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48화 (148/164)

<재능이 자꾸 늘어 148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18

난 같이 다녀 본 지 5분 만에 이 꼬맹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거 다 먹을 수는 있냐?”

“그러엄. 미래의 내가 먹어 줄 거야.”

“예의상 거절 같은 개념은 아직 배우지 못했니?”

“이 오빠가 무슨 순진한 소릴 하는 거야? 공짜라면 양잿물도 원샷 때려야 된댔어. 쯧쯧. 아직 뭘 모르시는구마안?”

하겐다즈를 종류별로 쓸어 담기에 한마디 했더니 돌아온 말이었다.

가만 보니, 이 녀석 혀를 차는 것도 범상치 않다. 전성기를 구가하는 꼰대가 오랜 시간 갈고닦은 혓소리처럼 찹찹 꽂혀 오는 것이었다.

당장 라떼를 외쳐도 손색이 없을 말투를 내 절반 되는 꼬맹이가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과연 조기 교육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나, 나름의 풍미가 있구만. 냠.”

그러나 광속으로 아이스크림을 박살 내는 모습은 딱 그 나잇대 아이였다.

난 픽 웃으며 엉망진창인 입가를 닦아 주었다.

“뭐야. 맛 정돈 알고 산 거 아니었냐?”

“아닌데. 남의 돈 원칙 두 번째. 비싼 것 중에 못 먹은 걸 시킨다.”

“아, 그거 시리즈로 있는 거였습니까.”

“고럼. 싼 건 비지떡이니까 비싼 건 케이크야. 케이크는 맛있잖아? 그러니까 세계 평화!”

“속보, 지희 어린이 비지떡 차별 발언으로 논란.”

“꺄하항. 그게 뭐람.”

우린 편의점 밖 파라솔 밑에 마주 보고 앉아, 각자 아이스크림과 블랙 커피를 든 채 경외인지 질색인지 모를 시선을 교환했다.

찬바람 맞아 가면서도 꿋꿋이 얼음덩이를 씹는 호연지기에 나는 경탄했고, 녀석은 까만 물을 들이켜 가며 혀와 위장을 단련하는 내 극기에 탄복했다. 과연 범상찮은 꼬마로다.

그뿐인가.

지희는 한통을 뚝딱해 버리고는, 날 뚱하게 쳐다보다 갑자기 턱을 움켜쥐며 웅크렸다.

“아야아야. 지희는 이가 시려워요. 코코아로 따듯하게 덥혀 줘야 해요.”

“잘도 뜯어먹더니 이제 와서 눈치 보는 거냐? 하던 대로 하세요.”

“후식도 사 줘.”

“그런 건 후식이라고 하지 않는다만. 근데 그걸로 모자라?”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야. 소녀의 위장은 섬세한 법이란 말이야.”

실례라니. 위장에 아공간을 탑재한 XY염색체의 신비로움은 문외불출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깽깽대는 게 귀여웠으므로 순순히 손에 핫초코를 쥐어 주었다.

왼손에는 하겐다즈가 담긴 봉투, 오른손에는 그란데 사이즈 핫초코를 든 그녀는 전리품을 뽐내는 승전 병사처럼 보였다.

아무튼.

배불리 먹였겠다, 이제 피곤해지기만 하면 최초의 가출 의지는 망각되고 알아서 돌아갈 거라 판단, 문구점에서 찍찍이 캐치볼을 사 와 결투를 신청했다.

꼬맹이의 눈이 반짝였다.

“나, 나 그거 엄청 잘해.”

“오, 그러냐?”

“근데 난 여자애라고 남자애들이 안 끼워 줘. 여자애들은 저런 거 관심이 없고. 그래서 맨날 혼자만 했어.”

“저런. 미래의 선동열을 못 알아들 보셨네.”

안 그래도 그걸 계속 힐끔대기에 가져온 것이었다.

그래도 반쯤은 넘겨들었는데, 내 [안목]은 이번에도 성실하게 작동했다. 그 조막만 한 손으로 뿌리는 피칭이 아주 제대로였다. 찍찍이 글러브에 공이 찰지게도 붙어 왔다.

“진짜 글러브 쓸 줄 알아?”

“알아! 알아! 완전 알아!”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근처 운동 용품점에 가서 어린이용 글러브까지 사서 선물했다.

지희는 노란색 글러브를 한참 내려다보다, 하겐다즈를 흡입할 때도 보이지 않던 황홀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오빠.”

“왜.”

“나 오빠한테 시집갈래.”

“판사님, 저는 이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캐치볼을 우애롭게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뭐랄까. 하다 보니 정말 생각 외로 잘 따라와서 필요 이상으로 열을 내기도 하였다.

