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50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0
“……잠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나도 비슷한 일을 했다. 사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가물가물했다. 더하여 내 [암기력]이 버거워할 만큼 놈은 완벽한 몰개성을 자랑했다.
영화에서도 두목의 뒤편 세 번째 줄쯤에 위치하여 크레딧에서마저 ‘기타 등등’으로 퉁쳐질 존재였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두뇌를 풀가동해야 했다.
우린 거의 동시에 상대방의 이름을 떠올렸다.
“김종수였나? 이길재 라인을 탔었으니 지금쯤 쫄딱 망해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살아 있네.”
“너! 너어어! 이, 이한열! 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나!”
“재깍재깍 기억해야지 인마. 머리가 얼마나 나쁘면 조직의 원수도 까먹고 그러냐.”
“……네놈!”
참고로 일의 앞뒤가 명확해지면서 동부파가 내게 거액의 현상금을 건 상태였다. 그러니 말단 조직원도 내 얼굴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만 했다.
놈들이 느물대던 태도를 단단히 조이면서 살기를 피워 올렸다.
“뭐야. 여기서 한판 하게? 내 소문은 제대로 못 들었나보네. 너네 정도는 한 트럭 갖고 와도 나한테 안 돼.”
“…….”
가볍게 말했지만 눈으론 무겁게 살폈다.
숫자는 다섯.
겉으로 드러나는 무기는 없어 보이지만 요새는 송곳 같은 연장도 흔히 쓰므로 간과할 수 없다.
네임드도 없으니 지금의 나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 인질로 삼을 민간인들이 꽤 많다는 점이었다.
난 인물간의 거리, 동선, 예상 격투 시간 등을 재어 가며 몇 차례의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돌렸다.
충분히 되겠다고 판단을 내린 순간.
놈이 한숨을 푹 내쉬며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 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다 들었지. 네놈이 어떤 놈인지. 그리고 네놈한테는 섣불리 달려들지 말라는 경고도.”
“알면 됐고. 주제 파악이 되셨으면 신속히 꺼져 주셨으면 하는데.”
“왜?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김종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손 씻었다고? 동생들하고 흥신소를 작게 차렸을 뿐이야. 딱히 불법적인 일도 안 하는데 말이지.”
“똥은 씻어도 똥물이 남을 뿐이지.”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던가. 근데 그래서? 난 그냥 입양할 아이를 보러 왔을 뿐이라고? 고아에게 가족을 선물해 준다는 버젓한 이유에서 말이지. 근데 네가 무슨 근거로 어깃장을 놓을 거지?”
훌륭한 개소리였다.
왈왈거리는 소리가 우연찮게 사람의 말을 닮아 꽤 긴 문장을 완성시켰다. 노고가 갸륵하여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입양이 무슨 뽑기인 줄 아나. 너 따위 조폭 새끼한테 입양 허가가 내려질 리가…….”
“짠.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네요.”
놈이 종이 하나를 탁 꺼내 흔들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놈의 태도만으로도 그게 허가서임은 알 수 있었다.
……과연, 법원에도 손을 뻗어 뒀단 말이지.
“어라,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서 외부자는 너뿐인 거 아닌가? 꺼지셔야 할 사람은 당신 같은데. 그러니 비켜. 난 내 새끼한테 용무가…….”
“입양하려면 상호 합의가 필수적인 거 몰라? 얘는 당신이 엄청 싫은 기색인데.”
“그거야 뭐, 약간의 소통의 문제인 거지. 애들이 뭐 늘 솔직한가. 그, 뭐야, 츤데레? 좋은데 괜히 싫은 척하는 거. 뭐 그런 거지. 그러니까 어른답게 그런 마음도 잘 헤아려 주고 그래야 않겠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서가 아니라 개소리도 이쯤 되면 장인 정신이다 싶어서였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다.
“좋아. 그렇다면 보다 확실하게 거부 의사를 표해야겠군. 지희야!”
“응!”
“아까 연습한 거 지금 해 보는 거야. 준비됐어?”
왠지 이런 일이 있겠다 싶어 우리끼리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난 지희 옆에 쪼그려 앉아 그 작은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렀다. 글러브를 단단히 낀 지희가 목표물을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때마침 노리는 것이 딱 눈높이에 있었다.
“지희포 장전 완료!”
“전방 표적을 향해,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개시!”
“라져!”
내 코칭에 힘입어 한층 완벽해진 피칭 포즈.
공은 팔의 스윙과 손목의 스냅을 제대로 받아 허공을 날카롭게 갈라 내더니, 목표했던 그곳에 정확하게 직격했다.
콰직.
그것은 생명의 그릇이 깨지는 소리였으며, 또한 청춘의 종말을 선고하는 청아한 종소리였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고자샷이 제대로 작렬했다.
