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59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29
콰직-! 사무실 문이 경첩 째 박살나면서 안쪽으로 서서히 쓰러져 내렸다.
쿵-! 먼지가 길게 나풀거렸다.
그리고 누군가 먼지를 뚫고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처진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남자.
그는 가죽점퍼에 묻은 먼지를 짜증스럽게 털며 바닥과 합체한 문짝을 황당하게 내려다봤다.
“야, 뭔 문짝이 이렇게 약해? 내가 멋지게 박차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부서져서 깜짝 놀랐잖아.”
“어, 고장이…… 나서?”
“좀 고치지 그랬냐. 요즘 조폭들 상황이 많이 어려운가 봐?”
“아니 오후 늦게 수리 온다고 했……. 나 근데 왜 대답하고 있니.”
김형철이 잠시 가출한 조폭 정신을 복귀시키며 눈을 부라렸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 부끄럽게.”
“……너, 뭐 하는 새끼야!?”
“뭔 통성명은. 내가 소개팅이나 하자고 온 줄 알아? 자 나 바쁘니까 시간 없다. 하나씩 나눠 줄 테니까 이리 와서 받아가.”
그러더니 가방에서 수갑을 하나씩 꺼내어 방 안 사람들한테 나눠 주는 것이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똘마니들은 얼떨결에 은팔찌를 배급받았다.
“자기 손목에 다들 채우시고. 그거 혼자 끼는 거 어렵지 않으니까 시도해 봐. 정 못하겠으면 얘기하고. 어, 그리고 받으면서 들어. 너희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남자는 자연스럽게 미란다 선언을 읊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웠으면, 오늘 저녁 메뉴가 경찰서 국밥일 것임을 모두가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막내는 짜장면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설레기까지 했다.
“아니! 너 뭐 하는 새끼냐고! 뭐야! 짭새냐!”
“짭새니까 수갑이 있지. 날 뭘로 보는 거야? 나 그런 취미 없다.”
“이 자식이!”
자신에게도 수갑을 들이미는 남자에게 김형철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뒤이어 등뼈를 타고 뻑적지근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김형철은 자신이 팔이 꺾인 채 널브러져 있음을 5초 뒤에나 깨달았다.
“으그으윽……!”
“정 알고 싶으면 말해 줄게. 광수대 이공택 팀장이다. 그리고 내 모토가 러브 앤드 피스거든? 그러니까 평화적으로 가자고. 피 보면 하루 종일 찝찝하단 말이야.”
그러면서 형철의 손목에 수갑을 턱 채운다.
“아악! 뭐해 이 자식들아!! 이 새끼 잡아! 잡으라고오!!”
“으아아아!”
그제야 똘마니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1분 뒤에 형님과 같은 포즈로 엎어져 차례대로 수갑이 채워지는 꼴이 됐다.
이공택 팀장은 한숨만 푹푹 내쉬면서 반복 작업을 이어 나갔다.
“에효, 내 짬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크윽. 네, 네놈 이름 기억했다!”
“암기 잘해서 좋겠네. 시발. 그 기억력으로 대학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냐?”
“우리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지 알아?! 네놈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느냔 말이야!! 네놈은 이제 그 자리 건사하기 힘들 거다! 아주 비참하고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겠지!”
그러자 이공택은 싸늘한 눈으로 놈을 내려다보다, 때리기 좋아 보이는 민머리를 찰싹 후려쳤다.
“아얏!”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말이야. 너네 대체 누굴 건드린 거냐? 대체 뭐기에 우리가 이 지랄을 해야 하는데?”
“……응? 으응?”
“오랜만에 청장님이 으름장을 놓으시는데 말이야. 광수대가 아주 뒤집어져서 총동원됐다고. 여기저기 다 들쑤시느라 야, 팀장인 내가 땅개처럼 구르고 있잖냐. 내가 왜 너네 때문에 이래야 되는데?”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닥쳐, 새끼야. 조폭이니까 뭐라도 잘못했겠지. 뭘 선량한 시민인 척 억울한 표정이야? 죽을라고.”
찰싹 찰싹.
말하다 보니 왠지 열이 치받쳐서, 그리고 치다 보니 왠지 모르게 손맛이 좋다는 이유에서, 이공택은 민머리를 계속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쪽에서 묻자. 너네 대체 뭘 잘못한 거냐? 뭐기에 갑자기 조폭 박멸에, 고아원 감사까지 하룻밤 새에 끝내야 되냐고. 응? 말해 봐.”
“……앗. 아얏. 아, 아파! 아프다고오!”
물론 김형철은 대답할 건덕지가 없었으므로 분풀이는 그 뒤로 길게도 이어졌다.
어쨌든.
같은 시각, 이와 비슷한 일이 수도권은 물론 전국 단위로 벌어지고 있었다.
조폭 사무소가 습격당해 검거 행렬이 줄을 잇고, 전국 37개 보육원에 감사팀이 불시에 들이닥쳐 불법 부정행위를 캐냈다.
폭풍이 지나간 즉시, 기자들이 마이크를 잡고 현장에 깔렸다.
한때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동부파의 건재. 그 밑에서 운영되는 보육원의 반인륜적 실태가 언론에 상세히 보도됐다.
누군가 미리 조사해두고 터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대단히 디테일하게.
그리고 그중엔 주현보육원의 이름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자들은 미담 하나를 보도 말미에 남겼다.
-LS그룹의 장건철 회장은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본을 출자하여 LS사회자선재단을 설립, 불우한 고아들을 전부 책임지고 지원하겠다는 훈훈한…….
* * *
장진욱은 문을 밀치고 방에 들어섰다.
