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자꾸 늘어 163화>
15. 낮은 하늘의 작은 별 - 2
연 대표는 웃는 낯 속에 이글대는 눈빛을 숨긴 채 잡은 손을 공격적으로 쥐어짰다.
평가하건대, 살짝 간지러웠다.
물론 마주 힘을 주어 기선 제압을 하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뭐랄까, 아무래도 미워할 수가 없는 남자였다.
중후한 외견과 사회적 위치와는 별개로 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찐따의 향취가 느껴졌다.
머저리는 혐오해도 찐따는 연민으로 품어 안는 게 사람의 도리였다.
내가 별 반응 없이 싱글싱글 웃고만 있자 그가 멋쩍게 나를 안내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우린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차가 양쪽에 세팅되고 우리 둘만 남았을 무렵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희재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도 연 변호사님께 간단하게 들었습니다. 사건을 맡는데 애로 사항이 있으시다고.”
“예,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 사건은 맡을 수 없습니다.”
“이유를 자세히 들어도 될까요?”
“자세할 것도 없습니다. 이 사건을 법조계의 거성들이 탐탁찮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맡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죠.”
“그런 법조계의 사정까지 포괄한 총괄적 케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서 이곳에 맡겼습니다만.”
“죄송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단호하다.
거절은 이미 결정 사항이고 말은 그저 통보로만 사용됐다. 설득의 여지는 종잇장만 한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 사건을 이곳에 반드시 맡겨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LS법무팀에 의존할 수는 없다.’
장건철 회장의 도움을 받는다면 일은 어떻게든 진척될 것이다.
하지만 LS법무팀은 보안경호팀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경호팀은 내가 없었다면 그대로 사내 정치에 휘말려 사라졌을 운명.
그들을 반쯤 내 사조직처럼 부릴 수 있는 건 우리가 헤쳐 온 공통의 전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무팀은?
그룹의 일도 아닌 일에 계속 동원된다면 반드시 얘기가 나올 거다.
적들이 그 점을 파고든다면 나로선 해 볼 여지가 적다.
‘경호팀에게조차 스파이를 심어 넣던 놈들이다. LS그룹조차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컨트롤하기 용이하면서, 최소한의 유능함이 보장되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더 크고 자금력과 인맥이 빵빵한 로펌이라면 많다.
하지만 위의 조건을 당장 갖추는 대상은 이곳 외에는 찾기 힘들었다.
‘이 로펌은 어쨌든 내 제안을 거절했다. 역으로, 그 사실이 신뢰를 주었지.’
만약 놈들과 일말의 커넥션이라도 있었다면 오히려 제안을 받아들였겠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갖은 이유를 들어 소송을 지연시키거나 정보를 빼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겠지. 적어도 나라면 그랬을 거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은 신의 성실의 이유에서 내 제안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난 이들을 잡아야만 했다.
“연희재 변호사에게 대강의 얘기를 들었으리라 생각은 합니다만…….”
나는 준비해 둔 서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일단 보시고 얘기하시죠.”
그는 여전히 미심쩍은 태도였지만 순순히 서류를 꺼내어 훑었다. 서류의 낱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그 안에는 이번에 새로 세울 합작 회사의 법률 자문 및 소송 일체를 법무법인 강에 조건부로 맡긴다는 내용의 계약서가 들어가 있었다.
‘그동안은 못 믿었겠지.’
연희재 변호사에겐 해당 내용을 미리 말해 뒀다.
그녀는 물론 믿었지만, 연백연 대표가 초면인 날 믿어 줄 이유는 전혀 없다.
고아 한 놈이 두 대기업을 주무를 권한이 있다면 나라도 웃기지 말라고 코웃음을 쳤을 거다.
하지만 장건철 회장과 젠린 본부장의 직인이 직접 찍힌 계약서라면 어떨까.
“……이게 진짜였단 말입니까?”
“연희재 변호사의 말을 못 믿으셨습니까?”
“제 딸은 탁월한 사기꾼이죠. 제가 그 애한테 몇 번을 속았는지 아십니까? 변호사 안 됐으면 저 말빨로 나라를 뒤집어엎었을 아입니다, 쟤가.”
아니 딸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음, 위조된 문서는…… 아닌 거 같군요.”
“이제 생각이 좀 바뀌십니까.”
“그거야…….”
“이 회사의 미래가치를 짐작해 보시죠. 제안만 받아들인다면, 법무법인 강은 이제 국제적 거물들을 상대하게 될 겁니다. 이 작은 땅에서 쥐꼬리만 한 권력과 인맥만 믿고 콧대 세우는 노인네들? 그자들은 당신 뒤꽁무니만 보게 되겠죠.”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일이죠. 저울 반대편의 무게추가 이 정도라면,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해 볼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표님도 딱히 안전 지향적인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음.”
