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61화 (161/164)

<재능이 자꾸 늘어 161화>

14. 막을 테면 막아 봐 - 31

* * *

“우왓! 완전 재밌어!”

“그치? 오길 잘 했지?”

“오나전! 우와아아! 오빠! 나 좀 봐 줘어!”

은하가 방방 뛰며 지윤의 팔뚝을 두드렸다.

벌써 팔뚝이 벌겋게 붓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이 두드린 은하의 팔뚝도 못지않게 엉망이었으며, 무엇보다, 기분이 붕 떠 있어서 아픔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 방금 보컬이랑 눈 마주친 듯! 사랑에 빠진 듯?!”

“그건 아닌 듯.”

“아. 갑자기 목소리 왜 식었냐.”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 줘야지.”

어쨌든 강당은 열기로 가득했고 심장은 드럼의 비트에 맞춰 두근댔다.

솔직히 축제 자체는 좀 미지근했는데, 하이라이트인 저녁 공연은 그 모든 아쉬움을 달래 주기에 충분히 화끈했다.

공연의 막간, 은하가 지윤의 등을 탁 치며 물었다.

“근데 네 남친은 왜 안 나오냐?”

“야아. 남친 아니라니까아…… 그리고, 척 봐도 걔랑 내가 상대가 되냐. 클라스 차이가 있지.”

“그건 그래.”

“그래도 너무 빨리 인정하지 말아 줄래? 상처거든?”

그때, 장막이 걷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밴드부로 보이는 일행도 있었다.

“엇! 이제 시작하나 봐! 저기 나온다. 저기.”

“그러네. 오오. 멀리서 봐도 잘생겼어. 뭐야, 조명이 합심해서 쟤만 비추는 거 같아.”

“그, 그러게. 아주 빛이 나네.”

지윤은 그를 보면 가슴이 뛰다가도 가라앉았다.

자신을 보던 그의 눈빛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한테 어떤 관심이 있는데, 그게 여자로서의 관심은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그걸 생각하면 심장이 시큰했다.

그건 뭘까.

연민, 그리움, 오래된 앨범 커버를 쓰다듬을 때에나 보일 법한 눈빛.

그걸 왜 자신에게 보인 것일까.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때 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야, 근데 쟤 기타 들고 있는데? 피아노 같은 거 친다고 안 그랬냐?”

“피아노가 아니라 신디거든? 어, 근데 이상하네. 분명 기타가 아니랬는데…….”

그러나 아무리 봐도 한열은 일렉 기타를 비끄러맨 채로 무대를 오르고 있었다.

두 소녀의 의아함이야 어쨌든, 그는 능숙하게 케이블을 연결하고 앰프와 이펙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 * *

1960년대의 미국은 모순의 용광로 같았다.

호황 속에서 피어난 낙천성.

전쟁의 암울한 전망.

기존질서에 대한 불신.

지표를 잃은 미국인들은 이제 한여름 밤의 꿈속으로 급격히 도피하기 시작했다.

히피 문화의 탄생이었다.

안일한 평화 속에서 모든 종류의 방종이 허용됐다.

폭력과 엄격주의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가 배격되며 반전 운동이 들끓었다.

물질주의는 천시됐으며, 정신을 도야한다는 명목으로 마약과 섹스가 무분별하게 행해졌다.

69년 우드스탁 페스티발은 그런 히피 문화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이자, 찬란했던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들판 이곳저곳에 약과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널브러졌다. 평화를 부르짖는 목소리와 평화롭지 않은 노랫소리가 기묘하게 갈마들었다. 그곳은 길 잃은 자들의 마지막 축제였다.

그 무대에.

지미 헨드릭스가 섰다.

그리고 겹겹이 쌓인 앰프에서 미국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가 흘러나왔을 때, 몇몇 관객들은 어리둥절하게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지미 헨드릭스답지 않다.

멜로디는 단순했고 테크닉은 별다를 게 없었다. 무엇보다, 권위적인 국가를 환호하며 청취해 줄 괴짜 히피들은 이곳에 많지 않았다.