두 개의 알을 성공적으로 뭉갠 소프트볼이 임무를 마치고 통통 굴러 우리 쪽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글러브에 회수하는 것까지 완벽했다.
“……어어.”
반응은 한 박자 뒤늦게 찾아왔다.
“끄어어어억……!!”
“혀, 형님!”
“이, 이 새끼들이 무슨 짓을!”
저쪽에서 난리가 나든 말든 우린 눈을 맞추며 승리의 미소를 교환했다.
“지희야, 마무리 멘트까지 해야지.”
“음, 그러니까, 정의의 에그 크래셔가 오늘도 번민하는 어린 양을 현자의 길로 인도했도다!”
“좋았어. 완벽해.”
“……대체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지윤이 옆에서 경악했지만 우린 아랑곳 않고 세리머니까지 단행했다. 팔짱을 낀 채 바닥을 구르는 깡패 한 마리를 오시한 것이다.
훗날 준은 이 광경을, ‘우애로운 남매인데 불행히도 쌍으로 미친 듯했다’는 말로 묘사해 주었다.
“깨닫거라. 네 고간의 고통이 바로 진심의 척도임을. 츤데레니 뭐니 개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다음엔 소프트볼이 진짜 야구공이 될 줄로만 알라고. 알았냐?”
“알았냐아아?”
그렇다.
아무리 사람 말을 비슷하게 해도 결국 개과 포유류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으므로, 뜻을 보다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우린 동물계를 관통하는 의사소통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아아, 이것이 바로 거절(물리)라는 것이다.
“끄어어어어…….”
“형님! 정신 차리십쇼! 형님!”
“이 자식들이! 너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빽빽 시끄럽게 굴기에 심드렁하게 귀를 파며 답해 주었다.
“당연히 무사하지. 이쪽은 소년법이라는 강력한 방패가 있다! 억울하면 너희도 어려지던가.”
“……무슨 개소리야!”
“아님 너네 뒤 봐주는 사법부의 누구 씨한테 쫄래쫄래 가서 일러 보든지. 꼬맹이의 고자샷이 치명적이므로 반드시 기소해야 된다고. 그럼 불쌍해서 들어줄지도 모르겠네.”
“이런 개 같은…….”
오크들의 눈에서 불꽃이 터졌다.
좋아.
그래야 어울리지. 짐승 새끼들이 문명인인 척 서류를 흔들어 대는 게 역겹던 찰나였다. 놈들이 살기 등등한 눈빛을 틔우며 서서히 일어섰다. 손에는 저마다 작은 연장 하나씩 꼬나 쥔 채.
“지희. 지윤. 이젠 진짜로 저쪽으로 가 있어.”
“응!”
“……하, 한열아. 저, 저거 진짜 카, 칼인데? 빠, 빨리 도망가야…….”
“괜찮으니까 물러서.”
싸워도 가볍게 밟아 줬을 테지만, 사실 거기까지 갈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걱정은 무용했다.
실로 순식간이었다.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시점, 그야말로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검은 정장의 요원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그리고 등장하자마자, 노련하게 깡패들을 제압하는 것이다.
칼 든 손목을 진압봉으로 내려치고, 발을 걸어 내동댕이치고, 짓누르고 팔을 꺾으며 타이로 포박하는 것까지 물 흐르듯이 진행됐다.
진압을 마치자마자, 김 대리가 내게 다가와 목례를 했다.
“다 처리했습니다. 근처 CCTV도 모두 확보해 뒀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LS경호팀의 실전 능력은 명불허전이다. 지금의 내가 상대해도 좀 버겁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리고 이것을.”
김 대리가 내민 것은 다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샷의 시점은 제각각이지만, 어느 쪽이든 칼 든 깡패들의 위협적인 모습이 아주 잘 담겨 있었다.
“잘 찍혔네요. 이것까지 잘 포장해서 경찰에 던져 버리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난 바닥을 뒹굴거리는 종잇장을 낚아채서 쭉 훑어보고, 바로 김 대리에게 넘겼다.
“어떤 판사가 깡패한테 입양 허가를 내리는 호기로운 짓을 벌였는지 궁금하네요. 조사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어린 동생이 있는 입장에서 저도 짜증이 나는군요. 다른 곳도 아니고 가정 법원에서 이런 비리라니.”
“자리 봐 가면서 썩는 건 아니라는 거겠죠. 아무튼 부탁드립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거리를 가득 메운 맨 인 블랙들이 조폭들과 함께 사라지는 데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완전한 해결은 안 되겠지만 이걸로 시간 벌이 정도는 되겠지. ……망할 새끼들.’
전생의 지희는 어떻게 됐을까.
