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47화>
14. 막을 테면 막아봐 - 17
* * *
“신중하게 생각하시죠.”
남자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핏이 정확해서 거의 살갗처럼 느껴지는 톰포드 쓰리버튼 슈트. 오래된 전축이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새빨간 벽지는 적나라했으나, 온화한 불빛은 거기서 천박함을 제거하고 원시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
그가 황혼을 넘나드는 중년이라는 점은 결점조차 못 된다.
이 모든 고풍스런 배경들은 남자의 나이에 설득력을 제공했다. 그는 올바르게 나이 들어 이 품격 있는 공간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춘 듯 보였다.
그 속내를 몰랐다면 좀 더 그럴듯했겠지.
그런 점에서, 이현지는 그를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 하나 꼬셔보려고 이 정도의 연출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다.
그 근성만큼은, 과연 아랫도리에 지배당한 자들 가운데 단연 발군이라 할 수 있었다.
“전 늘 신중합니다.”
딱딱 끊어지는 말투.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차를 들이마셨다.
“언제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굴 겁니까? 이젠 좀….”
“제가 그러고 싶을 때까지.”
“후후, 현지 씨의 그런 강단 있는 점도 저는 좋습니다만…. 솔직히 알량하군요. 시간을 내달라 부탁한 건 당신입니다만. 전 당신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겁니다.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 달라는 제 요청이 과했나요?”
“현지 선생.”
“…뭐?”
“씨가 아니라 선생입니다. 정정해주시죠. 우리가 딱히 사적으로 호명할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런가요? 오늘의 주제는 무척 사적일 거 같은데요.”
“당신의 관심사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 의도는 사적이지 않으니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건대 나는….”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 추레한 옷매무새를 당당히 내보이며 용건을 건넸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뒤로 질끈 묶었고, 얼굴은 화장은커녕 공업용 페인트가 거뭇하게 묻어 있다.
마른 땀으로 허연 티셔츠. 먼지 범벅의 바지. 심지어 소매에는 건축 시멘트가 다 마르지도 않아서 움직일 때마다 탁상에 흔적을 남겼다.
살짝 풍성하여 몸매를 완벽히 은폐하는 점퍼까지, 그녀의 복장은 이 장소의 품격에 흠집을 낼 목적으로 철저히 세팅된 전투복처럼도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은 남자의 홈그라운드였다.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야만을 뽐낸들 어떠랴. 발버둥 치면 그것대로 사랑스럽지 않은가. 남자는 그녀의 반항조차 여유롭게 음미했다. 그것이 자신의, 타고난 자의 특권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입니다. 제 말 제대로 알아들으셨나요?”
“아뇨. 솔직히 하나도 안 들었습니다.”
“…당신.”
“당신의 목소리는 음악처럼 감미롭지요. 하지만 난 어떤 노래든 가사까지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닙니다.”
“난 당신을 위한 전축 따위가 아니야.”
“아니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 반항할 테면 반항해 보아라. 원래 사냥이란 상대가 필사적일수록 잡는 보람이 있는 법이니까.
그때였다.
띠링-하고 그녀의 주머니에서 문자 벨소리가 울렸다. 맞은편을 노려보던 그녀의 시선이 자그마한 액정으로 천천히 옮아간다. 초점이 완전히 옮아간 순간.
남자는 충실하게 지켜온 여유를 일순 놓치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문자를 꼼꼼히 읽고, 공들여 답장을 작성하는 광경일 뿐이었다.
대화중에 무례한 행위라는 사실은 문제가 못 됐다. 그녀는 초지일관 적대적이었고, 만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무례했었으니까.
그저 그걸 능숙히 받아내는 일도 사냥의 재미라고 남자는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저건 뭐냐.
저 얼굴은 뭐냔 말이다. 풀어진 입가에 깃든 미소는 그녀가 우연으로라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누굽니까?”
“당신은 몰라도 될 사람.”