여기는 모든 종류의 권위가 무마되는 자유의 전당이었으므로.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의 과격한 아밍arming이 선율을 뭉그러뜨린 순간, 어리둥절함은 환호성이 됐고 못마땅함은 갈채가 되었다.

단정한 국가가 찌그러지며, 더 이상 선율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뭉개진 굉음이 드라마틱하게 치솟았다.

그것은 전투기의 엔진 소리였다.

폭격기가 쏟아 내는 포효였으며 폭발 후의 잔향이었다.

미국이 자행한 온갖 종류의 폭력들이 ‘자랑스러운’ 국가 속에 스며들어 나란히 연주됐다.

그것은 문명이 야만과 뒤섞여 혼탁해지고 있는, 그 시대의 미국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경지에 오른 한 음악인이, 저 폭력의 세대에 고하는 가장 히피적인 반항이었다.

나는 그때의 지미 헨드릭스를 이곳에 불러 올 생각이었다.

* * *

이전 편곡은 리드 기타를 돋보이는 데 많은 공이 들어갔다.

더하여 빡빡하게 구성된 편곡이었다. 재준 선배와 똑같이 쳐낼 자신이 없다면 시도조차 해선 안 된다. 작은 디테일의 차이가 밸런스 전체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래서, 똑같이 칠 자신이 없느냐고?

설마.

물론 있다.

무려 Rank A급 재능인 것이다. 5분만 연습하면 따라잡는 건 물론이고 그 이상의 퍼포먼스까지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만으로는, 부원들의 분한 마음과 내 각오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난 그 이상을 해내야만 했다.

“……정말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아까 보셨잖아요.”

“아까 그거? 어, 그거 꿈인 줄 알았는데. 진짜 있던 일이었나.”

대기실에서 우리끼리 짧게 리허설을 마친 뒤였다.

수림 선배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박박 비비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큰일이네. 사람이 바보가 됐잖아.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서 뇌가 자동으로 현실 부정 프로토콜에 돌입한 듯했다.

그때 드러머 찬익 선배가 헛헛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어때. 해 보자고. 이렇게까지 방해가 들어오니 이젠 좀 열받네. 우리도 뭐 한 방 먹여 줘야지 않겠냐.”

“어라.”

“엇.”

뭐야 이 사람 갑자기 왜 의젓해졌어.

우리가 뜨악한 눈으로 쳐다보니 그도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뭐 못할 말했냐. 재료는 한열이가 다 준비했고. 연습은 완벽하고. 그럼 어째. 해 버려야지.”

“와, 나 선배가 버젓하게 말하는 거 처음 들어요.”

“……그렇게 말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 입는데, 수림아.”

“아하하. 그래, 그렇죠. 못할 것 없지. 미친 짓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좋아! 해 버리자고!”

이제 완벽히 부활한 수림 선배가 허공에 펀치를 날리며 선창했다.

“오우! 박살 내자!”

“오우우!”

세 명의 주먹이 허공에서 맞닿고 대기실은 한동안 기합소리로 왕왕댔다.

우린 사기충천한 텐션을 품고 무대 뒤편으로 이동했다.

앞선 공연은 거의 끄트머리였고, 복도에는 오케스트라 팀이 줄줄이 늘어서 진입 대기 중이었다.

줄 마지막에 서 있던 말자 씨와 수림 선배의 눈이 마주쳤다.

말자 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감과 의기양양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어머, 리허설 때는 안 나타나더니. 끝까지 안 나타나지 그랬니?”

확실하군.

이 아줌마는 우리 밴드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다. 분명 누군가 언질을 주었겠지.

그게 누굴지는 굳이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이 상황이 언젠가의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수림 선배가 픽 웃으며 반격했다.

“리허설 맨날 피한 건 그쪽이면서. 옛날 일은 다 까먹으셨나 봐요?”

“……윽. 그, 그건 다 일이 있어서…….”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피차 입 다뭅시다.”

