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53화 (153/164)

<재능이 자꾸 늘어 153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3

* * *

[알림 : 이현지 보건교사는 파렴치하게도 학생과의 부적절한 교제를…… 이유로 파직에 처하니, 교원 및 학생들은 품행을 정돈케 하는 반면교사로서…….]

* * *

“……나는 정말로 몰라.”

“정말?”

“정말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

[눈치]로 판단컨대,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러나 나는 조폭들에게 썼던 심문법을 고윤숙에게 사용하고 싶어졌다.

해 봐서 아는데, 정말 몰랐던 것도 일주일 정도 쥐어 짜내다 보면 알아서 브레인스토밍까지 굴려 가며 떠올리게 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은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그녀를 동정해서가 아니라 내게 일주일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뭔가 단서라도 있을 거 아니야?! 이런 일이 갑자기 뚝 떨어진다고? 말이 돼?!”

고윤숙은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움찔댔지만, 말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그거 말 잘했네. 나한테도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교무 회의는커녕 소문 비슷한 것도 돌지 않았어. 이건 나한테도 뚝 떨어진 사실이라고.”

“어디서 어떻게 통보된 건데?”

“몰라.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달된 거면 이사회 선에서 얘기가 다 됐겠지. 교감 이상이나 교무부장 정도만 사전에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단 말이지.”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현지 쌤이 불미스러운 일로 퇴직당하는 건 전생에도 있던 일이지만, 시기로 따지면 한참 전에 벌어졌어야 할 일이었다.

근데 별일이 없었기에 내 회귀의 영향으로 미래가 바뀌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 뒤통수를 후려치듯 문구 하나 달라지지 않고 똑같은 공지가 게시판에 떡하니 박혔다.

당연히 어떤 악의가 개입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왜 시점에 차이가 났는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저런 명목인가.’

전생보다 그녀를 잘 이해하게 된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저건 다 개소리다.

전생처럼 최애 아이돌 열애설 보듯 현실 부정을 한 것도, 자뻑에 빠져 나 외에 다른 남자가 있을 리 없다고 단정 지은 것도 아니다.

다분히 연역적 추론의 결과다.

그녀의 철벽은 쉽게 사랑받는 미남미녀들의 흔한 도도함 따위가 아니다. 어릴 적 트라우마와 깊게 연루되어 있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쉽게 극복해 낼 리 없고, 만약 극복해 냈다면 어떤 식으로든 조짐이 있어야 했다.

“……교제한 학생이 누구인지는 공유됐나? 그에 관한 사실이 논의된 바 있어?”

“아니, 없어.”

“역시 개소리였군. 그저 적당한 구실 중에, 그녀에게 가장 모멸적으로 느껴질 법한 내용을 꾸며 냈을 뿐이었어.”

떠오르는 인과 관계는 하나뿐이었다.

천호 보육원에 수작을 걸었던 누군가가 이번엔 학교에 손을 뻗쳐 왔다고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점이 밀린 것도 설명이 된다.

‘이번 생에는 삼촌이 재기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재정적으로 다소 여유가 생겼으므로 수작질을 방어하는데 전생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갈등이 역치에 다다르는 데까지 유예가 생겼고, 그게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겠지.

난 안절부절못하는 고윤숙의 얼굴을 보며 더 이상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했다.

난 거친 숨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리는 소문 중에 특기할 사항이 있으면 바로 보고해 주세요. 사소한 것도 좋습니다. 유의미한 보고라면 약속한 자료를 바로 드리죠.”

“저, 정말?”

“예, 우리 거래를 끝맺을 찬스니까 분발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알았어! 좀 더 알아볼게!”

방금까지 쭈굴대던 고윤숙이 보상에 눈이 희번덕거리더니 교무실로 돌아갔다.

돌아오며 몇 번째인가의 연락을 다시 시도해 봤지만, 현지 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딱히 내 연락만 안 받는 게 아니라 핸드폰을 아예 꺼 둔 상태였다. 삼촌에게 물어봐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진심이 제대로 전해졌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쓰네.’

