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51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1
* * *
본의 아니게 기묘해진 기류를 해소하고 싶었지만, 그 기회는 바로 주어지지 않았다.
현지 쌤은 아주 잠깐의 시선만을 내게 할애한 뒤, 바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의 언어를 읊어 냈다.
“곧 있으면 밥시간이네. 준비하러 가야겠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되밟아서 사라졌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듯 신속한 퇴장이었다. 그녀가 밟았던 자리에 찬바람이 들이쳤다 냉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날씨 어쩌구 하는 안부인사, 열심히 준비해 둔 변명, 묻고 싶었던 질문들은, 태어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사산됐다.
그것을 지희는 이렇게 표현했다.
“도망갔다!”
“뭐라는 거야. 근데 준비라는 건 무슨 말이냐?”
“현지 언니는 올 때마다 식당 엄마들 도와드리거든. 방금까진 지희 찾아다녔지만, 안전한 걸 확인했으니 할 일하러 간다는 거지.”
대답은 지윤 쪽에서 나왔다.
아니, 원래도 행동원리가 간결 심플 효율인 건 알았다만 오늘은 좀 극단적이잖아. 어쨌든 다음 행선지가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그럼 식당으로 가자.”
“식당?”
“이왕 온 거 나도 일 좀 거들지 뭐. 쌤이 일하시는데 한가하게 있기 좀 그러네.”
핑계는 그랬지만 속내는 역시 후다닥 사라진 쌤이 신경 쓰여서였다.
그러자 지희가 어딘지 푸근한 미소로 날 올려다보더니, 팔을 쭉 뻗어 내 어깨를 토닥이는 것이었다.
“힘내게 소년. 원래 사랑이 쉽지가 않은 거야.”
“뭘 힘내라는 거냐. 너도 같이 가서 돕는 거야. 한 번도 안 가 봤지?”
“으앙? 지, 지희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요.”
내빼려는 소녀를 옆구리에 낀 채로, 지윤의 안내를 받아 주방에 입장.
들어가자마자, 환복을 하고 나오는 현지 쌤과 공교롭게 딱 마주쳤다. 그녀는 예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릴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도와주러 온 거야?”
“예, 그래도 되죠?”
“안 될 건 없지. 잠깐만.”
그녀가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쾌한 체구의 남자가 머리를 숙여가며 문을 넘어왔다.
털과 인상과 체격만 봐선 인간보다 불곰에 더 가까운 그는 이곳의 주방장이었다.
“오, 마침 일손 필요했는데 잘 됐다. 근데 지희도 도우러 온 거냐? 맨날 뺀질대더니 웬일이래.”
“납치당했어…… 오빠가 날 배신했어어…….”
“요새 몇 없는 참된 의적이구만. 잘 납치해서 사람 만들어서 돌려보내 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뭐래 꼬맹이가.
어쨌든 우리에겐 감자 깎기와 양파 껍질 벗기기 특명이 내려졌다.
지희는 한가득인 양파 앞에서 눈물을 줄줄 빼다 반쯤 자기부정을 하기 시작했다.
“시러. 다 시러어어. 나 입양 갈 거야…… 가 버릴 거라구우…… 끄힝. 끄히잉.”
“엄살은. 누가 보면 아동착취라도 하는 줄 알겠네. 근데 한열아, 너 칼 되게 잘 쓴다.”
“칼을 잘 쓴다기보다는…….”
[민감성 손가락]이 감자의 굴곡과, 칼날로부터 전해져오는 마찰력을 민감하게 감지하면 [손재주]가 자동으로 반응하여 베어 낸다.
그 결과, 큼직한 식칼이 지날 때마다 투명한 수준의 껍질이 줄줄이 밀려나왔다.
하다 보니 나도 좀 신기했다. 이게 되네.
“그러게. 잘 쓰네.”
“푸훗. 뭐야. 자기가 잘 하는지도 몰랐어? 너 의외로 맹하구나?”
“뭐래. 너보단 낫지. 넌 자기가 뭘 못하는지를 모르잖아. 맨날 까먹고.”
“응?”
“못하는데 굳이 시도하고, 실패하면 다시는 안 하겠다고 선언하고. 그래 놓고 한 달 뒤에 보면 똑같은 걸 반복하고 있었잖아.”
