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이 자꾸 늘어-164화 (164/164)

<재능이 자꾸 늘어 164화>

15. 낮은 하늘의 작은 별 - 3

“그 뒤로 상진이한테서 온 연락은 어쩌고 있냐?”

그녀의 표정에 순식간에 몇 개의 감정이 떠올렸다 지워졌다.

안타깝지만 그중 긍정적인 것은 없었다.

그녀가 태연한 척 말했다.

“그냥 그렇지 뭐. 난 괜찮아.”

괜찮지 않군.

그녀가 얼버무린 말 속에 숨긴 것들을 상상해 보았다.

배윤하는 그날 이후 학생회에서 오는 모든 연락을 씹어 버리고 있었다.

당연히 학생회 행사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은 그냥 차단했지만, 상진이의 것은 차마 그러지 못한다.

꺼 두었던 핸드폰을 껐다 켜 보면 거기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가득하다. 의구 어린 애원, 절절한 호소가 활자에 뚝뚝 묻어 있다.

답장을 작성하려다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므로, 켜뒀던 메시지 창을 한참 응시하기만 하다 다시 핸드폰을 꺼 버렸다.

그게 며칠이고 반복됐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했으므로 나 외에는 아무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다.

“……알겠지만.”

“알아. 지금은 때가 아니란 걸. 충분한 힘을 갖추고, 그리고 모든 게 명확해지면, 그때 뭐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겠지. 지금은 참아야 할 때야.”

“그래. 힘들겠지만 고생해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으. 그만해. 네가 느끼한 말하면 소름이 돋는단 말이야.”

배윤하가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풋 웃었다.

그러면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나는 최선을 다해 느끼해지기로 했다.

“걱정 마렴. 해 뜨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 지금만 지난다면 찬란한 아침이 찾아올 거란다. 힘내자.”

“그, 그만해.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있어…….”

“자신을 못 믿겠다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

“……너 그런 말 어디서 연습해 오니? 아오. 네 혓바닥 시추하면 원유가 줄줄 뽑혀 나오겠다, 야. 국익 증진을 위해 추진해 보는 게 어때.”

서로에게 딜을 먹이다 보니 수심 가득하던 표정도 슬슬 풀렸다.

결국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겠지.

그런 중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정말 원장 쌤은 어딜 가신 걸까?”

“……글쎄다.”

나야말로 알고 싶은 사실이다.

“사람 풀어서 조사 중이니까, 뭐든 나오겠지. 기다리고 있어봐.”

“알았어. 근데…….”

장 회장이 해 준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그는 은퇴한 사냥개 중 한 명일 것이다.

꿈에서 본 사실에 조합해 본다면, 전직 국정원 요원쯤은 되겠지.

조사한다고 꼬리를 쉽게 잡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하겠다.

윤하는 이 주제를 더 끌고 가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알고 싶지만, 더 알게 될 것이 두렵다.

윤하도 나도 그런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지. 좋든 싫든, 모든 게 다 밝혀질 테니까.’

그리고 그 시기는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때 샤오메이가 화장실에서 복귀했고, 배윤하는 남아 있던 일말의 근심까지 지워 내고는 도도한 미소를 띠웠다.

그리곤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벗어 내게 건네는 것이다.

“야, 이거 좀.”

“뭔데.”

“대기업에서 오셨다는 찍사들 수준이 다 별로야. 네가 솜씨 좀 부려 봐.”

픽 웃으며 받아들자, 그녀가 손을 붕붕 흔들며 메이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언니, 우리 이제 화장품 보러 가자!”

나는 저편의 정경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았다.

렌즈가 포착한 둘의 모습은 영락없이 우애로운 한 쌍의 자매였다.

* * *

“사무실은 깔끔하고 좋네요.”

“그쵸? 나름 엄선해서 준비해 뒀어요.”

“근데 여기 페이퍼 컴퍼니로 쓴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나치게 잘 꾸며 놨는데?”

“으응으응. 아니에요.”

내 말에 이정숙이 고개와 검지를 동시에 좌우로 흔들었다.

같이 다니다 깨달은 건데, 그녀는 이런 보기 드문 제스처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 누가 검지를 까닥인단 말이야.

타고난 끼가 없으면 그냥 오글거릴 일도 그녀가 하면 자연스럽다.

“여기 실제로 사용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뭔가 생각해 둔 게 있나 보네요.”

“유튜브 같은 걸 해 보면 어떨까 해서요.”

오, 이건 좀 놀랐다.

“그래요? 흥미롭네요. 말씀해 보시죠.”

“이번에 LS보안팀에서 일하다가 확실히 알게 됐어요.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그 정도의 정보 조직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아요. 조직력. 꾸준한 정보처와 인맥들……. 그런 건 시간을 차분히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죠.”

“그렇겠죠. 그래서?”

“제 장기를 살려서, 프로파일링 및 추리를 주제로 한 채널을 만들어 볼까 해요. 유명해진다면, 그 자체로 꾸준한 제보처가 하나 생기는 거죠.”