으득.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그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이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음에도, 그녀에게 낙담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군요. 일어나 보겠습니다.”
“앉으시죠. 지금 떠나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후회?”
그녀가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 따위는 날 후회하게 만들 수 없어.”
걸음을 옮겨 건물을 빠져나간다. 걸음은 디딜 때마다 탄력을 받아가며 가벼워졌다.
왜일까.
그녀는 원래 문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문자는 너무 많은 걸 생략했다. 감정이 어려운 그녀에게 대화란 마주보아도 버거운 것이었다. 하물며 전자적으로 교란되고 우스꽝스런 캐릭터를 대변인으로 내세우는 채팅창은 거대한 암호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지.
문자는 여전히 불완전했고 많은 부분을 누락했다. 딱히 대단한 수사학이 쓰인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 한 문장의 문자만으로도 답답하던 마음이 개고 머리가 말끔해진 이유는. 어째서 이것만은 파헤쳐야 할 암호가 아니라, 설렌 모험심을 자극하는 보물섬 같은지.
뭐가 다른 걸까.
그녀 스스로도 답을 내지 못했지만 텍스트를 쳐내는 손가락만큼은 경쾌했다.
-기다릴게.
* * *
나는 대문 하나를 앞에 두고 서성이고 있었다. 날선 질문이 문지기처럼 거기 버티고 섰다.
‘내가 이 선을 넘어도 되나.’
이 순간 나는 삼촌이 건넨 말을 거듭 반추하고 있었다.
-현지가 넌 좀 각별하게 생각하잖냐. …… 선을 지켜주니까. 일정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으니까.
그의 진단은 명쾌하고 신랄했다. 그로선 긍정적인 의도였겠지만 내게는 질책처럼 들려오는 말이었다.
결국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노력을 기울일 의지도 없었다. 그 이유는 삼촌의 말에 다 들어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지만, 거기 대단한 의미가 있나?
정확히 그 반대다.
전생의 나는 피상적으로 그녀를 연모했을 뿐이었다. 사춘기의 욕정과 최애 아이돌을 대하는 팬심이 뒤섞인 수준의 얄팍한 연정. 요컨대 대단할 것이 없었다.
회귀하고 나서는 앨범 속의 예쁜 사진을 보는 기분으로 그녀를 대했다.
난 그녀를 여전히 좋아했지만 그 감정은 과거의 잔상 같은 것이었다. 과거의 짝사랑이 옆에 있다는 상황에 취해서, 딱 필요한 만큼의 설렘만을 취사선택해서 즐겼다.
‘깊이 있게 이해할 생각이 없었지.’
난 지금의 동화책 같은 상황을 그저 아름답게만 보존하고 싶었다.
괜한 변수를 발굴해서 이 적절한 거리감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힘들여 그녀를 알려고 하지 않은 건 나 자신의 이기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녀로부터 실질적인 도움과 애정 어린 충고, 그 모든 과분한 관심들을 받고도 그랬다.
‘…….’
지금도 감히 그녀의 안에 발을 들였다가 튕겨 나올 것이 무서워서 서성이고만 있었다.
아, 그래서 여기가 어디냐고? 설명이 필요하겠군. 나는 내 동기를 되새긴다는 핑계를 대면서 벌써 두 번은 돌았던 동네 주유를 재개했다.
[천호 보육원]
경기도 남부의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작은 보육원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찾아낼 수 있던 건, 다름 아닌 발바리의 증언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먹잇감을 아무렇게나 정했을 거 같아? 그 김씨라는 남자랑 뭐 얼마나 대단한 의리가 있어서 같이 판을 짰겠어?
내가 발바리와 최초로 조우한 건 도박판이었다.
그것도 현지 쌤의 삼촌을 호구 잡아 털어먹으려 했던 사기도박판. 그리고 발바리는 그것이 결코 무작위나 우연이 아니라 어떤 필연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씨가 좋아서 그쪽을 공사 쳤을까? 그래도 꽤 오래 친구관계였다면서? 그걸 왜 하루아침에 무너뜨렸을까?