특히 베이킹 분야가 그랬지.
그녀는 밀가루를 구워서 벽돌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그 희생양은 언제나 나였다. 매번 치명적으로 실패하는데 그 사실 자체를 까먹어서 곤란했지.
오븐과 위장의 내구성이 절절하게 시험받던 그 시절…….
“……그걸 네가 어떻게 다 알아?”
……은 전생이었지. 감자에만 초절 집중을 쏟았더니 잠깐 실언을 해 버렸다. 난 태연하게 대처했다.
“지희가 다 불었어.”
“……저 녀석 가만두지 않을 테야. 으으.”
지희의 관자놀이를 제물로 바쳤을 무렵 감자 바구니도 바닥을 보였다.
난 잽싸게 일어나 새로운 퀘스트를 수임하러 갔다. 현지 쌤 옆으로 가고 싶다는 기척을 팍팍 내비치니, 불곰 주방장이 눈빛으로 남자의 유대감을 표하며 내 청을 들어 주었다.
반죽 코너에 있는 현지 쌤 옆으로 슬쩍 이동. 그리고-.
“쌤, 저기…….”
“음, 잠깐만.”
한마디도 못 했는데, 그녀는 쌩하니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았다.
슬쩍 보니 이번엔 파를 다듬고 계셨다. 여러 해 일한 가닥이 있으니, 그때그때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시는 모양…… 일 리가 있나.
그 증거로, 전력을 다해 반죽을 끝장내고 옆으로 슬쩍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이게 다른 의미일 리 없다.
현지 쌤은 날 피하고 있었다.
‘뭐야. 뭔데. 왜 피하는데.’
입을 삐죽하고 투덜거려 봐야 나아질 건 없었다.
어쨌든 그 덕인지 탓인지, 난 준과 꽤 오랜 시간 붙어 있게 되었다.
좀 기묘한 기분이다. 안도감과 죄책감은 아무래도 친한 감정들은 아니지. 그런데 그녀는 내게 두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되고 나서 나는 후회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애매했던 관계였던 만큼 끝이 남긴 잔향도 애매했다. 뭔가가 떨어져나갔는데, 그래서 텅 빈 공간은 실감되는데,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살아 돌아온 그녀를 본 순간, 안도감이 내 감정 위에 덮인 먼지들을 털어 없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나는 이제 뿌옇게나마 알 수 있었다.
“한열이 너 기타도 칠 줄 알아?”
움찔, 동요한 것을 그녀가 눈치챘을까.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냐?”
“손가락.”
“음?”
“손가락에 굳은살이 그런 식으로 맺히는 건 기타리스트밖에 없잖아. 그것도 왼손만.”
“아.”
그녀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부럽다. 난 손이 작아서 피아노든 기타든 다 젬병이거든. 배울 때마다 맨날 좌절만 해. 그러고도 또 못 잊어서 도전하고.”
“그 건망증이 거기서도 발휘되는구나.”
“건망증 아니거든. 그냥 포기를 모르는 거야.”
“그렇다고 해둘게.”
“그렇다고 해 두는 게 아니라 그런 거라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은근히 고집 있고, 말꼬리도 잘 잡고, 불퉁거릴 때마다 입을 씰룩이는 버릇은 과거부터 그랬었구나.
“그냥 리코더를 배우지 그러냐. 그건 손 작아도 할 수 있는데.”
“관악기는 싫어. 난 노래 부르면서 반주를 하고 싶은 거거든. 근데 입을 틀어막으면 본말전도잖아.”
“……그런 거냐.”
“그런 거지.”
“노래 잘 부르나보네.”
재잘재잘 잘도 말하더니 이번에는 머뭇거리듯 답이 느렸다. 뭔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잘 하진 않고. 잘 하고 싶은 거야. 이래 봬도 꿈이 가수거든. 에, 엣헴.”
“뭐야 그 어색한 헛기침은.”
“아하하.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친구들은 내가 가수 하겠다면 그…… 웃거든. 그 얼굴로 뭔 가수냐고.”
