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54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4
상상만으로 끔찍해졌고, 그랬기에 이상용 팀장은 반사적으로 반론을 모색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회장님,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고작 학교에 숨은 뱀 한 마리를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LS다.
이산중공업 시절부터 지금까지, 적산 불하 없이도 자수성가한 한국 사회의 드문 성공 신화이자, 수많은 별이 뜨고 진 사회적 격동기에도 동요 없이 굳건했던 우리다.
그깟 구시대의 망령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중간에 말을 멈춘 건, 그걸 장 회장이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자가 단지 거리 청소를 잘해서 독재자의 신임을 받았겠는가? 아니야. 부랑아 수용?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어. 그자는 정권에 반기를 든 자, 사상이 불순한 자, 기타 등등 거슬리는 인물들을 잡아다가 ‘개조’하는 일을 맡았었네.”
“……그것은.”
“그래, 그곳은 인간 사육장이었어. 반항아를 길들이고, 자질이 있으면 뛰어난 병기로 키웠지. 그리고 중앙정보부조차 정치 세력화 되어 믿기 힘들어지자, 독재자는 그 병기를 사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네. 그자는 독재자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거대한 제국을 일구었지.”
이상용 팀장은 현실감이 무뎌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일이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 정권은 몰락했습니다. 그자도 받쳐 주는 권력이 없으면 한낱 필부일 뿐입니다. 그걸 본인도 아니까 숨어든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뱀은 영리했네. 정권의 하수인이지만, 그 일부이진 않은, 그 미묘한 위치 덕에 민주화의 이양기에도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어. 무엇보다, 그자에겐 자신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잘 훈련된 인적자원이 있었지.”
“……권력 관계가 역전되었겠군요.”
“그래.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민주화 시대가 되었어도, 저 구시대의 망령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버젓이 정치를 하고 있지. 지금 정권만 봐도 그렇고.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들을 뒤에서 받쳐 준 누군가가 있었다…… 그랬던 거군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보안팀장답게 이상용은 그 격동기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 낼 수 있었다.
“정적을 제거하고, 증거를 조작해 주고, 무장공비 흉내도 내 줄 수 있지. 그런 협조에 힘입어 살아남은 망령들이, 이젠 그대로 그자의 인맥이 되었네. 그 권력이 얼마나 될지 짐작이 되겠는가?”
“…….”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야말로 현 여당이 통째로 그자의 우호 세력이란 뜻이었다.
“근데 왜 하필 학교입니까?”
“본인이 가장 잘 하는 일이니까. 먹이고, 키우고, 가르치는 일. 물론 이 학교는 자신을 숨기기 위한 외피일 뿐 본질이 아니야. 취미 생활 정도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군.”
“대원이 역사가 깊지도 않은데 왜 갑자기 명문이 됐는지 알겠군요.”
“권력의 핏줄이 몰려들면 자연히 명문 이름값을 얻는 법이지. 그 반대여야 맞는 건데 말이야.”
그때였다.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이 비서실로부터 전해지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절도 있게 들려왔다.
장 회장의 눈가가 잘게 일그러졌다.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젠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는구나. 진욱아.”
“괜찮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장진욱은 언제나와 같은 단정한 태도로 장건철에게 목례했다. 그러나 무심한 표정과 극도로 절제된 몸놀림 탓에 그건 인사라기보단 제식 동작으로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그래.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도 있었으니 잘 됐다. 너…….”
“이미 보셨으니 말을 아낄 수 있겠군요.”
장진욱은 책상 위의 보고 문건을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아이, 더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부회장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역시 네가 손을 썼구나. 내가 모르도록, 내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어.”
“예. 그랬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장건철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내리쳤다. 서류들이 파르르 떨며 주인의 분노를 받아 냈다.
“벌써부터 주인 흉내인 게냐! 네가 감히 나를 속여!”
“속인 게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장난은 그만두거라!”
“…….”
장건철이 주먹을 거머쥐자 근처의 종이들이 딸려와 손아귀의 모양대로 구겨졌다.
“넌 늘 그런 식이었지.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동생의 것을 탐했어. 대체 뭐가 못마땅해서…….”
“사업에 개인 감정을 개입하지 말라 가르쳐 주신 건 아버지이십니다.”
“…….”
장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특별히 놀랍거나 어이없어서가 아니라, 마지막에 덧붙은 아버지라는 표현이 대단히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아버지야말로 판단을 그르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비용과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사람이 아니라 숫자와 데이터를 신뢰하라고 저는 배웠습니다. 그리고 배운 대로 행했습니다.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네놈.”
