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62화 (162/164)

<재능이 자꾸 늘어 162화>

15. 낮은 하늘의 작은 별 - 1

남자는 옥탑방 앞 평상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왔을 적, 서울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공기의 냄새부터 밟은 발밑의 감촉까지 다 새롭고 놀라웠다.

특히 이 빌딩이란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 이장 댁 4층 저택이 아니었단 말인가. 사람이 땅을 밟아야지, 저 높은 데서 멀미 나서 살 수가 있나?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그 꼭대기에서 먹고 자며 잘도 살고 있었다.

“…….”

그럼에도 저 하늘은 변함없이 높았다.

논두렁에서 올려다보나, 높은 빌딩에서 올려다보나, 하늘은 그저 언제나의 하늘이었다. 좀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땅 밑의 사정에 구애받지 않아 여상했다.

그는 어째서인지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은찬아.”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활짝 웃으며 눈길을 내렸다. 한 훤칠한 사내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마 아저씨! 언제 왔어요?”

“지금 올라가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무겁다. 좀 들어라.”

“응!”

은찬이 기철이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어딘가 묵직해서 들여다보니, 역시나 묵직할 만했다.

“으엑.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빈손으로 와도 된다니까.”

“입꼬리는 내리고 말해라. 인마.”

“으헤헤. 어쨌든 고마워요. 저녁 먹고 갈 거죠?”

“그래, 그러자.”

“으히히. 오랜만에 괴기 좀 뜯겠네에.”

은찬이 찬거리와 불판을 내오는 동안 기철은 빗자루를 들어 평상의 먼지를 털어 냈다.

기철은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옥탑방에 들렀고, 그때마다 남매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다. 오래 합을 맞춰온 두 남자의 손이 저녁을 척척 준비해 냈다.

그런 와중 기철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막 개강했지? 대학 생활은 어떠냐. 할 만해?”

“그냥 그렇죠 뭐. 그래도 나름 서울대생이니까 이런저런 점에서 좋더라고요.”

“그러냐?”

“네, 과외 구하기도 쉽…….”

무심결에 흘러나온 말을 황급히 막았다.

그 시절 과외는 불법이었고, 아무리 암암리에 행해진다곤 해도 떳떳이 말한 건 못됐다.

무엇보다 눈앞의 남자는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다. 은찬이 말을 떠듬떠듬 이었다.

“어, 저기, 아저씨. 그게 아니라…….”

“됐다.”

“……그, 미안해요.”

그러나 기철은 은찬 쪽을 보지도 않은 채 태연히 손을 놀렸다.

“됐다니까. 네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과외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 정말?”

은찬이 깜짝 놀랐다.

“모른 척한 거야 인마.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입 조심하고. 단속에 걸리면 나도 힘 못 써 준다.”

“……네, 조심해서 하고 있어요. 미안, 아저씨. 아저씨한테는 폐 안 끼치게 할게요.”

“그럼 됐어. 헛짓거리만 안 하면 된다. 너 데모는 안 다니지?”

“응? 데모는 무슨. 난 주현이 보살피는 것만도 빡세다고요. 그런 건 형편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녜요?”

“그래, 그 주변엔 얼씬도 말아. 혹시라도 말려들지 말고.”

“알았다고요.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은찬은 헛헛하게 웃으면서 옥상 구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등을 보인 채 쪼그려 앉아, 막대기로 바닥을 벅벅 긁어 대고 있었다. 30분째 저러고만 있었다.

“주현이는 어때?”

“뭐 늘 똑같죠. 그래도 요새는 얌전해요. 발작하는 건 많이 줄었어.”

7년 전, 홀로 남매를 키우던 그들의 어미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주현은 실어증과 자폐를 앓기 시작했다.

만약 그때 기철이 두 남매를 보살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은찬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갑자기 또 뭔 소리냐.”

“아저씨 없었다면 시골 촌놈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주현이 병 고칠 생각도 못했겠죠. 다 아저씨 덕택이에요.”

은찬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것도, 훗날 정신과 전문의가 되어 주현을 더 잘 보살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철의 백업이 없었다면 대학이란 선택지는 생각조차 못했겠지.

그는 모든 면에서 두 남매의 은인이었다.

“자식이 낯 뜨겁게. 됐으니까 빨리 불판이나 꺼내와.”

“넵.”

은찬이 싱글벙글 웃으며 찬장에서 불판을 꺼내와 버너 위에 올렸다.

평상이 왁자지껄 시끄러운 와중에도 소녀는 그대로였다. 아예 공간이 단절된 것처럼, 콘크리트를 파내는 데만 전념하고 있었다.

기철은 그걸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깜빡할 뻔했네. 네가 말한 거 가져왔다.”

“예? 뭐요?”

“그 뭐냐, 음악 치료? 그거 시도해 본다고 했잖냐. 오다 하나 사 왔다.”

기철이 품에서 꺼낸 건 자그마한 오카리나였다.

싸구려 플라스틱이 아니라 사기를 구워 만든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윤기가 반들반들했다.

“와 예쁘다. 주현이도 좋아하겠어요.”

“글쎄다. 쟤가 좋아하면 그게 티가 나나?”

“에이, 당연하죠. 겉보기엔 똑같아도 눈 돌아가는 게 다르다니까요. 그리고 아저씨가 사 주신 거잖아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은찬은 소녀에게 다가가 작은 등을 툭툭 두드렸다.

“주현아. 이거 봐라. 마 아저씨가 선물 사 왔다.”

그러자 소녀가 땅을 쑤시던 손을 덜컥 멈춰 세우며, 고개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자신의 몸을 돌리는 게 아니라, 마치 몸 밖의 공간을 통째로 옮겨 앞에 세워 두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 * *

잠에서 깼다.