준이 그랬듯이, 저 어린 것도 저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져서 고초를 겪었을까.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신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분기를 잠시 가라앉힌 뒤에 돌아가니, 두 여자가 각자 상반된 반응으로 날 반겨 주었다.
“역시 내 영혼의 형제! 클라스 지리구여!”
“……이건 뭐지. 나 꿈 꾸나? 아니 꿈도 이렇게까지 허황되면 어이가 없어서 깨 버린다고. 그럼 진짜 뭐지? 으아아…….”
어쨌든, 꼬마 지희의 짧은 가출은 이렇게 막을 내린 것이었다.
* * *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요새는 좀 낫긴 한데 기호품까지 넉넉히 놔둘 형편은 아니어서…… 좀 오래된 맛이 나죠?”
“아뇨 괜찮습니다. 잘 마실게요.”
오래된 맛이라니.
무척이나 에두른 표현이었다.
정직하게 굴자면, 이 녹차는 행주를 진하게 우려낸 맛이라 표현함이 옳았다. 그것도 며칠 정성들여 숙성시킨 행주여야 한다.
혹시 내 인성을 시험할 목적은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이 들어 [눈치]를 발동해 봤다.
다행히 아닌 모양이다.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 천호 보육원의 원장 선생으로부터는 약간의 난처함밖에 전해지지 않았다.
“어쨌든 감사드려요. 지희가 당차 보이지만 그래도 여린 면이 있어서…… 그렇게 갑자기 없어지고 나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원장 선생님에게선 진심이 느껴졌다. 불긋하게 부은 눈가도 최근에 생긴 것. 옅게 맺힌 물기도 다 진짜였다.
이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동부파의 하수인 따윈 아닌 것으로.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도 없으세요. 저도 아직 고딩인 데다 고아일 뿐인데요.”
“예에에?! 전 어디 도련님인 줄로만…….”
“이해는 합니다만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말도 놓으시구요.”
“네에…… 아니, 그래. 알았어. 한열이라고 했니?”
“예.”
무심코 찻잔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빠른 대화를 위해 부득이 그랬다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반박자 앞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보육원 앞에서의 소란을 포함해서요.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 때문에 묻는 거겠지?”
“네.”
“……그래. 그럼 얘기해 줘야겠지.”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주 무겁게 뚝 떨어지는, 몇 년간 축적해 온 시름들로 응결시킨 듯한 호흡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내가 설립한 보육원이 아니야. 전임 원장이 자격 미달로 날아가고, 폐쇄 조치를 받은 걸 내가 인계받았지. 처음 왔을 땐 현지 눈총 많이 받았지. 날 의심했었거든.”
“그럴 만한 상황이긴 했었죠.”
“어떻게 폐쇄 조치 받은 지는 들었니?”
“대충은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입가만 간단히 적셨다.
“……그 새끼, 그러니까 전임 원장은 깡패였어. 자격증도 위조였고. 법의 사각지대에서 아이들은 무참하게 착취당했지. 상상할 수나 있겠어? 여기 온 그날, 아이들이 내게 수금한 돈을 바쳤어. 앵벌이해서 벌어 온 돈을. 난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
물론 상상할 수 있다.
나도 비슷한 처지에 있어 봤으니까.
“내가 안 받으니까 이상한 사람이란 표정을 짓더라. 그걸 바로잡는 데까지 몇 년이 걸렸어. 현지의 도움이 컸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지.”
“방해가 있었습니까?”
“끔찍할 정도로. 날 도와주던 후원자들이 싹 끊기고, 정부가 지원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지. 건물주가 월세를 인상하다, 끝내는 별 이유도 없이 나가달라는 통보를 들었고. 그 즈음 설상가상으로 현지네 집안이 파산했어.”
“…….”
안 망한 게 신기한 수준이군. 대충은 알았지만, 당사자에게 들으니 생각 이상으로 가관이었다.
“……정말, 현지의 헌신이 없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았겠지. 그래도 어떻게 지금까지 오긴 했네. 그리고 최근에 현지네 삼촌이 재기하면서 사정도 많이 나아졌어. 그런데…….”
“그런데?”
“이제 재정적으로 안정을 찾으니 놈들이 직접 찾아오기 시작했어. 손에 입양 허가서를 들고.”
“봤으니까 알긴 합니다만…… 그건 어째서죠? 아이들을 하나둘 빼내서 다른 곳에서 보육원을 차리려고? 놈들이 그런 수고를 감수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건 놈들과 대치하면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이었다.
최초의 방해 공작은 보복이라고 칠 수 있다. 돈줄 끊고 물리적으로 협박하는 건 놈들에게 흔한 래퍼토리니까 어색한 지점도 없다.
하지만 입양으로 빼내는 건?
