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52화 (152/164)

<재능이 자꾸 늘어 152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2

* * *

-이제 입국했어요! 잠깐 쉬는 시간에 전화하는 중!

“오, 이젠 진짜 자연스러운데요. 한국말.”

-그쳐어. 나 공부 완전 많이 했음. 으히힣.

목소리만 들어도 순둥순둥한 표정이 4K로 연상됐다.

그나저나 고작 몇 달 만에 한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마스터라니. 역시 샤오 가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단 말이지.

아무튼 그녀에게 음슴체와 급식체를 가르친 장본인으로서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오메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이번에는 꼭 봐요. 저번에는 냄새만 맡아서 아쉬웠었단 말이에요.

“그러게요.”

샤오메이는 졸도 사건 이후 한 번 더 한반도를 밟았었다.

물론 그때는 위장 인턴이 아니라 젠린의 영애로서 수행비서들을 으리으리하게 거느리고 있었지.

그때도 잠깐 보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을 내세워 노가리나 까고 있기엔 분위기가 참 엄했지.

비서들이 또 나이가 지긋해서, 그야말로 딸바보 장인어른 7명에 둘러싸여서 눈빛으로 지져지는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이젠 서로 입장 차가 생긴 것이었다.

그녀는 중국 굴지의 그룹 젠린의 유력 후계자였고, 드러난 바로만 따지면 나는 아직 내세울 게 생긴 거밖에 없는 고아일 뿐이었다.

“그때는 무서운 아재들 덕에 제대로 얘기도 못했죠. 이번에도 그분들 또 와요?”

-……공교롭게도 그러네요. 한 번 쓰러진 전력이 있어서 아빠가 그건 타협해 주질 않아요. 아주 귀찮다니까요.

“……하하. 그럼 저는 안면을 단련하고 가겠습니다. 이번엔 눈빛에 안 뚫리게.”

-후훗. 보기에만 그래요. 다 착한 아저씨들이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당신이 아가씨니까 당신 앞에서는 착하겠죠. 날 보는 눈빛들은 분명 대륙의 인육 시장을 체험시켜 주겠다는 뜻이었단 말입니다.

아무튼.

“이번에 오면 입양할 아이도 데리고 돌아가는 건가요?”

-그렇게 되겠죠. 근데 생각보다 선별 과정이 까다로울 거 같아서…… 잘 모르겠네요. 시간이 걸릴 수도.

“하기야 재벌가 자제가 될 사람을 고르는 건데 뚝딱 하고 끝나진 않겠죠.”

-그래서 불만이에요 불만. 저는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마음 터놓을 수 있는 형제가 필요했을 뿐인데…… 제 맘대로는 안 되네요.

샤오메이의 요청으로 착수한 입양 사업이었지만 그녀의 입맛대로 될 수만은 없었다.

젠린의 말예로서의 품격, 추천자와의 사업 관계까지 고려되면서, 정작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녀로선 불만이겠지.

그러나-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네에?

“후보 중에 메이 마음에 딱 맞을 애가 한 명 있거든요. 장담해도 좋아요.”

-그래요? 한열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기대해 봐야겠네요!

“네, 당신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거예요. 정말로.”

비단 전생의 기억이 없었어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샤오메이는 윤하를 분명 좋아할 것이고, 윤하도 그녀 옆에 설 자격이 충분했다. 둘이 자매로서 나란히 설 모습을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다음에 만날 때는 한열이 기타 연주하는 것도 듣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찍어서 보내 달랬는데도 계속 안 보내 주고!

“……아니, 아직은 좀 부끄러워서요.”

-이번엔 못 뺄 거예요. 내가 집에서 내 최애 기타까지 들고 왔거든요? 무려 커트 코베인이 손수 개조한 펜더 재규어! 이거 안 만져보면 손해야 손해. 평생 후회할 걸요?

“참나, 약장수 하셔도 되겠네.”

-안 그래도 젠린에는 제약 파트도 있거든요.

불시의 일격처럼 웃음이 터졌고, 그녀도 제 말에 제가 걸려 넘어져 깔깔 웃어 댔다.

우린 서로에게 웃음을 전염시키며 꽤 오랜 시간을 흘려보냈다.

7인의 비서에게 걸려서 강제로 통화가 중단당할 때까지.

* * *

“What puts a folded flag inside his mother`s hand? belief can, belief can-!”

나나나- 반복되는 코러스 전면에, 메인 보컬의 그르렁대는 열창이 뛰쳐나온다.

보컬이 곡을 절정에 올려놓고 빠졌지만, 전 세션들이 무섭게 달려들어 고조감을 더 끝까지 밀어붙인다.

리듬을 때려 박는 세컨드 기타. 질주하는 듯한 리드 기타. 엇박의 긴장감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곡을 내몰고, 마침내.

좡좡좡-!

모든 악기들이 합심해서 소리들을 한 곳에 모아, 비트를 잡아챘다.

잔향만 남긴 채 침묵하는 악기들.

“와아! 멋지다!”

곡이 끝나자 강당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스태프들이 박수를 보내 왔다.

