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58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8
* * *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엄밀히 말하면 전생의 재탕은 아니다.’
그동안 나도 놀고 있던 게 아니다.
보육원 재정이 돈세탁에 동원됐거나 사재로 빼돌려진 정황 등을 철저히 조사해 봤다. 전문가들에게 돈을 뿌려 가며 시킨 일이므로 정확할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주현보육원은 깨끗했다. 대부분의 재정이 사회단체와 정부의 지원 하에 정당하게 집행됐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정상일 수가 있나 싶어 의심이 드는 수준이었다.
그 즈음 나는 결론을 내렸다.
정황상, 전생의 ‘보육원 검은 돈 파문’은 조작됐을 것이다.
조사 당국이 총체적으로 무능한 게 아니라면 틀림없겠지.
하지만 마기철 원장이 돈세탁 및 조직 자금 관리에 관여했다는 것도 엄연한 진실이다.
요컨대, 마 원장은 우리 보육원만을 예외로 두었다.
그는 조직의 하수인임이 틀림없었지만 주현보육원만큼은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외따로이 온전하길 바랐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믿으려 했던 이유가 그런 부분에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전생에는 돈세탁. 현생에는 탈세. 우리 보육원을 걸고넘어지는 지점이 달라졌다.’
왜 달라졌는가.
답은 간단하다.
둘 다 진실이 아니니까.
조작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때그때 써먹기 쉬운 수단이 동원됐다…… 그것이 이 사태의 전말.
이 주제에 관한 고찰은 딱 거기까지.
난 이후에 밀려든 또 다른 골칫거리에 내 정신을 또 쪼개어 할애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까지…….
내 전담변호사인 연희재 씨의 전화였다. 그녀가 던진 화두는 내 상념을 끊어 내기에 충분히 무거웠다.
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이유가 뭐랍니까?”
-거기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방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저희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정색하시는 모습은 저도 오랜만에 봅니다.
“…….”
발바리의 사건을 규명하고 항소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에 ‘높은 곳’에서 외압이 들어왔다고 한다.
시도를 만류하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받은 로펌 대표는 현재 실시간으로 멘붕 중이라고.
-법무부장관이 직접 전화를 걸어올 줄은 몰랐어요. 저도 더 힘을 써 보겠지만 큰 기대는…….
“……이해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법무법인 강의 전담 변호사로서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그런데 이쯤 되니 저도 개인적으로 궁금해지네요.
연희재 변호사의 복잡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 왔다.
-은인님, 대체 무슨 일에 연루되신 겁니까? 대체 어떤 자들과 엮이신 거예요?
“…….”
대답을 해 주고 싶었지만, 몇 마디로 간단하게 정리될 얘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통화로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나중에 말해 주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세상이 한순간 입을 다물고 찬바람조차 발걸음을 조심했다.
난 적막을 두르고 헝클어진 신경을 정돈하려 했다.
시도가 족족 실패로 돌아가고, 어둠 속에서 내 생각에 받히며 끙끙대고 있을 즈음,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털썩 앉았다.
배윤하였다.
“애들은 다 재웠어. 울고불고 하더니 치킨 몇 조각에 순식간에 안정되더라. 역시 치느님은 만병 치료제야.”
“……다행이네. 수고 많았다.”
“응.”
그녀는 나란히 앉아서 내 묵언 수행에 동참했다.
어둠, 침묵, 드문드문한 별빛, 로비는 초겨울의 한기에 점령됐고, 세상은 어제보다 느리게 돌아가는 듯했다.
말은 없었지만, 말이 없어서 좋은 순간이 있다.
우리의 호흡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흐트러짐이었다.
반대의 파장이 맞물려 수평을 이루듯, 우리는 상대의 숨소리와 주기를 맞추며 안정을 되찾아 갔다. 공기 중에 퍼지는 고동만으로 우린 서로를 도닥였다.
한참 뒤에야, 배윤하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말이야.”
* * *
늘 그랬다.
내 상황이야 어쨌든 지구는 한결같았고 태양은 힘차게 솟았으며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이 분주해졌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또 시작되었고 나는 학교에 와 있었다.