“전 저희 그룹을 위해 가장 이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회장님은 그러고 계십니까?”
“…….”
대화를 얼려 버릴 만큼 차가운 말투였으나, 말 자체는 사리에 합당했다.
“혹시 그 아이를 위해 그룹의 자원을 퍼부을 생각은 아니신지요. 그러실 것 같았기에 말씀드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예.”
“……뭐야?”
“한열 군에게는 개인적으로 챙겨 준 바가 있습니다. 그가 무모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풍족하게 잘 살겠지요. 물론 그는 꽤 무모해 보이긴 했습니다만, 거기서부터는 본인의 책임. LS그룹에서 리스크를 대신 짊어져 줄 이유는 없습니다.”
장진욱은 사업가의 목소리로 엄정히 선언했다.
“그들과 대적하지 마십시오. 그룹은 이미 정치권과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모험을 감수해선 안 됩니다. 부디 사업가로 돌아오십시오. 회장님. 그게 당신의 책무입니다.”
* * *
“……그래, 이제는 믿어도 될 거 같아.”
이정숙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은형욱으로서는 드물게, 아주 드물게도 아내로부터 1승을 따낸 순간이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우리 사장님은 다르다니까. 첫인상부터가 아주 호감이었다고.”
“사기꾼이 사기 칠 것처럼 생긴 줄 알아? 원래 호감인 사람일수록 더 의심해 봐야 한다고.”
“당신은 그게 너무 심해. 그래도 은인을 의심할 것까진 없잖아.”
“아. 아무리 봐도 수상한 걸 어떻게 하냐고.”
이정숙은 볼을 부풀리고 툴툴댔다.
“……일단 그 학교가 통째로 수상하니 말이야.”
딸이 실종됐을 때, 이정숙과 은형욱이 우선적으로 조사한 것은 당연히도 학교 관계자였다.
그들의 탐문을 거슬러 가다 보니 동부파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은형욱은 그 실마리를 더 깊게 따라가다 죽을 뻔하고 이한열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정숙에겐 이 흐름이 다분히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근거들이 지나치게 친절했어. 마치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다듬어진 미끼처럼 말이야. 그때는 다급했으니 의심하지 못했지만…….”
“……그 뭐냐, 학생회장이었던가, 그 여학생 말하는 거지?”
“그래. 생각해 보면, 우리를 이끈 단서의 끈을 거슬러 가면, 최초의 지점에선 언제나 그녀가 있었지. 짜인 판 안에서 놀아난 기분을 감출 수 없어. 어쩌면…….”
어쩌면 그 모든 건 함정으로 유도하기 위한 노림수였을 수 있다.
실제로도 은형욱은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가 간신히 구해졌으니까.
그렇게 본다면 학생회장은 의심스러웠고, 공교롭게도 이한열은 그런 학생회장과 꽤 친밀한 사이였다.
“그래서 의심이 들자마자 몰래 알아봤잖아. 아이들은 지은이가, 실종이 아니라 전학 간 것으로만 알고 있었어. 그쪽 학생회장의 말과는 달리.”
“그건 얘기 끝났잖아. 면학 분위기 어쩌고 때문에 알리지 않았다고…….”
“그때는 그렇게 믿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어설픈 변명 같아.”
“그랬다면 어째서 날 살려 준 건데? 죽이려 했다가 살리려 했다가, 일관성이 없잖아.”
“내부에서 의견 차이가 있던 거 아닐까? 제거하려 했다가, 놔두고 지켜보기로 노선을 바꾼 거지.”
“아 그만, 그만! 의심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잖아. 지은이 이제 막 깨어났는데 자꾸 부정 타는 소리 할 거야?”
이정숙이 한열의 제안을 받아 일하기로 한 것도 그를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에겐 혐의점이 없었다.
그 모든 진심어린 걱정과 호의들이 꾸며낸 것이라면 그는 당장 충무로에 가야만 한다. 그 얼굴로 배우 안 하고 뭐 하는 건데.
“알았다고. 하지만 그 학생회장은 여전히 의심스러워. 사장님한테 말씀드리고, 다음엔 그쪽을 더 깊이 파 보는…….”
그때 전화벨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방금 전에 통화를 나눈 병원 쪽 간호사였다. 정숙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아, 보호자님…… 확인차 전화드렸는데요, 혹시 오늘 면회 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나요?
“예? 그게 무슨…….”
이정숙은 이 간호사에게 웃돈을 줘 가며 고용한 이유를 상기했다.