중간의 휴지는 아마 ‘비웃거든’에서 ‘비’를 지우느라 생겼으리라. 하지만 난 비웃지도, 웃지도 않았다.
“난 안 웃어.”
“……그래?”
“남의 꿈을 비웃는 놈들은 자기 꿈이 없거나 하찮은 작자들뿐이야. 본인의 장래계획이 밋밋하니까 남을 낮잡아보는 거지. 부러운데 인정하기 싫으니까.”
“…….”
“당당하게 꿈을 꿔. 적어도 나만은 응원해 줄 테니까.”
이상하게 조용해서 슬쩍 보니,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냄비 젓던 국자를 꼼지락 만지고만 있었다.
……어라, 나 방금 엄청 작업 거는 말투 아니었나? 이게 아닌데?
어색함 방지 차원에서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 학교 축제하는데 시간 있으면 와. 나 거기서 공연하거든. 기타가 아니라 키보드를 치지만, 어쨌든. 동기부여 정도는 될 거야.”
“지, 진짜?”
“싫으면 말고.”
“가, 갈래! 궁금해! 꼭 갈게!”
어, 생각해 보니 이것도 작업멘트인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 * *
식사시간에도 현지 쌤은 편식 방지와 식욕 촉진을 목적으로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이람아, 당근만 쏙 골라내면 안 되지?”
“……후후. 내가 당근을 골라낸 것이 아니라 당근이 나를 거부한 것이다. 이 몸이 편식 따윌 할 것 같으냐?”
“당근 먹으면 뽀뽀해 줄게.”
“냠. 먹었어.”
그 순간 나도 편식을 하고픈 충동이 치솟았다.
그리고 저 자식 방금 웃었어! 어린애의 웃음이 아니었다고! 저건 순진한 척 여탕을 따라 들어가는 귀축의 표정이다!
장담컨대 포상을 바라고 일부러 편식하는 게 틀림없다. 왜냐면 나라도 그럴 테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쌤은 식사 내내 바빴고, 내가 아무리 편식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므로 옆에 있는 지희를 이용하기로 했다.
“지희야, 당근만 좀 남겨봐.”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좀 시키는 대로 해 봐. 내 평생의 소원이다. 하겐다즈를 봐서라도. 응?”
그러나 지희의 반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냥 식판이 깔끔하게 비워졌을 뿐. 이 자식 받아 온지 1분은 됐나? 먹은 게 아니라 그냥 마신 거 아냐?
“후후, 이미 당근은 죽어 있다.”
“근엄한 표정 짓지 마, 이 자식아.”
아무튼 식사시간에도 현지 쌤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를 오가며 먹이고 입가를 닦는 익숙한 모습마저도 날 피하려는 방책이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만큼 답답했다는 말이다.
“…….”
식사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은 몇 무리로 옹기종기 모여 놀았다.
공을 차거나 책을 읽었고, 인형을 두고 역할놀이를 하는가 하면 조각을 엮어 성을 쌓았다.
요컨대, 아이들이 아이들의 놀이를 했다.
앵벌이 모험담을 늘어놓거나 남의 성과를 가로채다 주먹이 오가지도 않았다. 일일 정산을 하다 빈 돈이 생겨 갑분싸가 될 일도 없었다.
저 흔하고 평화로운 광경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대가를 지불해 간신히 유지되는 것이었다. 이 평화에 지분이 있는 그녀는 당연하게도 그 안에서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녀는 알까.
사실은 이 모든 평화가 그녀를 잡기 위한 덫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심정은 과연 어떨 것인가.
“현지 누나 나 졸려어.”
“씻고 자야지. 자, 욕실까지 데려다 줄게.”
“안아 줘어.”
“그래그래, 읏차. 익한이는 밥 좀 더 먹어야겠다.”
밤이었다.
만삭의 달이 출산을 개시하여 느리게 여위어지는 어느 초겨울의 하늘. 빛이 하나둘 사라진 자리에 잔잔한 숨소리가 머물렀다. 스산한 바람도 꿈의 경계를 넘어오진 못할 것이었다.
난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선생님에게 일말의 핑계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보육원 앞뜰 벤치에 앉아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누군가 말없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현지 선생님이었다.
“……이제 저 피하는 건 그만뒀어요?”
