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55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5
“앉게, 이한열 학생.”
그는 격조가 뚝뚝 묻어나는 태도로 말했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치고 담금질하여 연마해 낸 특등품일 터였다.
부드러움과 카리스마가 어우러진 눈빛. 드문드문 섞인 흰머리조차 남자의 중후함을 완성시키는 장식품으로 보였다.
존경받도록 철저히 설계되었으며, 설계대로 잘 구동되어 당연하게 존경받는 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시발, 싫어.”
“…….”
전백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완벽한 조각상에 생긴 흠집을 나는 즐겁게 만끽했다.
“신경이란 신경은 다 건드려 놓고 이제 와서 점잖은 척이야? 뭐야 그건. 이중인격이야?”
“……학생이, 뭔가 오해를.”
“너 같은 놈이 뭐 드문 줄 알아? 배포는 좁쌀보다 작은데 체면은 또 드럽게 챙기지? 뒤로는 겁나게 콩 까고 앞에서는 어머 전 몰랐어요~ 어쩜 그런 일이이~ 이 지랄 떠는 잡놈들.”
“말이 거칠군. 학생으로서의 품위를…….”
“아휴, 뻔한 새끼. 창의성이라곤 평생 샌드위치 토핑 얹는 데만 발휘해 봤겠지? 그거 아냐? 내가 우리학교에 감사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교장 훈화 시간이 없다는 거다. 안 그래도 지루한데, 네 뻔한 혓바닥을 거치면 블랙홀 수준으로 시간을 빨아들일 거 아니냐. 그러니까 넌 평생 여기서 신비주의 놀이나 해라. 그거 하나만은 내가 칭찬해 줄…….”
“야 이 개자식아!!”
전백호의 낯짝에 붙어 있던 두터운 화장이 떨어져 나갔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파를 박차고 일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리를 펴기 무섭게 ‘헉’ 신음을 삼키며 엉거주춤하게 다시 주저앉는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껌벅였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자세인데.
“뭐야. 너 어디서 고자샷이라도 맞고 왔냐?”
“닥쳐!”
“쯧쯧. 거봐. 거봐. 얼마나 뒤에서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녔으면…… 두 개 다 깨졌냐? 하나만 깨졌으면 내가 친절하게 양쪽 균형을 맞춰 줄 수도 있는데.”
“……너, 너 이 개자식이. 네놈이…… 네놈이이……!! 크허허헉!”
“삼가 고환의 명복을 빈다. 쯧쯧. 영원히 잠들어라.”
전백호는 초반의 이미지 메이킹을 장렬하게 깨먹으며 소파 위에서 낑낑댔다.
누군지 몰라도 잘 깼네. 잘 깼어. 구슬치기 명인으로 임명해도 되겠다.
“……후우. 내가 널, 널 왜 불렀는지, 아, 알겠느냐.”
그럼에도 전백호는 이미 카리스마 따윈 훨훨 증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까스로 분위기를 짜냈다.
보고 있자니 좀 가엽기도 해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알지. 협박하려고 불렀을 거 아니야. 뭐, 현지 쌤이랑 엮어서 징계라도 멕이려고?”
“넌 상상도 못할 테지만…… 음? 어?”
“뭐.”
“……어떻게 알았지?”
“말했잖아. 너 엄청 뻔하다고. 준법정신을 발휘할 데가 없어서 장르의 법칙을 준수하고 자빠졌네. 이젠 어디선가 봉투 같은 게 등장하겠지? 나랑 현지 쌤이 붙어 있는 사진이 그 안에서 나오는 건가?”
“…….”
“맞나 보네. 설마 다음 멘트는 ‘이현지 선생의 앞날을 생각한다면…….’으로 시작하는 거냐? 설마 그렇게까지 식상하진 않겠지?”
표정을 보니 그렇게까지 식상했습니다.
“그리고도 안 통하면 나까지 징계 먹이겠다고 으름장을 먹이겠지. 어후. 이 농후한 클리셰의 냄새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진부해. 너무 진부해. 어이, 빌런계의 애송이. 후딱 귀가해서 엄마 젖 먹으면서 삼 년은 더 수행하고 와라.”
또 혀를 차 버렸다. 나도 지겨워서 그만하고 싶은데, 정신 상태의 빈곤함이 안쓰럽기 그지없어 내 의지와는 별개로 자동 발사되는 것이다.
“……네놈, 그 헛소리들을 다 감당할 수 있겠나?”
전백호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너 따윌, 뭐 감당까지 해야 되나?”
“나를 한낱 학교장 따위로 생각했다면 크게 후회할 텐데. 이한열.”