-내가 듣기론 사채를 써서 돈이 필요했다고….
-그래, 맞아. 하지만 그게 친구를 털어먹자는 극단적인 계획으로 이어지진 않지. 보통은 그렇단 말야. 여기서 바로 그자들이 등장해.
여기서 ‘그자’들이란 빨간마스크를 위시한 동부파의 사냥개들이었다.
그는 김씨를 잡아다 ‘각목과 다량의 물이 동원된 어떤 대화’를 거친 뒤에 삼촌을 털어먹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 즈음 아주 ‘공교롭게도’ 삼촌의 사업이 위기에 처했다.
김씨는 그런 삼촌에게 접근해 도박에 의존하도록 유도했고, 결국 사기도박판을 짜서 재기불능의 상황까지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사기도박에 동원된 타짜가 내 지인이거든. 별로 친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리고 그놈은 동부파가 운영하는 하우스에서 작업 뛰는 놈이었지. 난 그놈으로부터 이 판이 어떻게 짜인 건지 대충 들을 수 있었어.
그냥 민간인에 불과한 삼촌을 정확히 타겟하고 몰락시킨 이유.
그건 그가 관심 가져선 안 될 것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아내와 조카가.
-지나가다 못 먹고 헐벗은 고아들을 발견한 거야. 아주 오지랖이 태평양 앞바다 같던 두 여인네가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던 거지. 정부 민원도 넣고, 사비 들여서 먹이고 입히고, 그래도 개선이 안 되니까 변호사까지 고용했다지.
-…그게 무슨 말이죠? 고아들이 뭘 어쨌기에?
-자세한 건 몰라. 그 고아원이 동부파의 돈세탁 근거지였던지 그랬겠지. 아무튼 그 여자들이 하도 지랄을 떨어 대서 지금 원장은 일반인이야. 하지만 대신 방법을 우회하기로 한 거지.
변호사를 고용해서 귀찮게 한다면, 변호사를 수임할 돈을 없애버리면 된다. 가정이 풍비박산 나면 타인일 뿐인 고아들을 돌볼 여유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그 집 가장의 사업을 전면적으로 방해하고, 사기도박으로 구렁텅이에 처박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그건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현지 쌤의 외숙모는 그런 난리 통에 건강이 악화되어 유명을 달리하셨으니까.
-난 그 사실을 잊고 있다가, 동부파에 쫓기기 시작하면서 떠올렸어. 난 도피자금이 필요했고 복수심에 불타는 호구는 좋은 수입원으로 보였거든. 그 길로 김씨한테 가서 반협박 반설득으로 끌어들였지.
-협박?
-그 일에 동원된 당신을 빨간마스크가 살려둘 리 없다. 하나씩 제거하는 중이다. 한탕 해먹고 같이 이 나라 뜨자. 대충 그런 구라를 쳤지. 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짜 그랬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드네.
그러나 내가 추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일은 단순히 과거에 있던 일의 기술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현지 쌤은 집안이 망했어도 고아원을 후원하고, 고아들의 사정이 예전으로 역행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왔다.
직장 하나로는 부족했으므로, 두 탕, 세 탕, 몸이 허락하는 한에서 부업을 몇 개씩이나 동시에 뛰어가면서, 몇 년이나 고독한 싸움을 버텨온 것이다.
-당장의 유동자금이 부족할 뿐이야.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삼촌도 마찬가지이겠지.
그때 돈 없다고 한숨을 푹푹 쉬셨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섭섭하기도 하네. 도와달라고 했으면 기꺼이 그랬을 텐데.’
자신들만의 투쟁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손을 뻗으면 그들의 불운이 내게도 옮아올 거라고 염려했을까.
후자라면 쓸데없는 걱정이라 하겠다.