그날 밤, 그녀의 ‘고마워’는 역시나 ‘고맙지만 미안해.’라는 뜻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내게 기댈 생각은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혼자 해 볼 생각이겠지. 지금껏 그래 왔듯이.

어쨌든 잡생각을 제쳐 두고 정보 수집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알 만한 사람들, 그러니까 교감 이상의 선생들은 모두 부재중이었고, 떠돌아다니는 말들은 대개 근거 미상의 소설이거나 추잡한 음담패설뿐이었다.

더러운 말을 지껄이는 몇 놈의 이름을 데스노트에 적어 두고 추후 구울지 삶을지를 고민하고 있을 즈음,

윤정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바쁜 거 같네.”

“……나름대로요.”

“꽤 좋아했나 봐. 네가 그렇게 필사적인 건 처음 보네.”

“비꼴 거면 그냥 가시죠. 저 오늘은 일 못 도와 드립니다.”

그녀가 날 묘한 눈으로 쳐다보다 툭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널 찾으셔.”

“……예? 나를? 왜요?”

안 그래도 낯짝을 보고 싶었으므로 잘 된 일이다만, 굳이 이 타이밍에 날 부르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윤정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예의 모호한 태도로 내 의문을 비껴 냈다.

“모르지 나야. 이번 사건의 참고인으로 물을 게 있는 건지도.”

“그렇게 사태 파악에 열의가 있으신 분이었다면 학교에 계셔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랬다면 애초에 애먼 사람을 근거도 없이 날려 버리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러게. 하지만 말했듯이 나는 모르는 일이야. 질문은 직접 가서 하도록 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녀가 고갯짓을 하며 도로 한편을 가리켰다. 그곳엔 새까만 롤스로이스 한 대가 위엄 쩌는 자태로 정차해 있었다.

“데려다 줄게. 타렴.”

“…….”

롤스로이스는 역시 조용했고, 우리는 그 분위기에 적응하듯 말이 없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지만 제 편의 유리창에만 시선을 둔 채로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나야 머리가 복잡해서 그랬다지만, 그녀도 평소보다 더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차 안은 숨소리조차 불편하게 떠다녔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연 것은 생각 중에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이지, 이 분위기가 버거워서는 아니었다.

“……근데 우린 어디로 가는 겁니까?”

“ID빌딩. 우리 학교 재단 본부가 거기에 위치해 있어.”

“그건 또 금시초문이네요.”

금시초문이지만 의아하지는 않았다.

ID빌딩이라면 근방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고 나도 몇 차례 방문한 바 있다.

윤정희 집안이 오너로 있는 선기무역의 본사 역시 그 건물에 한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배윤하도 지금쯤 그 건물 어딘가에서 합숙 중일 것이었다.

‘역시 관련이 깊네. 두 집안은.’

짧은 순간, 사소하게 지나쳐 버린 감상이었다.

윤정희는 빌딩 지하 주차장에 나를 내려 주면서 본인도 같이 내렸다. 그러나 날 안내해 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그곳에서 날 일별했다.

의아해서 눈을 마주치니, 헤아리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시선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 의미를 읽어 내려 했으나, 그 즈음엔 강렬한 잔상만 남았을 뿐 알맹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한열아.”

“……예?”

“부디, 신중하게 선택하길 바라.”

“무슨 말이에요 그건 또. 같이 안 들어가세요?”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난 여기까지. 나도 지금부터 가야 할 곳이 있거든. 로비에 가면 안내할 사람이 있을 거야.”

“네에, 뭐. 알겠어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차를 타고 건물을 떠났다.

찰나지간 사라진 그녀의 기묘한 기색이 조금 신경 쓰였으나, 그야말로 조금일 뿐이었다. 눈앞의 과제에 집중하기만도 지금은 버거웠다.

복잡한 생각을 털어 내고 발을 옮기려 할 때.