“네놈들이 조폭 대가리라는 정도까진 알지. 오야 노릇하니까 재밌데?”
“훗. 동부파 말인가? 그놈들은 그저 발 닦이에 불과하다. 쓰고 버리기 좋은 휴지 같은 거지. 그놈들은 부하라 불릴 자격도 없었다.”
“그래서 기울어지기 시작하니 단호하게 버린 거냐?”
“제 역할을 못하는 도구는 처분되어야 마땅하지. 그러니 그 버러지들을 좀 치웠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꼬마. 그땐 우리가 그저 방관했을 뿐이니까.”
고통이 좀 가라앉았는지 말이 다시 차분해졌다. 열기가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그대로 냉기가 들어찼다.
물론 난 그딴 것보다 그의 자세를 관찰했다.
그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처음의 자세로 돌아와 있었는데, 아마도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위엄을 최대치로 살릴 좌식 자세가 그것인 듯했다.
왠지 건드리고 싶어 감질이 났다.
“어, 그래.”
“경고한다, 이한열. 말해 두건대, 정희가 특별히 탄원하지 않았다면 경고를 건넬 배려조차 않았을 거다. 넌 운이 좋은 편이었지.”
“…….”
윤정희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입안에 쓴맛이 겉돌았다.
침과 함께 삼켜 보았지만 꾸준하게도 거기 머문다.
그녀의 이름은 내 생각을 상회하는 깊이로 내 안에 음각된 듯했다.
난 사무실에 발을 들인 뒤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전백호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네 어리광을 받아 주는 건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정희가 뭐라 하든 상관없어. 우리 가문을 감히 침범해 오는 자에겐 합당한 응분으로 답한다. 그게 우리의 방식.”
“허세는 오질나게도 부리네.”
“너는 우리의 저력을 모른다. 허세를 부리는 건 너다.”
“그래?”
난 씩 웃으며 놈을 향해 한 발 디뎠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내가 여기서 네놈을 박살 내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게 허세라는 거지. 난 우리의 일부일 뿐이다. 네가 날 해친다면 학생이 교장을 상해한 사건으로만 세상에 남겠지. 그럼 가문이 총력을 다해 널…….”
그럼에도 난 이곳 카펫에 발자국 하나를 더 추가했다.
놈이 움찔하며 말끝을 떨었다.
“……거기서 멈춰라. 우리는…….”
“자꾸 우리 우리 하는데 말이야.”
또다시 한 발.
[눈치]로 파악하건대, 놈에겐 허용 가능한 어떤 선이 있는 듯했다.
그 선의 경계에 가까스로 멈추어 선 채로 나는 말했다.
“근데 말이야, 현지 쌤을 건드린 건, 그 ‘우리’와는 별 관련 없는 일 아닌가?”
“……그게 무슨 말이지?”
“이상하단 말이지. 주현보육원의 재정 구조는 아주 깨끗했어. 적어도 겉으로는. 그걸로 너희 가문을 유추해 낼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지. 근데 천호보육원을 뒤지니까…… 일주일도 안 돼서 네 꼬리를 잡아냈단 말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놈.”
이봐, 말에 초조함이 묻어 나온다고.
내가 모르길 바랐겠지만, 미안하게도 내 부하들은 아주 우수했다.
“발정 난 개새끼가 여자 하나 꼬시는 일에 그 잘난 가문의 힘을 끌어 쓰고 있다는 걸, 그쪽 어르신들은 아시려나 몰라?”
“…….”
제대로 짚었군.
놈의 얼굴이 당혹과 수치로 일그러졌다.
짐작했던 대로, 천호보육원의 일은 전백호의 독단인 것이다.
그동안은 철저하게 숨던 놈들이 잘도 찾아진다 싶더니, 역시나 이런 멍청한 구멍이 있었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지.
그때.
놈이 억지로 입매를 뒤틀면서 히죽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협박의 기색이 피어오른 순간.
“네놈, 그렇게 기고만장해도 되겠나? 지금 우리에겐 너의 소중한…….”
나는 단호하게 선을 넘었다. 몇 개의 스텝을 연달아 질러 버리니 놈이 사색이 되어 소리를 내지른다.
“가드! 이 실장!! 이 새끼 막아!!”
“그러게 누가 혼자 있으래? 하여간 너 같은 놈들은 가오 잡다 명을 다하지.”
놈의 지근거리까지 접근.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얄미운 정수리를 양단하고 싶었지만, 이 사무실에는 CCTV가 세 개나 붙어 있음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시야 밖으로는 더 있겠지.
그래서 나는 아주 우호적인 방식으로 놈을 괴롭히기로 했다.
