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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자꾸 늘어-156화 (156/164)

<재능이 자꾸 늘어 156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6

난 윤하의 어깨와 다리를 안아 들고, 그러니까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매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쪽은 이미 바글바글하므로 반대편 비상구를 박차고 나왔다.

매끈한 대리석이 삭막한 시멘트로 바뀌고, 수평의 복도가 사라진 자리에 수직의 계단이 가파르게 등장한다.

깊이와 각도 면에서 건축법이 제대로 준수되었을까 의심되는 계단.

거의 절벽에 준하게 깎아내려진 아찔한 깊이를 내려다보며 배윤하가 헉 소리를 뱉었다.

물론, 난 잘 됐다 생각하며 씩 웃었다.

“좋아.”

“……야, 그거 아니야.”

“뭐가 아닌데.”

“아무튼 아니야으아으아앙!”

점프했다.

열 개 넘는 계단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고, 중력이 두 명분의 질량을 정확하게 계산해 우릴 빨아들였다.

가속과 가속.

그 와중에 내 발이 디딘 곳은 땅이 아니라 시멘트벽이었다.

벽을 차고, 난간을 사뿐히 딛고, 또 반대편 벽으로 도약하는 식으로 이동한다. 구조가 비좁아 면과 면이 다닥다닥 붙어 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난 바닥은 드물게 밟고, 대부분은 허공에 있다 중간중간 벽을 타는 식으로, 수십 개의 계단을 순식간에 삭제시켰다.

탓- 탓- 타앗-!

그 결과 나는 엘리베이터보다 신속하게 1층의 바닥을 밟을 수 있었다.

“……아아웩!”

물론 배윤하는 지금쯤 십이지장으로 실뜨기를 하는 기분일 것이었다.

참고로 저 구역질은 최초의 ‘아니야으아으아앙!’에서 끊이지 않은 채 이어져 온 소리였다.

창백한 안색의 배윤하가 품 안에서 버둥댔다.

“이씨! 날 죽일 셈이니?! 오웨에엑…….”

“긍정적으로 생각해. 이제 어지간한 뱃멀미는 다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두 번 긍정적이다간 입으로 순대도 뽑아내겠네!”

아무튼 그렇게 쾌속으로 답파해 1층 비상구를 통과했지만, 거기에도 장애물은 남아 있었다.

게이트를 지키는 6명의 가드.

그들은 거의 추락에 가까운 속도로 도착한 우릴 보며 경악했지만, 빠르게 프로의 정신을 발휘하며 달려들었다.

난 놈들과의 거리와 주변 공간을 빠르게 스캔하며 활로를 모색했다.

‘……어쩐다.’

나 혼자였다면 몸으로 다 뭉개고 지나갔겠지만, 지금 그랬다간 자칫 배윤하가 다칠 수 있었다.

잠깐의 계산 끝에, 난 안전한 운반과 저돌적인 돌파를 양립시킬 최적의 방도를 찾아냈다.

대가는 배윤하의 순대뿐이었다.

“좋아.”

“……네가 좋다면 나는 불안흐아아이으악!”

배윤하를 허공에 휙 던졌다.

자유를 되찾은 두 팔로 스탠스를 잡는다.

발을 박차고, 가장 선두에 뛰어든 놈의 턱을 날려 버렸다.

남은 건 다섯.

선두가 쓰러지기도 전에, 놈의 옆을 스치며 전진.

오른편 놈이 진압봉을 높이 들어 올린다. 암내 방지 차원에서 겨드랑이를 두드려 준다. 꺾이는 상체.

이놈은 숨을 되찾기까지 한동안 전투불능이다.

바로 스텝을 지그재그로 밟으며 돌진.

다음 놈은 그래플러를 했는지 무게 중심을 낮추고 태클을 감행한다.

정직하고 뻔하다. 스텝에 변박을 주는 것만으로 타이밍을 뺏는다.

주춤하는 틈을 타 놈의 안면에 킥을 살포시 먹여 준다.

남은 건 셋.

한꺼번에 상대하도록 하자.

정면에 하나. 뒤에 하나. 동선을 계산한 바에 따르면 지금쯤 뒤를 덮쳐 오겠지.

좋아, 내 뒤통수를 노리고 휘둘러 오는 진압봉의 기척이 느껴진다. 뒷다리를 빼며 고개를 숙이니, 진압봉은 허공을 갈라 동료의 아가리를 무심코 갈겨 버린다.

당황하는 놈의 옆구리에 짧게 한 방.

급소에 제대로 들어갔으므로 이놈도 더 이상 덤비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 놈은 전의를 잃었으므로 더 신경 쓸 것 없다.

난 모든 동선이 정확히 계산에 맞게 놓였음을 확인한 후, 두 발자국을 더 걸어 나갔다.