좋아. 내 [음감]으로 튜닝된 대강당 리허설은 성공적으로 관객들의 귀를 매혹시켰다.

나는 콘솔로 이퀄라이저를 조정하면서 소리를 최종적으로 다듬었다.

물론 제 아무리 톤을 잘 잡아 봐야 소스가 엉망이면 다 꽝이다만, 들어본 바론 연주의 완성도도 제법이었다.

“오케이! 잘했어!”

수림 선배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1학년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과연 그랬다.

보컬 이환의 혀는 여전히 기름덩어리였으나 간신히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 수준으로 담백해졌다.

기타는 이제야 그루브라는 걸 이해하게 됐으며, 드럼은 탁월하진 않아도 박자를 저는 일은 없게 됐다. 참으로 상전벽해라 하겠다.

‘음음. 눈물이 날 것 같다.’

눈물이 날 만큼 좋아서가 아니다.

저것들을 들어 줄 만할 수준까지 만드는 데 들어간 내 피땀이 생각나서였다.

그 숱한 삽질과 헛발질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때? 사운드 잘 뽑혔어?”

수림 선배가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네, 간신히 들어 줄 수준은 되네요.”

“넌 기준치가 너무 높아. 난 완전 좋던데?”

“제 귀를 만족시키려면 이 강당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돼요. 음향 설계가 엉망이야 아주.”

“쉬엄쉬엄 하자고. 쉬엄쉬엄. 아, 그리고 우리 리허설은 건너뛰기로 했어.”

“왜요. 오늘도 말자 씨가 바쁘시대요?”

그날의 통렬한 참패 이후로 말자 씨는 합주를 차일피일 미뤄 왔다.

편곡을 최종적으로 다듬고 한 번 더 협주를 하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사유야 다양했지만 진짜 이유는 그냥 볼 낯이 없어서겠지.

그 변명들이 다 진실이라면 말자 씨는 당장 신경 쇠약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옳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동안은 녹음본을 서로 교환해가며 연습을 해 왔다만…… 그래도 공연 3일 전의 리허설인데도 이런 식이면 문제가 있었다.

“그렇긴 한데. 사실 이번엔 재준이도 늦을 거 같아서, 그냥 그러자고 했어.”

“재준 선배는 요새 들어 점점 늦으시네요.”

“집안에서 어지간히 성화인가 봐. 뭐, 어차피 공연은 저녁에 하니까 괜찮겠지.”

그때 강당 한편에 있던 배윤하가 소리를 바락 질러 왔다.

“으아아앗! 이, 이한여어얼! 나 좀 도와줘엇!”

간판을 설치하는 건지 간판한테 설치당하는 건지 모를 모양새로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그냥 깔리기 직전이었다.

“……왜 하필 날 부르는 건데. 나 바빠 인마.”

“네가 제일 가깝잖아! 제발! 오늘부터 오빠라고 불러줄게!”

“그건 메리트가 하나도 없다만.”

뭐, 안 그래도 웃기게 생겼는데 거기에 쥐포 속성까지 추가할 순 없지.

한손으로 간판을 쓱 들어 자리에 척 올려 놓으니 그제야 숨을 헐떡인다.

“흐아, 죽을 뻔했다.”

“자, 이제 오빠라고 불러 봐라.”

“뭐야, 메리트 없다며.”

“메리트 없다고 했지 안 받는다곤 안 했다.”

“알았다 오빠야. 온 김에 이것도 도와줘 봐. 이거 다 도와주면 이젠 아빠라고 불러 줄게.”

“이러다 오늘 할아버지까지 찍겠는데.”

합주 일정이 취소되었으므로 잠깐 도와줄 여유 정도는 있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잘됐지.

난 지시에 따라 꽃 장식을 붙이면서 입을 열었다.

“합숙은 어떠냐. 할 만 해?”

선기무역에서 젠린에 추천할 고아들을 모아서 준비시키는 합숙이었다.

때 빼고 광내는 것은 물론, 중국어와 더불어 상류층의 예절까지 집중 속성 교육을 받는다 했다. 그녀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응. 뒤지게 힘들어.”

“……여자애가 말이 그게 뭐냐. 거기서 말투 교정은 안 시켜주데?”

“뭐 어때. 중국어로만 조신하면 됐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메이는 한국말 잘하는데 말이지.”

그러자 배윤하가 묘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맞네. 너 그쪽 영애랑 그렇고 그런 일들이 있었다며?”

“사람을 불륜남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면…….”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이지만, 무슨 뜻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서로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친하다면 왜 내가 나서서 입후보하지 않았느냐는 뜻이겠지.

나는 픽 웃었다.

“귀찮잖냐. 재벌 3세. 신경 써야 될 것도 많고. 난 그런 거 답답해서 못 해.”

“엄청 호기롭네. 방금 엄청 허세허세 했어.”

“그래. 알았으면 우린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출세하라고. 보육원은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재벌가의 일원이 된다면 단기간 내에 권력을 쌓을 수 있겠지.

되는 게 어렵지, 일단 되기만 하면 모든 일에 고속도로가 깔린다. ‘그분’에 대한 일말의 불안마저 말끔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단순히 귀찮고 번거롭단 이유만으로 이 자리를 고사한 건 아니었다.