녀석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들어 올린 뒤, 그대로 다정스럽게 끌어안았다.
“끄허어어억!”
“아이고 교장선생님! 사랑합니다앗!”
최적의 자세가 흐트러진 바람에 놈의 고간이 위기에 처했다.
“흐엇, 흐터허허헛!”
“당신은 나한테 경고하려 불렀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가드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떨어져!”“도련님을 놔라!”“경찰을 부를 거다!”
이런저런 잡소리들을 뒤로 한 채, 난 놈의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날 건드리지 마. 내 주변 사람들도. 너희가 어둠의 막후 노릇을 하든 말든, 아무 상관 안 할 테니까, 제발 우릴 좀 내버려 두라고. 안 그러면…….”
“흐허어어억!”
난 놈의 바지춤을 잡고 위로 짱짱하게 끌어올렸다.
흐힉, 흐힉, 공기 소리 가득한 신음을 음미하며 난 마지막으로 선고했다.
“다음엔 깨는 게 아니라 뜯어 버리는 수가 있어.”
어디서 다 긁어모았는지 경비가 수십 명으로 불어나 방을 가득 메웠다. 물론 그러길 바라고 저지른 일이었다.
“도, 도련님을 놔 줘!”
“어, 그래.”
리퀘스트가 있다면 들어 드려야지.
놈을 소파에 던지듯 처박고 바로 반대편으로 튕기듯 뛰쳐 나간다.
단 두 번의 발돋움.
뒷다리에 응축된 운동에너지가 내 몸을 높이 띄워 올렸다.
점프-!
“끄헉!”
전백호의 비명.
“뭐, 뭐야!”
가드들의 당혹감.
그 모든 것을 순간 발아래 둔 채 허공을 주유한다.
중간에 한 놈의 정수리를 밟고, 두 놈째의 어깨를 차고, 복도로 빠져나오자마자 세 놈째의 안면을 도움닫기로 삼아 그들 반대편으로 착지한다.
“어, 어엇?!”
발을 딛자마자 즉각 복도를 내달렸다.
놈들이 단체로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전백호의 외침만이 내 뒤를 쫓았다.
“놈을……! 아니 그 계집을 잡아라!!”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배윤하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내가 쇼를 벌인 탓에 경비들은 죄다 여기 몰려와 있었다. 한두 놈 정도 남아 있을 테지만…….
‘그 정도야 뭐.’
질주 끝에,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가까스로 골인.
바로 7층으로 내려가, 미리 봐둔 구조를 떠올리며 703호를 향해 내달렸다.
몇 스텝 밟지도 않았는데 비명 소리가 귓가에 파고 들어왔다.
“이, 이거 놔요!”
“협조해 주십시오. 위급 상황…….”
“아 안 간다니까!! 뭔 놈의 위급 상황이 나한테만 일어나는데?!”
“아, 진짜. 귀찮게 구네. 좋은 말로 할 때…….”
배윤하의 목소리.
코너를 꺾어 들어가자, 경비 한 놈이 배윤하의 팔을 잡은 채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딱히 걱정 되진 않았다.
왜냐면-.
“이 씨, 정말! 다쳐도 난 몰라요!”
배윤하가 경비의 팔을 잡고 몸을 휘돌리며 반동을 탔다.
“엇?”
경비의 발이 허공에 뜨고, 윤하는 어깨춤의 옷자락까지 끌어당겨 그대로 메쳤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업어치기.
그로기 상태의 경비에게 윤하가 코웃음을 피니시로 남겼다.
“안 간다고 했잖아! 왜 숙녀의 팔을 막 더듬고 그래?! 미투 당하고 시퍼?!”
“……그 사람은 이제 못 듣는 거 같다만.”
“어? 언제 왔어? 뭔데? 이게 다 뭐야, 갑자기?”
언젠가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배윤하는 수준 높은 유단자다. 남자 한둘은 가볍게 찜 쪄 먹을 힘은 있었다.
“지금 설명할 시간은 없고. 일단 나가자.”
“아 뭔데. 수업 받다가 갑자기 무슨…….”
“배윤하.”
“……응?”
“나 믿어?”
내가 어깨를 쥐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치니, 그녀가 크게 뜨인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물론 그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뭔 개소리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아무래도 그렇지?”
두 번째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무섭게, 코너 저편에서 경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다! 잡아라!”
난 그것을 슬쩍 흘기며 말했다.
“지금은?”
“그럴 상황인 거 같네!”
“좋아, 튀자.”
“꺅!”
난 윤하의 어깨와 다리를 안아 들고, 그러니까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매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