“자, 공 이렇게 잡고. 좀 더 깊숙하게. 그러면 손목의 스냅이 덜 먹게 되어서 회전이 어느 순간 딱 끊기지. 이게 바로 체인지업이다.”

“오오. 체인지업!”

물론 듣자마자 변화구를 휙휙 던져 내는 일은 없었지만, 괜찮았다.

그냥 그녀에겐 던지고 받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다.

뜻대로 팔이 안 움직여서 성질도 부려 보고, 그러다 뽀록 한 번 터져서 환호성도 터뜨리고, 분주해진 땀샘과, 뻐근한 근육이 전해 오는 충실감을 만끽했다.

[안목]으로 판단컨대, 지희는 야구만이 아니라 그냥 운동 신경 전반의 밸런스가 좋은 듯했다.

“너 운동 좋아하지? 지금 하고 있는 건 없어?”

“몰라아. 언니들은 맨날 인형 놀이만 해. 여자애는 그래야 된대. 이게 다, 그 뭐야, 고자인 성관념이 문제라니깐.”

고루한 성관념이겠지. 꼬맹이가 어디서 어설프게 말을 주워들어서는. 쯧쯧.

아무튼 같이 땀을 빼고 난 우린 좀 더 친근해졌다.

내친 김에 2차로 오락실까지 가서 막판 보스 하나를 같이 정복한 뒤로는 영혼의 형제라 해도 좋을 사이가 됐다.

두 시간이 뚝딱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야 우리는 각자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현지 쌤 뵈러 가야지!”

“으아앗! 내 하겐다즈!”

우린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잠시 현자 타임을 갖도록 했다. 지희는 다 녹아서 봉투에 흥건해진 아이스크림을 버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히잉. 난 왜 이 모양일까.”

지희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난 왜 맨날 이럴까? 다들 그래. 지희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정말 그런 걸까?”

“……글쎄다.”

“난 그냥 하고 싶은 걸 할 뿐인데, 그러면 뭔가 하나씩 놓쳐 버려. 이러면 오빠들이 싫어하고, 저러면 원장쌤이 싫어하고…… 내가 뭘 하든 안 싫어해 주는 사람은 현지 언니밖에 없었어.”

“그랬어?”

“응. 그래서 난 현지 언니가 젤루 좋아. 근데 이젠 잘 모르겠어. 내가 이번에 입양 안 가면 현지 언니가 힘들대. 난 그러기 싫은데, 그래도 난 가야 할까?”

“…….”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원생 하나가 입양되면 그만큼 부담이 줄긴 할 테지만…… 그게 아이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면 결코 현지 쌤이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희가 어중간하게 들고 있는 봉투를 탁 뺏어서, 단호하게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으앗! 아까워!”

“꼬맹이가 뭔 궁상을 다 떨고 있냐. 그냥 멋대로 해. 떼쓰고, 맘대로 안 된다고 드러누워도 보고, 고집도 되는 대로 부려. 너네는 그래도 돼. 그건 아이들만의 특권이야.”

“…….”

“아이스크림, 그거 보육원 사람들 주려고 그렇게 많이 샀던 거지?”

“으응? 응.”

“그럼 또 사 줄게. 오빠 돈 많다.”

“오오미.”

짐작컨대, 아마도 입양 가기 싫어서 생떼를 부리고 소소하게 가출(?)을 감행한 거겠지. 근데 막상 나오고 보니 그렇게 속을 썩인 게 미안해졌고…….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으로 만회하자는 아이다운 논리 전개였다.

난 그 마음이 갸륵하고 소박해서 되도록 예쁘게 지켜 주고 싶었다.

“두 번째.”

“응?”

“내 최애는 현지 언니니까, 첫 번째는 못 주고. 우응, 그 대신 두 번째 자리를 드릴게요오. 오빠가 지희의 하트 넘버 투야.”

“아이고 감사합니다. 근데 너무 막 주는 거 아니냐. 널 애지중지 키웠던 훈육 쌤들 다 서운하시겠다 야.”

“다들 순위권 내에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그러면서 꺄르륵 웃는 것이었다.

이 당돌하고 뻔뻔한 꼬마 여자애는 역시 웃는 얼굴이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 * *

돌아가는 길.

오늘 하루 전력을 다해 놀아 재꼈는지, 언젠가부터 지희가 걸으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러다 언제 한 번 넘어질 거 같아 그냥 내가 들어서 운반하기로 했다. 한 팔 안에 소녀의 작은 몸이 폭 안겼다.