그대로 팔을 뻗으니, 1초 후에 배윤하가 짧은 비행을 마치고 품에 돌아와 안착했다.

그러곤 공중에 정신을 깜빡 두고 왔는지 멍멍한 눈을 내게 보내 왔다.

“……나 방금 천장하고 가까워졌던 거 같아. 착각이겠지? 그렇지?”

“제대로 느끼고 왔네.”

“나 기절할래. 이따 깨어나면 다 꿈이었다고 말해 줘.”

“그게 의지대로 되는 거였냐…….”

“으갸아악! 이한열이 이 자식아! 사람을 그렇게 막 던지면 어떡해!?”

“괜찮아. CCTV의 사각지대에서 던져서 허리가 부러졌어도 혐의 입증은 힘들 거야. 각을 다 재 보고 던졌다고.”

“그게 나한테 할 말이……! 으악! 사람들이 다 죽어 있어!”

“안 죽었거든. 그리고 역시나 CCTV의 사각지대…… 야, 어지러워. 어지럽다고.”

배윤하가 내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 대기 시작했다. 가만 뒀다간 집에 갈 때까지 그럴 기세기에 한마디 해 줬다.

“이제 멀쩡한 거 같네. 빨리 내려와.”

“아직 속이 울렁거리는데. 좀 더 에스코트해 봐.”

그러나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배윤하는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스스로 내려왔다.

내 팔뚝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본인 체면을 챙길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다.

과연 이 매미 같은 자세가 썩 보기에 권장되는 모양새는 아니지. 게다가 평소 존경해 왔던 사람 앞이라면 더더욱.

요컨대, 정문 앞에는 윤정희가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서 있었다.

분위기, 표정, 단아한 자태까지, 모든 모습이 학생회실 속의 그녀를 똑 떼다 이곳에 옮겨 놓은 듯했다.

“얘들아, 어딜 가니?”

“어, 회장님, 저, 그게.”

“배윤하, 조용히 해.”

“아 왜…….”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을 텐데도, 윤하는 내 심각한 표정을 보증 삼아 입을 다물기로 한 듯했다.

“……이따가 다 말해 줘야 해.”

“알았어.”

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윤정희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었다.

거침없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던 듯하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멈춘 것을 보면.

“가지 마.”

“…….”

“좋은 인재는 어디서나 환영받지. 나라면 널 품어 안을 수 있어. 이사님이 골치 아프게 굴겠지만 그것도 내 선에서 쳐낼 수 있지. 그러니까, 가지 마.”

고개 돌려 그녀를 보았다.

윤정희는 가면을 벗고, 놀랍도록 딱딱한 얼굴로 날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 저것이 그녀의 본래 모습이구나.

그간 내가 간파한 어둠은 그녀의 겉피부에 불과했다.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는 새까만 동공이 그녀의 밑바닥을 슬며시 비쳤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뻣뻣해진 성대를 강제로 열어젖혔다.

“……지금 뭐라는 겁니까.”

“원하는 게 뭐야?”

“뭐?”

“보육원 아이들의 안녕? 줄 수 있어. 이현지 선생? 그 문제도 해결해 줄게. 권력이나 재력? 그건 좀 더 복잡하지만,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네가 이쪽에 선다고 말만 한다면, 다 줄 수 있어.”

“……웃기지 마.”

“뭐가 웃기지?”

그녀가 능청스럽게도 고개를 갸웃했다.

실로 자연스러웠지만, 이제 내게는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게 중요한 건 너와 네 사람들의 평안 아니었니? 그걸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뭐지?”

“……그 대가는?”

“네 눈과 귀와 입.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다물어야 할 때 다무는 것. 그다지 어렵지 않지?”

“하.”

헛웃음이 터졌다.

냉각된 심장의 온기가 숨과 함께 흐르는 듯했다.

하하하아…… 웃음은 잘게 다져지고 흩어지다, 결국엔 한숨이 되었다.

“그래요. 당신의 말이 맞죠. 그런 가벼운 가격이라면 좋다고 지불해야 마땅하겠죠. 완전 거저 행사네요.”

“그렇지? 그러면…….”

“얼마 전까지의 나였다면 그랬겠지.”

난 그녀를 노려보았다.

“지은이한테도 이런 식으로 회유를 시도했습니까?”

“…….”

단서는 차고 넘쳤다.

첫째, 배윤하가 학생회에 합류한 시기가 전생보다 다소 늦었던 이유.

당연히, 은지은이 이탈하는 시기가 늦춰졌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난 언젠가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례로 하나 말해 주자면, 상진이 사건은 묻지 마 범죄가 아니야.

-응? 정말?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상진이도 마찬가지고.