연 대표가 눈살을 지그시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이력을 미리 살펴본 바, 어떤 고민이 있을지 짐작이 갔다.
젊은 시절, 패기 넘치던 검사였던 그는 선배 검사의 부패를 파헤치고 기어코 콩밥을 먹이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동료를 저격했다는 힐난 속에서 조직을 떠나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거래를 하신 듯해요.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 대가로 ‘얌전히’ 나가게 해 주겠다고.
연희재 변호사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뭐, 흔한 일이다.
그는 이 땅의 깊은 어둠을 봤지만, 안쪽은 건드리지도 못한 채 잔챙이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지금의 모험은 그때의 선택을 번복하는 일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두 배의 부담감이 있겠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안…….”
“그럴 줄 알고.”
그러므로 난 두 번째 서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뭐, 뭐가 계속 나오는군요.”
“한번 확인해 보시죠.”
그건 20년 전, 그가 건드렸다 실패했던 조직의 치부에 관한 리포트와 그 관계자들의 신상 명세들이 아주 자세히 나열돼 있었다.
당연히 지난 20년간, 그들은 본분대로 악덕을 착실히 쌓아 왔고,
그건 그대로 놈들의 약점이 되었다.
저 자료는 LS보안팀이 재료를 제공하고, 내 미래 지식으로 조리된 맛깔난 성찬이었다.
“……이건.”
“몇몇은 아직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죠. 하지만 그들은 신이 아닙니다. 밀면 쓰러지는 평범한 인간들일 뿐이죠. 어떻습니까.”
난 상체를 숙여 그와 눈을 마주쳤다.
“법조계의 방해가 있다고 했습니까? 당연히 있겠죠. 그리고 절 막는 그자들은 대표님도 잘 아실 그런 놈들일 겁니다. 당신을 굴욕적으로 밀어낸 자들. 그러고도 뻔뻔하게 자리 차지하고 잘 나가는 버러지들. 전 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지나갈 겁니다. 제겐 그럴 능력도 의지도 있습니다.”
“…….”
“그러니까 이건 제 쪽에서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제 곁에 있으신다면, 대표님은 당신의 과거를 스스로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탐나지 않으십니까.”
동서고금 남녀노소, 복수와 사이다는 언제나 통하는 법.
난 이것이 그를 모험길로 나서게 할 결정적인 트리거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차분한 안색으로 날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묘한 눈빛. 거기엔 결심을 내린 자의 부동심도, 세태에 적당히 부합하려는 가벼움도 없었다.
내 [눈치]가 빠르게 그의 기색을 훑었다.
뭐지,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만 같은 이 감각은…….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희재와는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아?”
뭐야, 뜬금없이 갑자기 뭔 소리야. ……이거 설마 그건가?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
“희재가 당신 일만 엮이면! 안 그래도 없던 귀염성이 아예 증발해 버리고! 요샌 애교도 안 부려 주고! 맨날 일 하라고 닦달만 하고!”
뜬금없는 급발진.
이게 그 딸바보 아빠의 ‘내 딸을 가져가려면 내 시체를 밟고 가라’는 그 상황인 건가…….
그러나 [눈치]가 밝혀낸 진상은 그것과도 거리가 있었다. 난 혼돈의 기운을 직감하고 반사적으로 침음했다.
“그러니까 구박만 받는 건 싫단 말이야! 내게 착한 딸을 되돌려줘! 당신이 엮일수록 희재가 무서워진다고!”
그렇군.
내가 처음에 맡은 찐따의 향기는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 어쩌면 난 완전히 잘못 짚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날 이런 살벌한 일만 시키니까 애가 거칠어지잖아! 원래는…… 어, 원래도 착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애교도 부리고 그랬는데!”
“…….”
뇌내의 잘못된 데이터베이스가 수정된 순간 대응책은 자연히 도출됐다.
이미 수단은 마련되어 있던 것이다.
난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희재 변호사에게 상황을 대충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화상이!”
연희재 변호사가 격분하여 사무실로 돌진했고-
30분 뒤, 배후의 살벌한 눈에 감시받는 가운데, 연 대표는 거의 울먹이면서 내가 내민 계약서에 사인하는 처지가 되었다.
구도와 분위기가 을사늑약에 날인하는 상황과 대단히 흡사했다.
이완용의 기억을 엿본 입장에서 말하건대 진심으로 그랬다.
