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57화 (157/164)

<재능이 자꾸 늘어 157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7

* * *

어둡게 가라앉은 형욱과 정숙, 그리고 겁먹은 강아지 표정의 배윤하를 앞에 두고,

나는 가능한 모든 사실을 얘기했다.

조선시대 사관이 기록했더라도 지금 나처럼 상세하게 내 반년 간을 서술해 내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회귀나 내 능력에 관한, 말하면 오히려 이해를 해칠 몇몇 초자연적인 얘기들은 조금씩 각색됐지만, 이를 제외하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실이 이곳 탁자에 놓였다.

그리고 내 각색 실력이 그렇게 형편없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긴 했지만, 믿을 수 없다는 표정까진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입니다.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하세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정숙이었다.

“지금으로선 논리적 허점을 못 찾겠으니, 일단은 진실이라고 간주하고 말할게요. 일단 하나 묻겠는데, 사장님이 저희를 돕는 이유는 뭐였죠? 지은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도 일부 있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꼽자면, 그래요. 이 모든 사달의 일부로서 책임감을 느꼈다고 해 두죠.”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아직도 뭔가 숨기고 계시네요.”

“그 부분은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흠.”

역시나 이정숙은 눈치도 좋고 상황 판단이 빠르다.

이런 사람 앞에서 어설프게 숨기는 건 아예 소설을 읊느니만 못하지.

난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되, 말할 수 없는 부분부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내 진솔함만은 전해졌으면 했다.

‘이정숙은 원래부터 날 의심하고 있었지.’

난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걸 눈치채고 있었다.

사실 그게 당연하지.

한 번 구해졌다고 덜컥 믿어 버리는 은형욱 같은 사람이 허술한 거다.

그럼에도 놔둔 이유는, 의심을 교정하려는 행위조차 의심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시간을 지불해 신뢰를 살 생각이었다.

이렇게 강제로 믿음을 교정하는 일은 되도록 없었으면 했다.

그리고 침묵이 잠시 방문했다.

은형욱은 단기간에 밀려든 정보량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고, 배윤하는 복잡한 심경을 다스리느라 역시나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정숙은 입을 다문 채, 가끔 미간을 찌푸렸다.

의혹과 신뢰감이 머릿속에서 충돌할 때마다 거기 주름 진 균열을 새겼다.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입은 혀로 단어를 잣는가 싶었다.

그러기를 한참.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좋아요. 항복. 전 사장님을 믿기로 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입사 한 달 만에 드리기엔 죄송스런 말이지만, 저 퇴사하고 싶은데요.”

“당신! 그게 무슨 말이야!”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던 은형욱을 펄쩍 뛰게 만든 한마디였다. 그러나 이정숙은 단호했다.

“오해 없으셨으면 하는데, 이건 믿음이나 고마움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한 남편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어미로서 하는 말이죠.”

“이렇게 갑자기 할 말은 아니잖아! 적어도 나와 상의를…….”

“당신은 가만 있어 봐. 사장님 말이 다 진실이라면, 놈들은 법관을 수족처럼 부리고, 거대한 규모의 조직을 발 닦개로 쓰고, 정재계에 광범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그야말로 한국 사회를 암중에 지배하는 흑막이라는 거잖아요.”

“네, 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 놈들과 정면으로 부딪혀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

그럴듯하게 희망 섞인 전망을 말해 줄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글쎄요. 해 보지 않고선 모른다는 말밖에는.”

“사장님은 유능하시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로선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해요. 이건 전쟁이고, 전쟁 중에는 병사의 피가 흐르니까. 동의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 제 남편과 딸이 한낱 병사의 피를 흘리게 될 상황을 원치 않아요.”

“요컨대 이 전장에서 내려가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존중합니다. 하지만…….”

난 턱을 쓸어 만지며 말을 이었다.

“놈들이 그걸 허락해 줄지는 모르겠네요. 놈들의 머릿속에서 우린 이미 한 편으로 묶여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한데 뭉치는 게 더 현명한 일일 수 있습니다.”

“아닐 수도 있지요. 우리 따윈 잔챙이는 금방 잊어버렸을 수도. 만약 놈들이 사장님을 집중 타격하기로 정했다면 당신과 멀어질수록 안전이 확보되겠죠. 아닌가요?”

“물론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판단컨대, 그녀의 말은 다 진심이다.

상황을 비관하는 신랄한 진단도, 가족들을 연루시키고 싶지 않다는 염려의 말도, 전부 그녀의 안쪽에서 손수 꺼내 온 문장일 것이다.

그러나 내 [눈치]는 저변에 흐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감지했다.

단지 저것뿐이라면,

그녀의 의도가 퇴사의 통보일 뿐이라면,

저 도도하게 흐르는 분노, 야트막한 기대감, 체념 따윈 옛적에 살라 버린, 각오된 자의 단단함이 전해져 올 리가 없다.

언뜻 차갑고 고요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는 활화산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지맥이었다.

난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약속드리죠.”

그러므로 난 말했다.

“전 끝까지 갈 겁니다. 어쩌면 누군가 쓰러져 피를 흘리기도 하겠지요.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 따윈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놈들에게 굴복하지도, 이쯤이면 됐다고 자위하지도 않을 겁니다. 놈들과 나, 둘 중 하나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저는 제 모든 재능, 자원, 인맥을 총력으로 동원해서…….”

난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시선과 시선 간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눈빛 안쪽에 자리한 진심이 더 잘 보였다.