‘넌 너무 오랫동안 짐을 이고 살았어.’

전생에 윤하가 어째서 연락을 딱 끊은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다.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헌신했지만, 끝끝내 경멸을 돌려받은 소녀를 생각해보라.

어느 순간 번 아웃이 찾아와 과거와 거리두기를 하고 싶어졌다 한들, 그걸 누가 비난하겠는가.

적어도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현생의 그녀도 든든한 그늘 밑에서 짐을 벗고 행복해졌으면 했다. 이번엔 마음의 부채도 없이.

“……바보. 넌 진짜 바보야.”

배윤하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같은 자리만 계속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선 감정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는 듯했다.

난 픽 웃으며 남은 꽃들을 전부 부착했다. 미적으로 군더더기가 많은 간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빠 소리 듣기 싫으니까 빨리 도망가야지.”

그녀를 뒤로 하고 돌아 나오는 길, 어쩐지 기둥 뒤편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손을 쑥 넣어 보았다. 그러니 멀쩡하게 생긴 놈이 끌려나오는 것이다.

“으, 으앗.”

“뭐 하냐? 전상진.”

“하, 하하하. 더워서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어.”

“이 초겨울에?”

“나, 나는 열이 많은 체질이라!”

이놈도 서투르기는 정말 선수급이라니까.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아쥐고 강당 바깥까지 끌고 나왔다.

전상진은 훔쳐듣다 걸린 게 무안했는지 얼굴만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듯도 했다. 난 픽 웃으며 놈의 어깨를 탁 쳤다.

“야, 고맙다.”

“응? 으응?”

“저 선머슴 데려가 줘서 고맙다고. 평생 혼자 썩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짝이 있긴 있네. 참 이런 부탁 미안하다만, 앞으로도 잘 좀 데리고 있어 줘라. 부탁할게.”

“……어.”

여전히 얼굴은 선홍빛이었지만 그 때깔의 질이 달라져 있었다.

동공 지진도 활발하다.

슬슬 조짐이 보일 때 바로 도망가야만 했다.

눈망울에 물기를 주렁주렁 매단다 싶더니, 대뜸 확 덤벼서 안겨오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무심코 카운터를 날려 버릴 뻔했다.

“하, 한열아아아….”

“야, 야야. 다가오지 마. 남자 새끼가 달라붙지 말라고!”

“으허어엉! 난 그것도 모르고! 못난 마음에 질투나 하고오……! 날 용서해 줘, 한열아……! 끄허어엉……!”

“아오. 이걸 패서 기절시킬 수도 없고.”

“으허어어엉…….”

전상진은 광광 울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뒷덜미를 잡아서 떼어내도 어떻게든 잘도 붙어 오는 무빙이 일품이었다. 이 거머리도 배워 갈 접착 기술 앞에서는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마워! 나 윤하 진짜로 아낄 테니까! 매, 맹세해도 좋아!”

“아니 맹세는 안 해도 되니까 떨어지라고.”

강당 뒤뜰에서 벌어진 눈물의 포옹은 꽤 많은 사람들에게 발각되었고, 망측한 소문으로 재가공되어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요컨대 ‘이 씨와 전 씨 중 어느 쪽이 공인가.’라는 주제로 논쟁이 불타올라 버린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소란은 하루 만에 사그라들었다.

다음 날엔 이딴 가십보다 훨씬 강력한 이슈가 대원고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 * *

“타시죠. 오늘은 꼭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

궁지에 다 몰았다고 생각한 걸까.

이현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벌써부터 승리감이 완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도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뚱하게 서 있기만 했다.

남자를 향하는 시선조차 그를 보고 있지 않다. 그녀는 과거의 풍경을 망막에 띄워 현실에 덧칠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그녀는 딴생각을 했다. 그날부터 좀체 지워지지 않는 생각을.

-당신을 지탱할 수 있게 내게도 곁을 내주세요.

이 모멸적이고 완전무결한 무시에 남자의 입가가 서서히 뒤틀렸다.

“앙탈도 정도껏 해야 귀여운 법입니다. 제가 아직 신사적으로 굴 때 순순히…….”

“아뇨. 갈 필요 없어요. 답은 여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음, 그게 편하시다면야.”

이현지가 고개를 숙였을 때, 남자는 끄덕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환희했다. 그보다 더 숙였을 때는 그간의 무례를 사과하는 것이려니 판단했다.

하나 몸은 그 이상으로 숙여졌으며, 땅에서 적절한 짱돌을 골라낸 뒤에 복구되어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현지가 돌을 위아래로 던졌다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친한 동생한테 아주 좋은 걸 배워서 왔거든요?”

“……뭐라고?”

“고자 샷이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

돌을 잡아챈 팔이 활처럼 뒤로 팽팽히 젖혀졌다.

* * *

[알림 : 이현지 보건교사는 파렴치하게도 학생과의 부적절한 교제를 …… 이유로 파직에 처하니, 교원 및 학생들은 품행을 정돈케 하는 반면교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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