근데 일단 안아 주니 그때부터는 눈이 땡글땡글해지는 것이었다. 이 자식 혹시 노린 건가.

“오빠, 왜 지희한테 이렇게 잘해 줘?”

“잘생긴 사람은 다 착하다매. 니가.”

“그건 그래. 근데 착한 거랑 지희한테 잘해 주는 건 다른 거니까.”

“……글쎄. 굳이 이유를 꼽자면, 동생들이 생각나서일까.”

우리 보육원에도 동생들이 있고, 사이도 막 나쁘지는 않지만, 뭐랄까, 그럼에도 아이들과 나 사이엔 겸연쩍은 벽 같은 게 있었다.

동기들과의 사이가 악화되면서부터, 형이나 오빠라는 위치가 지긋지긋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무능한 나는 짊어진 것들과 함께 주저앉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방치했다.

배윤하가 나의 빈자리를 채웠고 보육원은 온전하게 굴러 갔다. 내 부재는 아주 미미했고, 그게 느껴질 때마다 난 열등감 속에서 스스로를 더 깊이 격리했다.

그리고 그때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어쩌면 난 그런 실패의 역사를 보상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다 얘기하기엔 복잡하므로 이렇게만 대답했다.

“그놈들도 너만큼이나 왈가닥이거든. 아주 손이 엄청 가요.”

“헤에에.”

물론 대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는지 지희는 품 안에서 꼼지락대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쌕쌕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잠이 깨지 않도록 승차감에 특별히 신경을 쓰며 사뿐히 발을 디뎠다.

그렇게 보육원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나, 납치범! 지희를 내놔아!”

옆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육박해 오는 빗자루가 있었다.

귀여운 수준이라 가볍게 피해 주었지만, 승차감을 해치는 바람에 지희가 깨고 말았다. 눈을 부비며 웅얼거린다.

“우웅? 지윤 언니?”

“지희야! 기다려! 언니가 구해 줄게!”

“호오.”

그러고 보니 얘가 가출한 건지 실종된 건지 보육원 사람들은 모르고 있겠군.

상황이 대충 납득됐다.

그런 와중에도 빗자루는 눈앞을 휙휙 오가고, 지희는 뭔가 흥미로워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고개만 까딱 흔들어 공격을 피해 가며 투덜거렸다.

“야,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설명을 해. 저분이 오해하시잖아.”

“그치만 가만히 있는 게 더 재밌을 거 같은걸.”

“이 자식이. 확 던져 버릴까 보다.”

“꺅.”

녀석은 내 협박에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품에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 어쩔까. 지금 두 손은 못 쓰니까, 발차기로 일단 빗자루를 박살 내고…….’

그렇게 방침을 정하고 발을 뒤로 슬쩍 뺄 때였다.

빗자루 들고 설치는 사람의 얼굴을 난 뒤늦게야 확인했다.

그 순간 온몸의 근육이 경직됐다. 다리는 뻣뻣하게 굳었다. 시야는 어긋났으며 신경의 중간 지점이 쇼트됐다.

그녀의 얼굴은, 이 순간의 현실감을 삭제하고, 아주 깊은 과거, 우묵한 심연의 복판으로 날 끌어내렸다.

딱-!

빗자루가 내 관자놀이를 때렸지만 난 반응은커녕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때렸다는 사실에 본인이 놀라며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그러곤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어머나. 납치범이 잘생겼어.”

“…….”

“지희, 너, 너 왜 웃어? 나, 납치가 아니야? 어, 어어엇……?”

여자가 빗자루를 떨어뜨리며 얼굴을 파랗게 물들인다.

그러나 내 눈엔 다른 것들이 먼저 보였다. 가느다란 손가락. 소박한 눈물점. 가느다란 눈매와 숱이 잘은 속눈썹. 얇아서 부러질 것만 같은 빈약한 몸.

피어싱 없이 깨끗한 귓불만이 날 현실로 소격시키는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어머! 죄,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아이고 이거 어째. 지희! 너 웃지 말고 이리 오지 못해?! 너 때문에 다들 난리난 거 몰라?”

“…….”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도. 짜증 날 때마다 튀어 오르는 특유의 톤도. 모든 것이 기가 막힐 정도의 해상도로 기억에 남아 현재에 잔상을 띄웠다.

“……준?”

“어머, 저를 아세요?”

글쎄.

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영원히 모른 채로 끝장났다고 해야 할까. 그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단어로 규정해야 그 시절의 너와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준.

이지윤.

어쨌든 확실한 건.

그녀가 내 첫 여자이자, 내 마지막 여자였었다는 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