“역시 은인님이십니다. 이 일로 더 돈독한 관계가 되었으면 하네요.”
연희재 변호사에게 미소로 배웅 받으며 나는 로펌의 자동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 순간 드는 의문.
그럼 나 여기 안 왔어도 되지 않나?
가만히 놔뒀으면 연 변호사가 알아서 갈궈서 다 받아 왔을 거 같은데?
* * *
“윤윤. 이건 어때?”
“안 돼. 언니는 몸이 여리여리해서 이렇게 거창한 건 안 어울려. 이걸로 입어.”
“진짜? 이게 이뻐?”
“그래그래, 완전 선녀네 선녀.”
“으흫. 으흐흐흫. 앗, 저거 윤한테 어울릴 거 같아! 저거 보러 가자.”
음, 괜히 왔나.
모두 알다시피, 여자들은 쇼핑에 돌입한 순간 인격이 돌변하며, 스팀팩 투여에 버금가는 전투력과 집중력을 발휘한다.
그런 여자가 둘 이상이 모이면, 그 시너지는 기하급수적 상승 곡선을 그린다.
그 순간만큼은 절대 남자가 여자를 이길 수 없으므로 조속한 퇴각을 권한다.
“이건 어때?”
“응, 버려.”
“꺄하핫! 윤윤이 매정하게 구는 거 완전 좋아!”
“언니도 성격 참 이상하네.”
메이는 평소보다 훨씬 들떠 있었고, 윤하는 그런 그녀와 균형을 맞추듯 차분했다.
근데 너네 언제 애칭이 붙고 말도 놓고 다 한 거냐.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지 않았나.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철없이 달라붙는 언니와 귀찮아하면서도 착실히 받아 주는 동생의 구도는 그녀에게 그립고도 각별할 것이었다.
“…….”
찰싹 달라붙어서 쉴 새 없이 조잘대고, 건드릴 때마다 자지러지는 웃음이 터졌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가 수없이 남발됐고, 그때마다 경호원들의 손엔 쇼핑백이 몇 개씩 늘어났다.
두 소녀만 동떨어져서 꺅꺅대는 느낌이지만, 뭐, 나도 기분이 퍽 나쁘지는 않았다.
‘좋아 보이네.’
둘을 대면시킨 순간 게임은 끝났다.
메이는 절대로 윤하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젠린의 영애의 절대적 총애.
이 몇 마디의 말은 그 자체로 신뢰도 높은 안전 보증서다.
이제 배윤하가 노려질 확률은 없다고 봐도 좋겠지. 한 숨 덜어 낸 기분이었다.
“아가씨가 정말 즐거워 보이는군. 이런 모습은 참…… 오랜만이야.”
젠린의 본부장 샤오첸이 흐뭇한 미소로 말했다.
“자네에게도 고맙다고 말해야겠군. 저런 아가씨를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건가? 내가 봐도 깜짝 놀라겠는데.”
“그러게요.”
“그리고 합작 회사 건도, 내부 심사 결과가 아주 긍정적이야. 우리 쪽 사람들도 자네 회사의 기술력에 깜짝 놀랐어. 이변이 없다면 이대로 확정되겠지.”
“좋아요. 조만간에 장 회장님하고 또 뵙죠. 세부적으로 논의할 게 남았으니.”
저번의 밀실 합의로 대강의 청사진은 잡혔지만, 사업은 대강 해서는 안 되지.
이제부터 소수점 단위까지 파고드는 진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물론 날 사이에 둔 젠린과 LS사이의 전투이므로 둘이 열심히 부딪힐수록 나로선 이득이다.
뭐, 아무나 이겨라.
그때 메이가 화장실로 향하고, 배윤하가 땀을 닦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그녀가 주변 눈을 살피다 내게만 귀엣말로 속삭였다.
“근데 저 아가씨 완전 쉬운 듯. 뭔 말만 하면 자지러져.”
“이 사람들 한국말 못하니까 그냥 말해도 되는데.”
“혹시 모르잖아. 내 말 다 녹음해서 나중에 막 추궁하면 어떡해.”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하겠냐…….”
배윤하는 필요에 따라 인맥을 쌓는 프로 마당발이므로 환심 사는 일만큼은 경지에 이르렀다.
샤오메이 같은 순진한 아이는 식후 디저트로 뚝딱이겠지.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윤하도 메이가 꽤 마음에 드는 투였다.
꾸며낸 것 하나 없는 맑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역시 둘은 잘 어울렸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건넨 한마디에 그녀의 표정이 팍 어두워졌다.
“그 뒤로 상진이한테서 온 연락은 어쩌고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