오늘은 축제였다.
“……너 안색이 왜 그러냐? 어디 아파?”
“예?”
“어, 뭐랄까. 너 오늘 되게 퇴폐적이야. 삼 일 밤낮 도박하다 다 잃은 사람 같아.”
“뭡니까 그 쓸데없이 디테일한 비유는.”
“아무튼, 오늘 공연 할 수 있겠어?”
수림 선배가 날 불안하게 바라봤다.
괜한 걱정이라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봐도 지금 내 안색은 엉망이었다. 버프 받은 외모 덕에 퇴폐적이란 소리라도 듣지, 원래의 나였다면 영락없이 썩은 바나나였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아요. 마무리는 잘해야 되니까요. 공연은 문제없이 잘 끝낼 겁니다.”
“……마무리?”
“아무튼, 우리 리허설 안 해요? 다른 팀은 다 한 번씩 한 거 같은데.”
“그러게. 박재준 이놈이 또 연락이 안 되네. 아무튼 이 새끼 빠져 가지고, 으휴. 좀만 기다려 봐. 밖에서 좀 놀다 오든가. 연락할게.”
“예 뭐. 그럴게요.”
답답한 숨도 좀 트일 겸해서 강당을 빠져나와 축제가 한창인 학교 부지를 걸었다.
보이는 모든 곳이 북적거렸다.
날씨는 화창했고,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었다.
부대끼고, 부딪치고, 충돌이 가득하지만, 날씨 탓인지 분위기 탓인지 그 모든 게 달뜬 소용돌이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나만 빼고 모두가 그랬다는 말이다.
-역시 부자 학교라 그런지 완전 으리으리하다. 와, 학교 되게 크네.
지윤의 문자였다.
그녀는 내 초대를 흘려듣지 않았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면서까지 축제에 참여해 준 것이다.
초대해 놓고 방치할 수도 없었으므로 잠깐 얼굴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학교 정문에서 만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 와…….”
“응?”
“……야! 네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존잘이잖아! 나 방금 심장 떨어질 뻔했어! 와……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다 있구나…….”
“야아아. 다 들리잖아…… 창피하게.”
“별 게 다 창피하네. 어, 안녕? 네가 바로 준이가 한 방에 꽂혔다는 한열이구나? 난 은하라고 해. 이년 친구라는 고된 역할을 수행 중이지. 초면에 미안한데 나도 너한테 좀 꽂혀도 될까?”
“야! 너 자꾸 쓸데없는 말 할래?!”
“아, 좀 가만히 있어 봐. 나 오늘 우정을 버리고 사랑을 택할 테니까. 에잇! 이거 놔라!”
“……아하하. 한열아 미안. 얘가 좀 푼수 같은 면이 있어서…… 하하, 아 제발 닥쳐 보라고오. 너 때문에 내 체면까지 뭉텅이로 깎이고 있잖아……!”
지윤은 은하라는 친구 한 명과 함께였는데, 척 봐도 둘의 관계가 눈에 선했다.
은하란 아이는 작고 귀여운 몸에 똘끼를 비축해 두는 타입. 그리고 지윤은 그 똘끼를 봉인하는 관리자인데 아직 수습이라 역부족인 것이다.
얘는 뭐 이런 애들만 자꾸 꼬일까.
아무튼 난 둘에게 학교를 안내해 주었다.
다행히 어디를 데리고 가든 둘이서 잘 놀았고-정확히 말하면 은하가 신나게 놀면 지윤이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가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난 분위기를 맞춰 주거나 리드할 필요가 없었다.
축제를 즐길 기분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은하란 아이에게 감사함이 들 지경이었다.
“난 이제 가 봐야겠다.”
“……응? 아, 공연한다고 했지? 준비하러 가는 거야?”
“그래. 잘 놀다가 이따 강당으로 와. 꽤 재밌을 거야.”
이쯤 되면 체면치레는 됐다 싶어서 강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금은 환기된 기분은 강당에 발을 딛자마자 순식간에 경색됐다.
수림 선배가 새파래진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한열아, 재준이가.”
“…….”