“싸울 겁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러므로 그쪽이 각오가 안 되었다면 저야말로 사절입니다. 어설픈 병사는 제게 필요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번엔 제가 묻도록 하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물어뜯는 사냥개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갑자기 역전된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는지 은형욱이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나 이정숙만은 이해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유도하고자 한 말들은 모두 이 지점에 고여 있었다.

그렇다.

내가 해야 할 건 보호자로서의 약속 따위가 아니라, 같이 투쟁하는 동지로서의 확고부동한 선언이었다.

그제야 그녀가 자리에서 스륵 일어나 깊게 고개를 숙였다.

“시험을 해서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장님의 의지와 각오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어요.”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계약서를 다시 써야 되겠군요. 정말로 퇴사 후 재입사네요.”

“예. 그렇겠네요.”

우린 눈을 마주치며 뜻이 맞물렸음을 재차 확인했다.

어리둥절한 은형욱만이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아, 아니, 대체 방금 무슨 말들이 오간 겁니까?”

“사장님이 말하셨잖아. 퇴사 후 재입사라고. 음, 새로 쓰는 계약서에는 남편과 딸의 특별 안전 조항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예, 그러도록 하지요. 대통령급까진 안 되어도, 적어도 고위 간부급 경호 인력을 투입하겠습니다.”

“아예 해외에 내보낼 생각도 있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아니 아니!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거냐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하여 단어를 고르고 있는데, 이정숙이 가차 없이 선고를 때렸다.

“응, 당신 이제 해고래.”

“아, 그렇구나.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은형욱이 허허 웃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뭐라고?”

“남자답게 집에서 애나 보고 있어.”

“사랑받는 남편은 살림을 잘해야죠.”

“아니 뭔 미친 소리들이야?!”

솔직히 은형욱은 있으나 마나 하면서 인질로 삼기엔 적합한 위치의 인물이었다.

요컨대 영화 속에서 괜히 뻘짓 하다 납치당해서 주인공의 스트레스성 탈모를 앞당기는 여주인공 같은 포지션이다.

그럴 바에야 아예 위험한 일에서 배제해 버리는 게 효율적인 선택.

말하자면 진짜 선수인 이정숙의 멘탈 관리 차원에서 그는 잠자코 있어 줘야만 했다.

“……노동부에 신고할 테야. 노동부…….”

“권고사직의 형태로 처리하도록 하죠.”

“거 괜찮네요.”

“당사자 앞에서 사람 막 자르고 그러지 말아 줄래?!”

이대로 잘라 버리면 안쓰러우니 그에게 위안거리를 하나 던져 주기로 했다.

“걱정 마세요. 진짜 퇴직이란 뜻은 아니고, 보직 변경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지은이를 돌보고 지키면서 수시로 보고해 줄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그쪽 일에 전념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임금도 그대로 지급됩니다.”

“아, 그런 겁니까? 그런 거라면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아하하. 순간 실업자 된 줄 알았잖습니까.”

보모로 채용되었음을 나도 알고 그도 알고 하늘도 알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굳이 거론하지 않도록 했다.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속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또한 새로 쓰인 계약서에서 이정숙의 월급에 위험 수당이 붙어 기존 대비 두 배로 뛰리라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좋았어. 방해꾼이 사라졌다.”

이정숙이 뭔가 음흉하게 중얼거렸지만 그것도 나는 모른 척했다.

* * *

계속 침묵만 지키던 배윤하는 돌아오는 길에 입을 열었다. 초조한 목소리였다.

“……아까 말한 거, 다 진짜야?”

“그래,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

“미안할 건 없지만…… 그냥, 모르겠어.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아직도 현실감이 없네.”

난 그녀의 심경을 이해했다. 지금 이 순간, 나보다 더 혼란스럽고 충격받았을 사람이 그녀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많은 게 함축된 질문이었다.

내가 함부로 대답할 말이 아니기도 했다.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그녀가 스스로 혼란을 다스리도록 놔두었다.

“상진이는, 상진이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을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그건 나도 알고 싶은 사실이었다.

윤정희조차 단번에 간파해 낸 내 [눈치]도 전상진의 어둠을 발견하진 못했다.

내 감을 뛰어넘을 만큼 훌륭한 연기자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미안. 미안하다.”

“아 진짜 어떡해…….”

세단 뒷좌석에서, 배윤하는 얼굴을 감싸며 웅크렸다.

흘러내린 머릿결도 그녀의 흐느낌을 가려 내진 못했다. 난 어쭙잖은 위로조차 건넬 수 없었다.

어떤 전망을 떠올려 봐도, 이 커플의 향방이 긍정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

그녀는 오늘 밤 실연을 했고,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 모든 비극은 내 선택의 결과이기도 했다.

내가 그들과 적대하지 않았다면,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도 재벌가의 자제가 되어서,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미래를 그렸을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찌 입 발린 말을 꺼내겠나. 대체 무슨 염치로.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순간을 같이 감당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감정을 추스를 여유조차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보육원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위기와 직면해야만 했으니까.

“……하,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이게 다…… 뭐야?”

“혀, 형, 누나아…….”

아이들이 울먹이면서 건물 밖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주변으로 다수의 발자국과 흩어진 문서 따위가 어지럽게 흐드러져 있었다. 공무원들이 분발하신 결과였다.

난 그제야 무음으로 해 둔 전화기에 찍힌 수십 건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다고?”

“경찰들이…… 어, 원장 선생님이 무슨 불법을 저질렀다고…… 탈세랑, 어어, 그리고…… 뭐라더라, 조폭이랑 연루된 정황이 어쩌고…….”

“…….”

“우리 보육원도 곧 폐쇄될 거래……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과거가 드디어 내 뒤를 따라잡아 뒤통수를 후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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