사법부의 눈을 속이고 판사를 포섭하는 무리를 감수해야만 한다.
고작 보복을 위해 거기까지 할 이유가 있나? 그리고 천호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이라고 해 봐야 스무 명 수준이다. 놈들에게 그 스무 명이 위험을 무릅쓸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정말?
그때 그녀가 엄지손톱을 까득 깨물었다.
“……그래. 이상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돌이켜보면 이 보육원을 둘러싼 일련의 압박들이 전부 이상해. 처음엔 보복이라 생각했어. 다음엔 보육원을 되돌려 받고 싶어서 그런다고 여겼지. 하지만 아닌 거 같아.”
“대충만 따져 봐도 비용이 더 많이 들었겠는데요.”
“맞아, 그거야. 우릴 괴롭히는 데 든 노력이니 비용이니 다 합해 보면, 벌써 다른 곳에서 보육원은 몇 개는 지었을걸. 그렇게 생각하면…….”
“……젠장.”
이로써 짐작만 했던 가설이 근거를 얻어 단단한 이론이 됐다.
뒤늦게 수습하듯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원장 선생은 날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두 번째의 한숨을 쉬었다.
“짐작 가는 게 있나 보네. ……아마 내 생각도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보복도 아니다.
보육원에도, 아이들에게도 큰 관심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관여해 온다면 그건 보육원 밖의 요인을 의심해 봐야 한다. 그러자 내 [언어능력]이 멋대로 단서를 해부하며 진실을 조합해 냈다.
얄궂게도, 가장 최악의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정설로 굳어지고 있었다.
“……놈들은 보육원을 통째로 인질로 삼은 거군요.”
그것은
“아마도 현지 선생님한테 뭔가를 강요하기 위해.”
실로 참혹한 진실이었다.
* * *
-내가 이번에 입양 안 가면 현지 언니가 힘들대.
지희는 그렇게 표현했지만, 그건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다.
요컨대 인과 관계가 거꾸로다. 현지 선생님을 궁지에 몰기 위해 지희를 입양하려 든다는 게 진실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역시 그것은 본인에게 확인할 수밖에 없겠지.
원장실을 나오니, 지희와 지윤이 손을 나란히 잡고 다가왔다. 준이 사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열아, 얘기는 잘 마쳤어?”
“응? 응. 나 기다린 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주변에 있다가, 어, 그러니까 여기 길 잘 모를 테니까, 내가 안내하려면 기다려야…… 으아아, 내가 뭐라는 거야…….”
“지희의 한 줄 요약. 한 번 들이대 보려고 얼쩡대는 중이었다.”
“얘! 넌 진짜 못 하는 말이……! 어딜 가! 너 거기 안 서?!”
“끼악!”
준은 홍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지희를 맹렬히 추격했다. 지희는 꺅꺅 도명가면서도, 중간중간 혀를 놀리며 얄밉게 딜을 꽂았다.
“좋은데 좋다고 왜 말을 못 하니!”
하하. 개판이네.
그러나 체급 차는 극복되지 못했고, 결국 지희는 붙잡혀서 건방짐의 응보를 감내해야만 했다.
관자놀이 어택이라니.
다른 건 몰라도 저것만큼은 준의 손맛이 제대로 먹어 줬지.
동병상련인지 뭔지, 컁컁대는 게 뭔가 가련해서 이쯤해서 지희를 구해 내기로 했다.
“가자. 나 안내해 준다며.”
“……응? 그럴까? 나, 나여도 괜찮겠어?”
“보육원 안내하는 데 자격증이라도 따올 일 있냐. 별로 넓지도 않던데.”
“그래! 알겠어!”
신선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오는 준이라니.
전생의 그녀의 인상은 만성 두통과의 사투로 늘 삭막했다. 아프지 않을 때는 아플 때를 대비하는 듯 무뚝뚝했다. 웃음은 어차피 분실될 것이므로 되도록 지참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이렇게 웃는구나.
저렇게 예쁜 것을 언젠가부터 그만두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잠시 응시해 버렸다.
“왜 그렇게 봐? 뭐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때 복도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다급히 들어왔다. 목소리와 실루엣이 익숙했다.
“지희! 지희 찾았다며!”
“앗! 현지 언니이!”
현지 쌤은 상기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김이 하얗게 선명하다.
지희가 방방 뛰면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잠깐 온화해진 그녀의 표정은, 이내 뒤편의 나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냉각됐다.
그리고 이건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는데, 눈이 어쩐지 준과 나의 거리를 유심히 재는 듯한…….
지희는 그런 우리 셋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좁히며 의미불명의 미소를 띄웠다. 그러곤 대뜸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나 이런 거 본 적 있어. 테레비에서.”
“……지희야 제발.”
“사랑과 전쟁.”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