이한열을 의심해 온 만큼, 그의 사람인 경호원들도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았다. 그래서 2차적인 보고자를 안에 심어 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이정숙은 직감했다.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셔서요. 학교 친구라고 학생증까지 보여 주는데 안 들여보낼 이유도 없어서…….
“……거기 경호원들은 지금 있나요?”
-글쎄요. 안 보이긴 하는데…… 다들 어디 갔나?
이정숙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호, 혹시. 그 학생 이름, 기억해요?”
-윤정희라고 하던데요. 아 맞다! 본인이 무슨 학생회장이라고도…….
“마, 막아요! 그 사람 끌어내! 절대! 절대 그 사람만은 들여보내면 안 돼!”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당장 그쪽으로 갈 테니까 막으라고!”
이정숙은 당혹한 표정의 은형욱의 어깨를 치며 다그쳤다.
“밟아! 빨리! 병원으로!”
“어, 어어! 알았어!”
은형욱은 눈치 좋게 알아듣고 액셀을 끝까지 꾹 밟았다. 신호등 따윈 이미 그들 부부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 * *
경비들은 안내하는 내내 ‘최대한 무례하게 모셔오라.’는 명령이라도 들은 듯이 굴었다.
반말은 기본인 데다 툭 치는 건 일상이요, 때로는 뒷목을 잡고 밀치듯이 방향을 인도했다.
이딴 것도 기선제압이란 거냐. 웃기고 자빠졌네.
“내 몸에 또 손대면 혼날 줄 알아. 진지하게 말하니까 좀 들으쇼. 늙어서 뼈 부러지면 붙지도 않고 서러울 거 아니야.”
“이 미친 새끼가…….”
역시나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또 뒤에서 등을 밀치려 들기에 슬쩍 피하면서, 다리를 걸어 흐트러진 무게 중심을 더 흐트러뜨려 주었다.
“끄악!”
멋들어지게 활공하다 뒤통수로 착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박수도 쳐 드렸다. 짝짝.
“이야, 아주 스턴트맨이시네.”
“이 개자식이!!”
“참 말들 지지리도 안 들어. 단체로 난청이 오셨나.”
어깨를 짚은 놈의 손목을 붙잡아 꺾고, 멱살을 잡으러 정면에서 덤벼 오는 놈은 로우킥으로 단번에 주저앉혔다.
날 돌아보는 중년 안경남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이야, 눈깔 전형 수석으로 채용되셨나.
눈 부라리는 수준이 장인급이기에, 나 역시 잘 단련해 온 콧방귀로 응수해 주었다.
“뭐, 더 해 보려고? 나야 상관없는데, 너넨 곤란하지 않겠어?”
“……너 대체 뭘 믿고.”
“뭐, 믿는 건 별로 없고. 그냥 CCTV가 주변에 없더라고. 몇 놈 박살 내도 상관없을 거 같아서.”
“…….”
“그러니까 자꾸 건들지 마. 나 지금 노인네들 골절 사정까지 배려해 줄 상태가 아니니까. 알아들었어?”
아무리 이를 부득부득 갈아도 본인 치아 건강만 나빠질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하다.
그가 사납게 중얼댔다.
“……다들 물러나.”
“현명한 판단이야.”
“착각하지 마라.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니까.”
“뉘에뉘에.”
드디어 안내자가 한 명이 됐고, 난 좀 더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아까 받은 보고서는, 천호 보육원에 가해진 압박과 그 원흉에 관한 조사 결과다.
제법 잘 은폐돼 있었지만, 이정숙은 돈의 흐름을 따라가다 몇몇 흥미로운 이름들을 건져 내는 데 성공했다.
“데리고 왔습니다.”
“어서 오게. 자네는 나가 있고.”
“예. 도련님.”
소파에 앉아 날 가만히 응시하는, 도련님이기엔 많이 늙은 게 아닌가 싶은, 저 멀쩡해 보이는 중년남의 이름은 전백호라고 했다.
그리고 내겐 대원고의 교장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사사로이는 전상진의 숙부 되는 사람이지.
‘눈치챘어야 했어.’
교장선생에 대한 이현지 쌤의 알 길 없는 적의는 익히 눈치채고 있던 바.
따라서 보고서에 전백호의 이름이 등장했을 때, 나는 경악하는 와중에도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전백호.
기이할 정도로 재력이 넘치던 대원재단의 전 씨 일가. 천호보육원.
동부파.
이쯤 되면 알기 싫어도 뇌에 입력되는 수준으로 상황이 명백했다.
그래, 너구나.
바로 네놈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