객관적으로는 퍽 점잖은 태도였으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짜증 섞인 다급함을 읽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회장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제는 노크도 않는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장건철 회장의 시선이 건성으로 그를 훑었다. 그가 차분히 대꾸했다.
“일단 앉아라. 처음부터 네게도 말해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는 다시 책상 위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침묵했다.
장진욱은 못마땅한 표정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10분 뒤, 장 회장이 업무를 다 마치고서야, 두 부자는 마주앉아 따가운 시선을 교환할 수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장진욱이었다.
“……제가 건드리지 말자고 했잖습니까. 전 그때 얘기가 제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랬지. 나도 그때는 네 말에 거의 넘어갔었다.”
“그럼 어째서? 기업인으로 남으시라는 제 말이 그렇게나 난해한 요구였습니까?”
“아니, 네 말은 지당하다. 내 힘은 내 돈에서 나오지. 선후 관계를 착오할 정도로 호락하게 살아온 내가 아니다. 굳이 상기해 줄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왜…….”
“그렇기 때문이다.”
장건철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논리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견고한 말투.
장진욱은 이 강고한 거인이 확신 속에서 결정을 내렸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어떤 설득도 무용할 것이다.
맥이 풀린 장진욱이 헛숨을 들이키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일단은 들어나 보자는 심사였다.
장건철 회장이 찻잔을 들어 올리곤 그 안에 작은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향기가 빠르게 산란했다.
“이건 단지 후원이 아니다. 사업가로서 놓칠 수 없는 거래를 한 결과지. 내 말을 다 듣고 나면 너도 이해할 것이다.”
장건철 회장은 어젯밤 늦게 울려온 직통 전화를 떠올렸다.
예술가이자 조언가, 거기에 더해 뛰어난 안목의 경영인이기도 한, 한 청년의 단단한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재생됐다.
* * *
샤오첸은 입가를 매만지며 웃음기를 갈무리했다.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다. 다소 초현실적이던 어제 하루를 떠올리기만 하면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분명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긴 했는데 말이지.’
어제 뜬금없이 걸려온 국제전화.
통화가 끊길 즈음에 비서는 가장 빠른 인천행 항공편을 구해둔 뒤였다.
도착하자마자 꼬박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선 이미 LS의 장회장과 이한열이 논의를 진척 중이었다.
-UI소프트웍스의 그래핀 기술은 추후 산업의 향방을 완벽하게 탈바꿈시킬 겁니다.
이한열은 그 자리에서 그래핀의 기술적 혁신과 파생될 4차 산업의 파동에 관해 피력했다.
열정적인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사실 열정적일 필요도 없는 설명이었다. 장 회장과 샤오첸은 사업가. 저 기술을 선점하는 자가 앞으로 세계경제를 휘어잡을 것임을 둘 모두 직감했다.
그러므로 남은 건 기술적 점검뿐.
LS전자에서 파견 나온 수석 연구원들이 대거 달라붙어 기술의 실현 가능성을 따졌다.
심사는 최대한 엄격하게 진행됐지만, 중간부터는 이 위대한 기술적 발견에 그들 스스로가 매료되어 찬사를 쏟아냈다.
그들도 안 것이다.
역사의 분기점에 자신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 그래핀 생산법은 UI의 원천 기술이고 내놓을 생각도 없습니다. 적어도 아직은요. 하지만 UI 혼자의 힘으론, 산업화를 이끌 역량이 없는 것도 사실.
그래서 이한열은 세 기업의 합작 회사를 제안했다.
젠린과 LS, 그리고 UI소프트웍스.
각 기업이 지분을 30%씩 공유하는 이 회사는 그래핀 기술을 최전선에서 연구하고 관련 상품을 찍어 내게 될 것이다.
샤오첸의 눈에 이 제안은 대단히 담대하고 관대하게 보였다.
좀 더 솔직해진다면, 호구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건 받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이지.’
UI가 완전히 주도권을 쥔 협상이었지만, 이한열은 단 몇 퍼센트의 지분만을 더 챙기는 걸로 족했다. 경영권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였다.
-솔직히 말해, 전 경영 따윈 전혀 관심 없습니다. 제 일이 다 마무리된다면 아예 둘 중 한 분께 회사를 맡길 생각입니다.
담백해 보이지만, 영리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그는 이 한마디로 젠린과 LS에게 충성 경쟁을 붙인 것이었다.
이제부턴 이한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두 기업은 알아서 편의를 제공해야만 하겠지.
말하자면, 그는 중국과 한국을 각각 대표하는 두 기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저 지분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요구가 이거란 말이지. 정말…… 재밌는 친구야.’
LS에게 뭘 요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샤오첸에게 요구한 건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통째로 대절한 커피숍 너머로, 샤오메이와 그 맞은편의 아가씨가 눈에 비쳤다.
샤오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정말 닮았어.’
이한열의 장담이 옳았다.
-UI도 젠린의 입양자 자리에 한 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이제 와선 좀 늦었지만, 잡다한 절차들은 샤오첸께서 무마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뭐, 그쪽에도 나쁘지 않은 얘기일 겁니다. 전 아가씨가 이 친구를 무척 좋아하리라 확신하거든요.
비슷하다.
샤오메이의 사별한 자매인 샤오진과.
특유의 눈짓, 말투,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어쩌면 살아 돌아왔다고 의심될 만큼, 저 배윤하라는 아가씨는 샤오진을 완벽히 닮아 있었다.
그것은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샤오메이 아가씨의 활기찬 웃음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모르겠네…….’
그래핀의 미래 가치와 아가씨의 절대적 총애, 두 조건이 갖춰졌다.
별다른 결격 사유만 없다면, 저 아가씨가 젠린의 일족으로 인정받게 되리란 사실만은 명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