“응, 피해지지 않을 거 같아서.”
피했다는 걸 숨기지도 않았다. 왠지 욱해서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왜 피하는데요? 나는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될 만큼 다 큰 아이라서?”
“오해야.”
“뭐가요?”
“난 너희를 돌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걸. 그 반대였지. 그 어떤 순간에서도 아이들이 날 지탱해 줬어. 난 그저 내가 필요하니까 여기 있는 거야.”
그때 멀리서, 이슬에 젖은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준의 노래였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아마도 자장가일 노래 위에, 현지 쌤이 읊조리듯 말을 얹었다.
“난 아마 네게 보답해 줄 게 없을 거야, 한열아.”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그러니까, 음, 네 옆은 지윤이 같은 아이가 어울릴 거라고.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전생의 우리 둘의 결말을 안다면 더욱이나.
그녀가 그 뒤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대뜸 반박하고 나섰을 것이었다.
“난 이기적이야. 이제 이 보육원이 날 필요로 하지 않는데, 오히려 해를 끼칠 뿐인데도, 내 욕심 때문에 계속 붙어 있었어. 내게는 이곳이 필요했으니까.”
“……예?”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날 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짙은 피로가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느림은 아마도 그녀의 미련 때문일 것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한열이는 착하니까, 날 도와주러 여기까지 왔겠지. 전후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 같은 사람 옆에는 서지 않기를 바라. 나는, 그러니까, 늪 같은 거야. 곁에 있는 사람을 빨아들여 같이 가라앉는. 너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해. 그러니까…….”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네요.”
난 곧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지치고 다친 눈길을 내 단단한 눈길에 얽어 일으키려 했다. 아직은 끄떡도 않지만, 괜찮다. 나도 끈기라면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체육관까지 찾아오셨을 때, 죄송했지만 그만큼 기뻤어요. 기쁜 만큼 고마웠구요.”
난 말했다.
그녀에게 위로받았던 날들.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기대었던 시간. 조건 없이 믿어 주는 시선에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당신이 없었다면 몇 번이나 고꾸라졌을지.
“그러니까 절 배은망덕한 놈으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받은 만큼 돌려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신을 지탱할 수 있게 내게도 곁을 내주세요.”
“……난.”
이슬에 미끄러진 손끝이 얼결에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나도 그녀도 흠칫했지만, 누구도 손을 빼어 도망치지 않았다. 난 그녀의 온기 위에 내 온기를 조심스럽게 덮었다.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경산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저편에 노래가 있었고, 벤치 위는 그녀와 나의 온기만으로 호젓했다. 비는 언젠가 개이기 위해 쏟아졌다. 희뿌연 빛. 젖은 모래의 냄새. 세상은 아스라한 안개로 가득했지.
그리고 그 고립된 시간 속에서, 나는 감히 그녀를 사랑하기로 했다.
“나는…….”
그녀는 대답을 어딘가에 두고 온 듯 방황했다.
날 보던 눈이 밑으로 내려앉고, 그녀의 손등은 점점 습기와 함께 온기를 더해 갔다. 떨리는 목소리가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문장을 써내기 직전.
저편의 노래도 함께 끝났다.
그 순간 우리 둘 다 긴 잠에서 깬 듯 현실감을 되찾았다.
멀리 도로의 소음이 들려오고 찬바람이 깃을 쓰러뜨리며 밀려왔다. 그녀는 내 손바닥에서 손을 빼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떨리던 살갗의 감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마워.”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무엇의 대답도 아니었다.
내게 남은 것은 손바닥과 귓가에 잔류한 여운뿐이었다. 그러나 각기 온기와 노랫말인 그것들은 내게 의지를 북돋기에 차고도 넘쳤다.
‘Over The Rainbow.’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로 분한 주디 갈란드가 부른 노래. 준은 집에선 꼭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도로시는 무지개 너머의 환상향을 희구하고, 결국 그 피안에서 보물을 발견해 돌아온다.
그러나 현실의 주디 갈란드는 평생을 신경쇠약, 약물남용, 자존감 부족으로 허덕이다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게 두진 않겠다.’
상처가 곪아 들어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난 주먹을 거세게 감아쥐며 층층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