그리고 천장에 시선을 둔 채, 한참 동안 방금의 기묘한 꿈에 대해 생각했다.

‘그거 뭐였지?’

처음 보는 곳. 80년대 서울의 정경. 젊은 얼굴의 원장선생님. 그리고 아마 지은찬으로 생각되는 젊은 남자.

꿈으로 착오하기 힘든 그 특유의 생동감은 내겐 낯설지 않은 것이다.

타인의 카르마에 접할 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다른 점은, 인생 전체를 빠르게 조망해 온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한 장면만을 뚝 떼어 내어 잠깐만 비치고 사라졌다.

“……흠.”

난 서랍에서 미완성의 오카리나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그 표면으로 옅은 금빛의 카르마가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거의 다 완성됐기 때문에 일부의 단상을 엿볼 수 있게 된 걸까.

뭔 체험판이냐. 더 보고 싶다면 유료 결제를 하란 거야 뭐야.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알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품에 오카리나를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미안, 그 뒤로는 아예 연락이 안 돼. 아예 연락처를 바꾼 거 같은데. 그래서 난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렇습니까…….”

천호 보육원의 원장선생님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올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아쉬울 건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지 쌤은 아예 연을 끊을 생각인 모양이네요.”

“……아마도.”

줄곧 보육원에 폐를 끼친다는 자각에 시달려왔던 그녀였다.

그리고 이번 입양 소동으로, 자신과 연관되면 다 엉망이 되리라는 확신이 생기셨던 모양이다.

‘순진한 생각이지.’

이대로 연을 끊으면 저쪽에서 그렇게 납득하고 이쪽에 간섭을 안 해 올까?

설마.

심플 효율 간결이 모토인 그녀로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사람이란 동물은 아무 이득이 없어도, 이를테면 화풀이하는 데에도 전력을 들이곤 하는 종자다.

따라서 단순한 물리적 거리 두기는 이 경우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이건 그냥…….

‘도피일 뿐.’

하지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는 이해도 공감도 충분히 됐다. 그러니까 삼촌도 현지 쌤의 행방을 숨기는 거겠지.

돈을 들여서라도 그녀를 찾고 싶다는 충동이 들끓었지만, 간신히 진정시켰다.

“현지 없으니까…… 보육원이 아주 엉망이야.”

“그런가요.”

“특히 애들이 힘들어해. 단체로 금단 증상 걸린 거 같다니까.”

난 전적으로 이해했다.

쌤한테 보살펴지는 그 느낌은 마약보다 중독적이지. 암.

“아무튼 알겠습니다. 현지 쌤 보게 되면 제 쪽에서도 설득해 볼게요.”

“그래, 부탁할게.”

“아, 그리고, 앞으로 LS사회자선재단에서 정기적으로 후원이 들어올 겁니다. 거기 제 돈도 들어 있으니까 잘 써 주세요.”

“……안 그래도 얘기 들었어. 갑자기 웬 호재인가 했는데, 네가 손 써 준 거구나? 고맙다, 얘.”

웃는 낯의 그녀에게, 난 정색하고 가타부타 요구 사항부터 꺼냈다.

“고마우면 가장 먼저 응접실 차부터 바꾸세요.”

“……으응?”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저건 진짜 아닙니다. 세상에. 애들 녹찻물로 세수시키고 발도 닦이고 재활용하는 김에 응접실에 내는 건가요? 곰팡이를 우려도 저거보단 낫겠네!”

“그, 그렇게 최악은 아니지 않니?”

“그렇게까지 최악입니다.”

원장 선생이 시무룩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본디 진실은 천호보육원 응접실 녹차만큼이나 참혹한 법이었다.

* * *

다음에 방문한 곳은 법무법인 강의 로펌 사무실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연희재 변호사와 로펌 대표가 격렬하게 논쟁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니 왜 못한다는 건데요?”

“그게 말이다, 이 아빠도 사정이란 게…….”

“사정은 무슨 사정. 그냥 연수원 선배들 눈치 보이는 게 거북하고 싫다고 말해요.”

“희재야, 그건 말이 너무 좀…….”

“말이 좀 뭐요! 다 맞는 말이잖아!”

“아니 그게…….”

“쫄보! 뱃살 부자!”

“……어렸을 땐 참 귀여웠는데…… 그리고 뱃살은 상관없잖니?”

정정한다.

그냥 아빠가 딸한테 엄청 까이는 중이었다. 연 변호사가 독설을 쏟아 낼 때마다 중년의 남성은 5cm씩 쪼그라드는 듯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문가에 선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아, 은인님 오셨나요. 어서 들어오세요.”

시베리아 찬바람이 봄철의 훈풍으로 변신하는 기적이 실시간으로 목격됐다.

여자의 얼굴이란 저렇게 빠르게 변할 수 있는 건가.

어디 스위치 같은 게 숨겨져 있나?

“안 그래도 대표님을 갈구는…… 아니, 설득하는 중이었어요. 이미 80퍼센트 정도는 넘어왔답니다.”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쨌든 발바리 항소에 대한 건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연 변호사가 밑 작업을 잘해 뒀으니 이제 요리만 잘하면 되는 거렷다.

나는 사무실 안으로 안내받아 반쯤 곤죽이 된 대표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이한열이라고 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법무법인 강의 연백연 대표라고 합니다.”

곤죽은 순식간에 번듯한 미중년이 되어 내 악수를 받았다.

뭐야, 이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우디르 특성 교육 같은 거라도 받나.

뭐가 이렇게 다들 휙휙 바뀌어? 물론 그 변신의 이유는 연희재 변호사와 반대였다.

연 대표는 웃는 낯 속에 이글대는 눈빛을 숨긴 채 잡은 손을 공격적으로 쥐어짰다.

평가하건대, 살짝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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