“……쳇.”

본전도 못 건진 말자 씨였지만, 이내 날 훑어보며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다.

“흐응, 이제 와서 대타 올린다고 되겠나 싶네. 어디 발악들 해 봐.”

“안 그래도 그럴 테니까 신경 끄쇼.”

“후후.”

그 순간 앞선 팀의 공연이 끝났다.

밴드부 후배들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무대를 내려왔다.

우린 그들을 반기며 하이파이브를 교환했다.

“으아아. 많이 틀린 거 같은데…… 선배, 저희 어땠어요?”

“뭐, 대충 잘했어.”

“대충 잘했다니! 수림 선배가 칭찬했어! 우리 좀 쩔었나 봐!”

참고로 김수림 사전에 기재된 평가 등급은 아래와 같다.

[연가시와 구더기의 끔찍한 혼종 : 더럽게 못함] < [기타 등등 구리다는 표현 10여종] <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 : 그럭저럭임] < [듣기 싫지는 않음 : 잘함] < [대충 잘함 : 꽤 만족스러움]

요컨대 대충 잘했다면 얘네 수준에선 최상의 아웃풋이란 뜻이었다.

내가 듣기로도, 가르친 보람이 있는 공연이었다.

“우리도 질 수는 없지. 가 볼까.”

우린 무대 위에 올랐다.

후끈한 열기가 남은 바닥. 조명은 날카로운 촉처럼 어깨를 찔렀다.

무대 저편, 수백 개의 시선에 쬐인 순간 손끝이 찌릿해졌다.

사지 말단의 핏기가 온통 얼굴에 몰리는 듯했다.

지금 나는 두려운가?

물론 두렵다.

공연은 언제나 내겐 상처였다.

몇 달간 피땀 흘린 노력을 지루한 한숨과 짜증 섞인 시선으로 교환받는 수지 안 맞는 장터였다. 나는 이곳에서 죄스러움과 비루한 자존감만을 얻어 갔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이곳에 서 있다.

떨림 속에 설렘을 품고.

아마도 나는 무대를 떠날 수가 없는 인간인 듯했다.

손아귀를 꾹 쥐었다가, 손을 털며 거기 모인 잡념들도 털어 냈다.

난 기타 넥을 받쳐 올렸다. 제자리에 부착된 부품처럼 손이 기타에 착 달라붙었다.

“준비 됐어?”

셋이서 시선을 교환하고, 마지막으로 찬익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드럼 스틱을 고쳐 쥐었다.

드럼의 시작 신호에 두터운 첼로 소리가 조응하고, 여타 관현들이 그 뒤를 따르며 소리를 점층적으로 쌓아 나갔다.

아리랑의 선율이 매끄럽게 울려 퍼졌다.

원래라면 이 고아하고 품격 있는 오케스트라를 밴드 사운드가 받쳐 올리며 좀 더 복잡하고 묵직한 주제 의식을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쿵쿵, 츳츠츠 두두두-

드럼이 예쁜 오케스트라 사운드 안에 거칠게 난입했다.

섬세한 소리가 모조리 뭉개지고, 그루브하게 당겨 잡은 8비트만이 무대의 중심에 놓였다.

바로 베이스 투하.

컴프레서로 꾹 눌린 베이스가 소리를 밀고 당기며 밑단의 찰기를 더했다. 강약이 순식간에 자리를 뒤바꾸며, 듣는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밀쳤다.

심장을 들썩거리는 플레이.

대단한 실력이지만, 오케스트라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증거로 말자 씨가 깜짝 놀라 지휘봉을 놓칠 뻔했다. 입을 떡 벌리고 미쳤느냐는 시선을 보내 왔지만, 물론 미안하지도 않고 알 바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진짜 깽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우리 무대 위에서 잼을 해 보죠.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내 제안은 그랬다.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우리의 편곡 과정은 대개 즉흥 연주를 하다 괜찮은 것을 건지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저 각각의 세션을 조화시키는 게 어려웠을 뿐.

