘 새삼스럽게.”
“후후. 난 이래서 네가 좋아.”
“저한테 너무 빠지진 마세요. 인기 상품이라 순서를 한참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보다는 작고, 호호보다는 살짝 큰, 정숙한 범위 내의 홍소였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걸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아, 웃겨라.”
여전히 터지는 포인트가 미스터리였다.
그녀가 눈을 훔치는 틈을 타 나는 주먹밥 라인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내가 널 왜 좋아하는지 얘기를 했던가?”
“글쎄요. 내숭을 안 떨어도 되어서?”
“글쎄. 그런 걸까. 나도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윤정희가 사뿐히 일어나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녀 주변은 바람조차 비껴 가는 듯 고요했다. 티끌 하나 없이 높은 하늘은 그대로 그녀의 배경이 되었다.
무연하게 비어 있는 세상은 그녀에게 딱 맞게 어울렸다.
“넌 발버둥의 베테랑이니까. 습관처럼 꿈을 꾸고, 일어섰다가도 당연하게 넘어지지. 어리석게도 기대하고. 다시 배반당하고. 그래도 다시 일어서고. 그리고 또…….”
그녀가 몸을 돌려 난간을 등지더니 날 응시했다.
미소.
지금껏 본 적 없는, 겨울 같은 미소가 그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넌 어리석은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는 그럴 수 없었으니까.”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네요.”
“미안. 사실 나도 잘 모르겠네.”
그녀는 다시 등을 돌려 내 눈에 머물던 미소를 수거해 갔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한열아. 하나 부탁해도 될까?”
“예? 뭐,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언젠가 네가 날 미워하게 된다면, 내가 네게 보인 호의만큼, 딱 그 정도만이라도 날 인간으로 기억해 주겠어?”
그건 어쩌면 진짜 혼잣말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독백은 어쩌다 우연찮게 내게 불시착한 것이다.
희미하고 모호한 말.
정성들여 울린 목소리.
난 갸웃하면서도, 그 간곡함에 떠밀리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음,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래. 고마워.”
그녀가 돌아왔을 때 도시락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 다 집어 먹었나 스스로 놀라고 있는데 그녀는 개의치 않고 도시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들어가자. 점점 추워지네.”
“옙.”
그렇게 영문 모를 점심시간이 끝나고,
그 뒤로 그녀는 원래대로 돌아와 기계 같은 미소와 건조한 온화함을 갑옷처럼 둘렀다. 그녀가 흐트러진 순간들은 낮잠 속의 꿈이었던 듯이 빠르게 잊혔다.
그랬기에, 내가 그 순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먼.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