재준 선배에게 가까스로 닿은 연락은, 단지 불안감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미안. 나 집에 갇혔어. 못 갈 거 같아. 아버지가 이상할 정도로 강경해서…… 미안. 미안해. 어……! 아버지, 이건 그러니까, 아 진짜!
-너 이 자식 어디에 전화……!
-아 나 좀……!
수림 선배가 녹음해 둔 통화 음성은 누군가의 고함, 그리고 부서지고 쿵쾅대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그리고 다시는 연결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갑자기 오늘 딱 이러는 게…… 아 진짜.”
수림 선배는 거친 숨을 몰아쉬다,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겉옷과 가방을 챙기는 그녀의 팔을 잡고 물었다.
“어쩌시게요?”
“……뭘 어째, 가서 잡아 와야지. 이제 곧 공연인데 기타도 없이 할 수는 없잖아.”
“재준 선배 집에 갔다 오는 것만도 1시간인데요. 그리고 우리가 가서 빼 올 수 있는 수준이면 재준 선배도 알아서 탈출했을 거예요.”
“아, 그럼 어쩌라고!!”
“일단은 진정하시라는 말이죠.”
“으이씨……!”
그녀는 발로 강당 바닥을 짓밟으며 분풀이를 하다, 내 충고를 듣기로 했는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달달 떠는 다리만 봐도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전해졌다.
난 한숨을 푹 쉬고, 강당을 나오는 길에 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연락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연락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와 있었으니까.
윤정희가 강당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마지막이야.”
“뭐?”
“경고는 이걸로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경고가 아니게 되겠지.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어. 그러니까 한열아. 지금 내가 내미는 손을 잡아.”
그녀가 무표정인 채로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재준 선배는 어떻게 한 거지?”
“사업하는 사람을 어떻게 움직였겠니. 거래처 몇 개 흔들면 말 듣게 하는 건 손쉬워. 오히려 너 같은 아이들이 어렵지.”
“하는 짓이 좀 치졸한 거 아닌가? 고작해야 학교 동아리 행사를…….”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지. 규모가 작고 크고는 문제가 아니야.”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내가 어떤 지점에서 동요하는지 이 영리하고 사악한 인간은 잘도 꿰뚫고 있었다.
난 그녀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뻗은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잘 생각했…… 음?”
“웃기지 마. 당신들 생각대로 될 것 같아?”
난 준비해 둔 서류를 그녀의 손에 쥐여 준 뒤에, 그녀의 손을 팽개치듯 놓았다.
“안 그래도 내 쪽에서 가기 귀찮았는데 잘됐네. 직접 와 주시다니, 아주 황송할 지경이야.”
“……이게 뭐지?”
“자퇴 신청서다. 이딴 학교, 더러워서 더 다니기 싫으니까.”
난 단호하게 선언하면서, 어제 윤하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 * *
“주현보육원? 이거 길재 형님이 눈독 들이던 거기 아닌가?”
“……그러네요. 어째서 여길……?”
“철저하게 박살 낼 테니 흡수하는 건 알아서 하라네. 거 참, 이런 명령도 다 떨어지네. 잘은 모르겠다만…….”
동부파 남부지구의 김형철은 민둥머리를 벅벅 긁으며 히죽 웃었다.
동부파가 대거 개편되고, 기존 지도부가 싹 갈리는 와중에 처세를 잘 해서 출세한 그였다.
이해는 안 됐지만, 굳이 이해할 생각은 없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수행한다.
개의 이빨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이런 단순하고 영리한 처세야말로 오래가는 비책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뭐, 우리들이야 똘마니 생기고 좋지 뭐. 데리고 올 준비해 둬라.”
“관리하는 고아원에 자리 비워 두겠습니다.”
“밥숟가락만 몇 개 챙겨 둬라. 그분들이 움직인 이상 법적인 문제 같은 거 따질 필요는 없으니…….”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바깥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몇 번 핸드폰이 울리다가 끊겼다.
그가 이상을 눈치채고 벌떡 일어서는 순간.
콰직-!
사무실 문이 경첩째 박살 나면서 안쪽으로 서서히 쓰러져 내렸다.
쿵-!
먼지가 길게 나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