요컨대 곡의 흐름은 다들 꿰고 있다. 합도 충분할 정도로 맞춰 봤다.

그러므로 단 한 명만 있으면 된다.

제각기의 소리를 실시간으로 통합해 낼 수 있는,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플레이어 한 명만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잼이 아니라 잘 편곡된 연주곡일 뿐이다.

그리고 난 그걸 할 수 있다.

내 손이 프렛보드를 움켜쥔 순간.

구와아아앙-!

기타가 포효했다.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배경으로 밀어내는 강력한 하이게인 사운드. 기타는 필요한 소리만 남겨 두고, 자잘한 것들은 모조리 때려잡으며 강당 안을 독주했다.

그것은 아리랑의 주선율이었다.

바이올린이 멜로디를 읊으면, 그 한 옥타브 위에서 똑같은 선율을 노래하며, 조금씩 뉘앙스를 뒤틀었다.

첼로가 그 뒤를 따라오면, 스탠스를 바꿔 가장 밑바닥의 저음까지 내려가, 소리들을 더 깊고 어둡게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모든 국면에서, 기타는 울고 있었다. 비유라기엔 지나치게 실감나는 소리로-

끄윽, 끄으윽,

악, 아악,

흐윽, 흐으윽-

그렇다.

그건 정말로 사람의 곡성을 닮아 있었다.

아밍과 태핑, 하모닉스가 극적으로 얽힌 날카로운 금속성은, 어느 때는 넋 놓는 절규가 되고 또 다음에는 훌쩍이는 신음을 짜냈다.

찌그러진 아리랑의 선율 속에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삽입됐다.

‘보고 있니. 준.’

네가 기타를 쳐 달라고 말했을 때 나는 잔인하게 잘라 냈다.

네가 겉으로 울지 않았으므로 속으로도 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구해 달라는 네 외침을 외면했다. 나는 나약하고 형편없는 남자였다.

준.

목소리가 둥글고 맑은 아이야.

넌 밑바닥에 붙들려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갈 수 없는 저 먼 곳에 네 노랫소리를 대신 보내었다.

그럼 왜 날 곁에 두고 노래를 불렀느냐.

무지개 저편은커녕 하다못해 반지하 낮은 천장도 되지 못하는 남자에게 어째서 네 노래를 허락했느냐.

‘그러니까.’

전생의 너는 죽고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되돌아왔어도 네 아픔을 나만은 기억한다.

그 어두운 골목에서 내가 널 끄집어내겠다.

너도 살아 있었다고.

살아 있어 행복하고 싶었다고.

그러므로 나는 감히 너를 위해 연주하겠다.

네가 흘리지 못했을 울음을 대신 흘리겠다.

속으로만 썩어 들어간 것들을 힘차게 캐어 내겠다.

그래, 내가 네 삶의 노래에 반주를 더하겠다.

‘들어 줘.’

흐앙, 흐아아앙-

기타가 울었다.

그 언젠가 당신이 삭였을 울음을 대신하여, 서럽고 서럽게 울어 재꼈다.

예쁘게 잘 정돈된 선율은 못생기게 짜부라졌다.

나는 포장된 표면을 일그러뜨려 안쪽의 검은 것을 드러냈다. 안고 있던 고름을 다 짜내고 흘려 냈다.

그저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몇 개의 현악기만이 날 따라와 이 기이한 외과 수술을 도왔다.

그리고

지잉-

마침내 모든 악기들이 멈추고, 내 기타의 비브라토만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얕은 하울링을 들으며, 난 어둠 저편의 어딘가를 보았다.

들어 주었을까. 심하게 늦어 버린 내 사과를 너는 받아들여 줄까.

당연히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그 대신.

한동안의 적막을 뚫고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악!!”

“앵콜! 앵콜! 앵콜!!”

“밴드부 멋지다!”

그리고 난 가만히 눈을 감고 각각의 환호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안에 그녀의 대답도 있지 않을까, 그런 가망이 없는 바람을 떠올리며, 그저 그렇게 서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