핸드폰이 주머니 속에서 웅웅 울렸다.

[이정숙 정보팀장]

“예, 전화 받았습니다.”

-보고드릴 게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사장님. 좋은 소식과 더 좋은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으시겠어요?

“……당장 기분이 좋아지고 싶으니까, 더 좋은 소식을 먼저 듣죠.”

-지은이가 의식을 회복했어요. 검사까지 다 마치고 방금 나오는 길이에요.

“와,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정말로 나아졌어요.”

-감사는 제가 해야죠. 지은이가 무사한 건 다 사장님 덕택인 걸요.

안 그래도 구출되고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물론 문제가 다 해소된 건 아니겠지. 그녀와 그들 가족에겐 아픈 기억과 싸워 나갈 과제가 남았으므로.

그러나 어쨌든 살았지 않은가. 당장은 자축해도 좋을 것이다.

“별다른 이상은 없나요?”

-저도 밖에 있어서, 방금 전해 듣기만 한 일이라 잘은 모르겠어요. 간호사가 말하기로 다소 불안정한 기색은 있고, 예후도 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긍정적으로 봐도 좋을 거라고…….

평소의 가벼운 분위기 따윈 일절 없는, 순수한 감사와 압축된 환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 왔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지금까지 받은 걸로도 과분한걸요. 그래도 정 도와주고 싶다면 아들이 되어 주겠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쳇.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진지함이 1분은 유지됐나?

아무튼 개수작은 빠르게 진압됐고 그녀는 아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다음은 좋은 소식인데요,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건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어요.

“윤곽이 잡혔다 하시면…….”

-99퍼센트 정도 확신할 수 있는 심증은 파악됐습니다. 탁 꽂히는 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요. 어쨌든 사장님께는 이게 더 중요하실 듯해서요.

“……빠르네요.”

진심이었다.

유능할 거라 생각했으니 스카웃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신속하게 성과를 물어 올 줄은 나도 몰랐다. 좋은 의미에서 예상 밖이다.

저쪽의 목소리도 뭔가 우쭐한 것이 정보의 신뢰성도 꽤 높은 모양이었다.

-브리핑을 준비할까요? 아니면…….

“아뇨, 그런 번거로운 건 생략하죠. 지금 문서로 정리된 것이 있습니까? 아주 깔끔하진 않아도 좋습니다.”

-제가 쓰던 일지는 있습니다만, 보기에 좀 불편하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보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바로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그래요. 수고하셨습니다. 당분간은 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쉬고 계세요.”

핸드폰으로 메일을 열고 문서를 열었다.

문서 안의 자료는 정돈 없이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었고, 데이터를 잇는 논리는 몇 마디의 주석뿐이었으므로 나머지는 내가 재구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Rank A급 [언어능력]은 혼잡한 정보를 순식간에 논리화시켜 내 안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내가 50페이지짜리 문서에서 핵심을 찾아내 결론을 내기까지는 열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 열 걸음째에 나는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이게 무슨.”

심장이 죄어 왔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사고가 가닥가닥 끊어지고, 먼 곳의 산울림처럼 디테일이 뭉개졌다.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더 잘게 쪼개져 내 안쪽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기반이 붕괴되어 잿더미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내 두뇌는 이 판국에도 조각난 마음을 주워 기워 내는 성실함과 유능함을 발휘했다.

누덕누덕 완성된 그것은, 재료만 같을 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왜, 왜 몰랐던 거지?’

손이 떨린다. 흐트러진 호흡이 우두망찰한다. 단단히 포박된 심장이 몸부림친다. 식은땀이 일시에 분비됐다.

‘나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어. 단서는 충분했어. 그럼에도 몰랐다. 상상조차 못했어. 몰랐던 건…… 그 이유는…….’

감정과는 별개로 이성은 순순히 기능했다.

무참하게도 정확하게, 타협 없이 정밀한 완성도로, 나는 해답을 찾아냈다.