만약 불행에도 삼투압 현상이 있다면 본인 걱정들부터 하셔야 할 테니. 불행의 농도는 내 쪽이 더 시궁창이므로.
“에효. 쓸데없이 착한 사람들 같으니.”
“누가?”
“있어 그런 사람들이. 바보 같은데 미워할 수가 없지.”
“에에. 바보는 보살펴줘야 돼. 미워하면 안 돼.”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있군. 구제불능의 바보는 미워해도 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박종철이라고 있는데 말이야…. 음. 근데 넌 누구니?”
정신 차리고 보니 한 꼬마 여자애가 내 소매를 붙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무심하게 대답하는데, 좀 폭력적으로 귀여웠다. 아무튼 처음 보는 애다.
“지희. 이름 예쁘지?”
“어, 예쁘긴 하다만 그걸 물은 게 아닌데. 엄마는 어디에 있어?”
“엄마 없어.”
“그럼 아빠는?”
“아빠도 없어. 원래부터 없었어.”
고아군. 물론 생각만 하고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예쁜 지희 양이 내 소매를 잡으신 이유는?”
“오빠가 잘생겨서. 따라가고 싶어서 따라가는 중이었어. 안 돼?”
“안 되지. 내가 얼굴만 멀쩡한 납치범이면 어쩌려고.”
“그럴 리 없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란 말이야.”
이 순수한 외모지상주의의 출처는 대체 어딜까. 난 그럴싸한 가설을 떠올렸다.
“너 천호 보육원 아이구나?”
“응. 오빠가 어떻게 알아?”
“거기 자주 가는 예쁜 언니랑 아는 사이거든.”
하기야 그런 사람을 보고 자랐으면 예쁨이 곧 진리요 선의 척도라고 착각할 수 있겠지. 대부분은 어중간하게 생기고 어중간하게 못됐으니까.
“응? 현지 언니 알아? 언니랑 같이 천국에서 내려왔어?”
“미안하지만 거긴 내 고향이 아니야. 어쨌든 이런 데서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 보육원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같이 가자.”
“으응. 싫어어.”
그녀가 입을 비쭉 내밀며 반항했다. 미미한 힘이었지만, 어쨌든 꼬마 수준에서는 필사적이라 할 만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안 갈 거야. 오빠가 내 오빠 해줘.”
“…에효. 이게 갑자기 뭔지.”
무작정 데려갈 수도 없어 힘을 빼니 이번엔 꼬마 쪽에서 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보육원 반대편 방향이었다. 마지못해 끌려가며 물어보았다.
“왜 안 가겠다는 건데?”
“…나 입양 같은 거 싫어. 안 갈 거야.”
“아하, 그런 이유로…. 근데 왜? 부모님 생기면 좋잖아.”
“그게 뭐가 좋아?”
“뭐랄까, 그 사람들은 너만을 전문으로 사랑해주는 프로페셔널이거든. 아마추어들은 보육원에 아이들을 두고, 프로들은 아이들을 데려가지. 그러니까 좋은 거야.”
“그래도 난 싫은 걸.”
그녀가 시무룩해졌다.
친구들이나 원장 선생님과 떨어지기가 싫은가…라고 생각했던 내 뒤통수를 장렬히 가격하며 그녀가 부연했다.
“아빠라고 온 사람이 못생겼단 말이야!”
난 과연 이현지 선생님이 올바른 영향만 미쳤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아무튼.
생각도 복잡하겠다, 머리도 식힐 겸 애보기 잠깐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래그래. 잠깐은 어울려줄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하겐다-아즈.”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라니. 그리고 왜 하필 하겐다즈인데?”
“응. 지금 생각나는 것 중에 그게 가장 비싸. 남의 돈으론 일단 비싼 거부터 먹는 거랬어.”
“참으로 바람직한 금전관념이구나…. 누가 가르쳤는지 그 낯짝 한 번 보고 싶네.”
나는 이 당돌하고 치명적으로 귀여운 꼬맹이의 조막만한 손을 붙들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