-단서가 적으니까 경찰조사가 그렇게 난 거지. …… 그때 등장한 괴한은 두 명이었어. 팀으로 묻지 마 범죄 저지르는 애들 봤어?

-어어? 진짜? 왜 난 그런 걸 몰랐지?

몰카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때 흥미로 반짝 빛나던 그녀의 눈빛을 난 기억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실종됐고, 학생회에 공석이 생겼다.

말하자면, 전생에서 그녀는 더 빨리 실종됐을 것이다.

왜냐면 전생에서 전상진은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가 되었으며, 언론에서도 꽤 크게 보도된 바 있었다. 더 이르게 조사에 착수했겠지.

“……지은이는 그 사건의 뒤를 캐다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아 버린 거겠죠. 맞습니까?”

“글쎄.”

“맞군요. 회유를 했겠지만 응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고작 그딴 이유로 팔려 나가서 그 수모를 겪었어. 하하.”

난 손가락을 직각으로 세워 그녀를 찍어 내듯 가리켰다.

“지은이는 당신을 진심으로 따랐어.”

“알아. 안타까운 일이지. 참 귀여운 아이였는데.”

“…….”

“그러니까 내가 또 그런 일을 하지 않게 해 줘.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거든. 일일이 입을 막으러 다니는 것도…… 꽤 지치는 일이라.”

“……당신.”

순간, 난 그녀의 말에 깃든 묘한 뉘앙스를 잡아챘다.

부지불식의 불안감이 내 뒤통수를 두드렸다.

그리고 은지은은 오늘 의식을 차리고 깨어났지…….

왜 이 뜬금없는 기억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가. 답은 명확했다.

“……지은이 어쨌어.”

“아, 이런. 말실수를 했네. 역시 넌 눈치가 좋단 말이지.”

“지은이 어쨌어!!”

“흠, 글쎄.”

그녀가 입매를 쓰다듬으며 교교하게 웃었다.

“내가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난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배윤하를 이끌고 신속하게 빌딩을 빠져나온 뒤 김 대리가 대기시킨 차에 올라탔다.

그 즈음 경비들이 단체로 1층에 도착했지만 우린 이미 큰길에 바퀴를 얹은 뒤였다.

“……병원으로 가세요, 최대한 빨리!”

* * *

병원의 복도는 평소보다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 대리가 탄식하듯 중얼댔다.

“……해당 시각에, 경호팀은 휴게실에서 자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신 커피에서 수면제 반응이 검출됐습니다.”

“누가 그런 거죠?”

“새로 채용된 신입 경호원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일이 있은 뒤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LS경호팀은 인적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짜증스럽게 물었지만, 사실 내가 뭐랄 부분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 직속도 아니고, 그저 호의로 내 편의를 봐주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잘못이라면 내게 있었다.

동부파가 와해 직전이므로 이제 안전할 거라 안일하게 결론을 내린 나에게.

그녀가 실종된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한 무지함에.

그러나 김 대리는 진심으로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예민했네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

복도를 꺾어 들어가니, 병실 앞 벤치에 은형욱 씨가 침중하게 앉아 있다 날 발견했다.

“……아, 사장님.”

“어떻습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를 악물며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앗, 저기, 지금 들어가시면 안…….”

간호사가 깜짝 놀라 만류했지만 난 억지로 발을 들이밀었다.

잘 정돈된 1인실 안, 은지은은 침대 위에 앉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여위고 기미가 가득한 모습에선 예전의 태양 같던 활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한열이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너.”

언뜻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 눈엔 그렇지 않다는 징후들이 속속 읽혔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흔들리는 동공. 미소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듯 입매가 파르르 떨었다.

무심코 한 걸음 다가가니, 그녀가 눈에 띄게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 사실에 본인이 충격 받은 것처럼 나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아, 아니. 이, 이건. 그게 아니라. 난 괜찮은데. 어, 그러니까, 미안, 난, 왜, 어째서…… 아아, 으아아앙…….”

이윽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울음을 터뜨린다.

비명. 몸부림. 살을 긁어 대는 손톱.

의사와 간호사가 헐레벌떡 들어와 그녀의 손발을 억누르고 안정제를 투입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타까움에 뻗어 낸 손은, 그저 허공만을 움켜쥐고 물려야만 했다. 난 그대로 발을 돌려 병실을 걸어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은형욱은 한숨을 쉬듯 답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아무 일도. 그저 몇 마디만 건네고 나왔을 뿐이랍니다. 하지만 그 뒤로 저렇게…….”

어떤 내용의 말을 건넸는지는 알아볼 것도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정숙이 팔짱을 풀며 내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사장님.”

색깔을 지워 낸 듯한 말투로 그녀는 말했다.

“우리 나눠야 할 얘기가 있을 것만 같은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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