‘그걸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허공을 짜부라뜨릴 기세로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극한으로 격앙되어 있었기에, 하마터면 내 어깨를 건드린 김 대리의 턱을 날려 버릴 뻔했다.

“……괜찮으십니까?”

내 이상 현상을 눈치채고 접근한 김 대리가 걱정스런 표정을 보냈다. 그 덕분에, 난 광기의 바다에서 최소한의 이성을 건져낼 수 있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괜찮지 않습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병원을 예약…….”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 단호함에 김 대리는 근심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턴 직접 경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단지, 제가 뭘 하든, 절 막지 마세요. 절대로. 아시겠습니까?”

“……예.”

“좋아요.”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강조하니 그가 떨떠름하게나마 대답했다. 난 성마르게 대리석 타일을 짓밟으며 걸었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배윤하 어디냐.”

수화기 저편으로는 생활 소음들이 자글자글하게 전해져 왔다. 배윤하가 답했다.

-나? 나야 당연히 합숙소에 있지. 중국어 강의 중인데, 지금은 쉬는 시간이고. 갑자기 왜 그러는데? 목소리 쫙 깔고.

“몇 층? 몇 호?”

-어? 글쎄. 여기가 몇 층이더라. 야야, 여기 몇 호였지? 703호? 오케이 고맙. 어어, 703호라는데? 근데 왜 그러냐고. 이거 뭐 벌칙 게임 같은 거야?

“……그래. 알았다. 일단은 거기 있어. 누가 불러도 어디 가지 말고. 내가 갈 때까지 섣불리 움직이지 마. 알았지?”

-아니, 갑자기 대뜸 그렇게 말하면…… 뭐야, 너 지금 근처에 있어?

“배윤하.”

난 윽박지른다 싶을 만큼 말에 힘을 실었다.

“지금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중에 다 얘기해 줄 테니까 지금은 내 말대로 해. 알았어?”

-……어.

“대답해 줘. 부탁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콧김 좀 어떻게 해 줄래? 지금 내 귀가 엄청 부담스럽거든?

“……그래. 고맙다. 이따 보자.”

-야, 잠ㄲ…….

난 통화를 끊고 로비 안쪽으로 거칠게 나아갔다.

로비엔 방문객을 통제하는 게이트가 주르륵 위치했고, 그 뒤쪽으로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은 수의 경비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두에 있던 한 중년인이 날 안경 너머로 쓱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한열?”

“그렇다만.”

“……새끼가, 어른한테 반말을 찍찍…….”

“나이로 대우받고 싶으면 양로원이나 가시고. 집 지키는 개면 개답게 주인이 시킨 대로 하셔야지. 뭘 쓸데없이 짖고만 있어? 안내 안 해?”

“…….”

중년인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내가 이 게이트를 물리적으로 부수지 않는 것만으로 너희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중년인이 힘겹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도발하는 재주가 제법이구나. 여기서 마찰이 생기는 게 네가 바라는 바겠지? 그래서…….”

“아닌데. 아주 순수하게 네가 띠꺼워서 한 말인데.”

“……후우.”

이마의 핏줄이 한층 더 통통해졌지만, 머릿속에 자동매크로로 참을 인자를 생성하는지 제법 잘 참아 낸다. 난 픽 웃으며 말했다.

“잔말 말고 안내나 해.”

“건방진 놈. 언제까지 뻗댈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나는 게이트를 통과했지만, 경비들은 LS경호팀의 진입은 차단하려 들었다. 김 대리가 눈을 희뜩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비키시지. 내겐 의뢰인의 신변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거야 당신네들 사정이고. 여긴 사유지다. 손님이 아니면 다 무단 침입자고. 내일 아침에 LS의 이름으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기 전에…….”

“해보자는 건가?”

“김 대리님, 괜찮습니다.”

내 쪽에서 김 대리를 만류했다.

“……경호에 공백이 생기도록 둘 순 없습니다. 한열 씨.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나시죠. 쓸데없이 실랑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 잘 아시잖습니까. 잘못돼도 제 한 몸 뺄 실력은 충분히 됩니다.”

“……음.”

김 대리는 그제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여기 대기하고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비상 버튼으로 호출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나오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차량도 준비해 주시겠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난 경비들의 안내인지 호송인지 모를 인도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 * *

그 즈음, 장건철 회장은 이상용 팀장으로부터 보고 문건을 받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열 군에 관한 보고를 들은 바가…… 그다지 없군?”

“전임 팀장이 태만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그에 관한 보고도 같이 첨부해 두었습니다.”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장 회장은 내막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의 우묵한 눈 안쪽이 사납게 빛났다.

“……그렇군. 허허, 나도 다 죽었구먼. 하나둘 내려놨다고 아주 날 허수아비로 생각했단 말이야?”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

“아니. 괜한 말은 됐네. 그리고 팀장의 독단이 아니라 부회장의 묵인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일 테니. 뭐야, 내가 브루나이로 떠나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보고를 거들떠보는 장 회장의 얼굴이 어처구니없게 일그러졌다.

그 안에는 전임 보안팀장인 황혁수의 패악과 이한열이 입은 피해가, 무척이나 이한열 편의적인 관점에서 쓰여 있었다.

‘물론 회장님이 해외에 계실 때 일이 벌어진 건 이한열이 의도한 거지만 말이야.’

그래야 황혁수가 맘 놓고 헛짓거리를 꾸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런 일련의 맥락은 보고서에 단 한 줄도, 암시할 만한 단서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장 회장은 약간의 불쾌감과 상당량의 호기심을 품고 보고서를 주르륵 넘겼다.

보고서 뒤편의 핵심은 이한열이 이 팀장에게 특별히 주문해 둔 것으로, 주현 보육원이 조폭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자연히 보육원이 장 회장의 보호하에 놓이도록 유도하려는 노림수가 담겨 있었다.

역시나 보고서를 읽어 갈수록 장 회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계속 어두워졌다.

아니, 급기야는 심각해지다 경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라?’

이 팀장은 의아했다.

저렇게까지 경악할 이유까진 없었다. 어쨌든 동부파는 몰락했으므로 당장의 위협은 적었고, 장 회장으로서는 한열에게 베풀 일이 생겼으니 외려 기꺼워야 마땅했다.

대체 어떤 구절에 저렇게까지 놀랄 구석이 있던 걸까?

“허어. 허어어. 이런, 우리 작가님이 아주 악질적인 것들과 엮이셨군. 이거 큰일인데.”

“……회장님, 외람되지만 보고서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까?”

“아니, 없었지. 적지 않은 걸 보니 자네는 몰랐나보군 그래. 초대 팀장이 그렇게 갔으니 인계받지 못했어도 이상할 건 없지. 모두가 잊고 싶은 기억이었으니…….”

“혹시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까?”

장 회장이 두툼한 보고서를 툭 내려놓으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자들은, 구시대의 망령일세.”

“망령?”

“자네, 혹시 부산의 형제복지원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예, 한때 시끌벅적 했었지요.”

부산에 있던 부랑아 수용 시설로, 그 안에서 벌어진 잔학무도한 인권 유린은 그야말로 군부 정권의 어두운 참상이다.

이 비인외도의 사건은 시대의 비극으로 현대사에 아로새겨졌고, 이 팀장도 과거의 아픔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 회장은 거기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형제복지원. 그게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면 어떤가. 사실 전국에 그와 같은 복지원들이 고아원, 교육원의 이름으로 수없이 퍼져 있었다면 어떤가. 하지만 정권 차원의 은폐 조작이 있어, 결국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장 회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 팀장의 표정도 비슷하게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형제복지원의 주범으로 잡힌 그 작자는 사실 머리가 아니라 꼬리일 뿐이었다면 어떤가. 그리고 진짜 주범, 그 시커먼 이무기가 시대의 변화에도 살아남아…… 한 학교에 또아리를 틀었다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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