“흠.”

잠시 유튜브를 했을 때의 장단점을 따져봤다.

물론 난 전생을 아니까 성공하리란 건 확신했지만, 몇 가지 짚어 볼 점은 남아 있었다.

“이것도 단기간에 될 일은 아니란 건 아시죠?”

“물론 그렇죠. 하지만 다른 방법들 보다는 빠를걸요? 이건 적어도 하기에 따라 빠르게 성장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겠죠. 음.”

유튜브 알고리즘이란 게 별다른 게 아니다.

검색 기록을 분석해서 대중의 관심사를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바람이 불지, 대중의 눈이 어디로 향할지를 제대로 꿸 수만 있다면…….

‘뭐야. 내가 가장 잘 아는 것들이잖아.’

미래 지식이 있으니까. 유튜브 알고리즘의 순풍을 가장 먼저 받아 뜰 키는 내 머릿속에 있었다.

난 내심 수긍했지만, 허가는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 그러면 정숙 씨의 얼굴이 노출될 겁니다. 그러면 정보 수집을 하는데 애로 사항이 생길 수 있어요.”

“……음? 제가요?”

“네?”

“어?”

우린 상대의 멍청한 표정을 통해, 각자가 착각하고 있는 지점을 깨달았다.

“난 사장님이 직접 하시는 걸 염두에 뒀는데요. 우리 중에 얼굴이 가장 되시잖아요. 예쁘고 잘생기다고 뜨리란 보장은 없지만, 확률은 확실히 늘어날걸요.”

“전 당연히 정숙 씨가 할 거라고…….”

“꺄하핫. 사장님 재밌으시네. 이런 아줌마가 하는 채널을 누가 봐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도 뜰 땐 뜨는 게 유튜브지만, 역시나 마이너한 시장이라고요.”

그녀가 웃는 입을 가리며 다른 팔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당신이 해도 잘만 뜨던데. 전생에서 보고 왔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사장님은 이미 얼굴이 팔리시기도 했고.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안 돼요. 한가하게 그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하려면 확실히 해야 되는데, 시간을 제때제때 뺄 자신이 없어요. 한두 번 게스트로 출연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리고 이런 건 끼가 있어야 한다고요. 전 그쪽은 완전 젬병입니다.”

“음,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유튜브 건은 보류?”

잠시 입을 다문 채, 우린 군청색 벽지와 카페 분위기로 완성된 인테리어를 감상했다.

원래는 여길 페이퍼 컴퍼니로 만들 작정이었다.

중국계 유령 기업으로 만들어, 누군가 우리가 추적하는 걸 깨닫고 역추적을 했을 때 시선을 분산시킬 목적.

샤오첸의 도움하에 꽤 많은 공이 들어간 작업이다.

하지만 역세권에 잡은 장소를 그렇게 써먹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 그럴 듯하게 꾸며 놓은 걸 보니, 확실히 그녀의 제안이 구미가 당겼다.

좋아.

안 그래도 너무 트인 곳에 유령 회사를 놓기 불안했는데 잘됐네.

“일단 준비는 해 두죠. 발상 자체는 좋은 거 같아요. 빨리 성장시킬 가닥도 제법 잡히고.”

“어머, 진짜요?”

“대신 유튜브만 전담할, 뭐랄까요, 바지 사장? 얼굴마담? 그래요. 얼굴마담은 따로 고용해야겠네요. 정숙 씨도 저도 안 된다면…….”

음,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네.

정 안 되면 이정숙을 내세워도 좋다. 유명해지면 은밀한 수사는 불가능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반대로 정보 수집이 좀 더 수월해진다는 장점도 있다.

현대에 진짜 셜록 홈즈가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라. 너도나도 협력하고 싶어 안달이 날걸.

어차피 잠복수사 같은 게 필요하면 다른 인력을 구해 굴리면 된다.

그때 이정숙이 마침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말 나와서 말인데요, 저희 조직 사람이 너무 없어요, 사장님.”

“……아무래도 그렇죠?”

그러고 보니 한 번 정비할 필요가 있겠네.

생각해보면 우리 정보 조직은 이름도 없고, 직원도 조직도 상으로만 존재하는 은형욱을 제외하면 이정숙밖에 없다.

그동안은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외주 주고 돈 쏟아 부어서 해결했지만, 계속 이러면 곤란하지.

이정숙이 비상식적으로 유능해서 내가 주문한 정보를 턱턱 물어오는 거지, 보통이었다면 파업이 일어나고도 남을 근무 조건이었다.

“안 그래도 생각해 둔 게 있었어요.”

이제 인재를 영입하며 조직을 확장시킬 때도 되었다.

* * *

“잘 들어! 기선 제압을 팍 해야 된다고! 만만해 보이면 만만한 대우만 받는다! 기개를 보이면 어려도 인정받고 처우가 결정된다! 우리가 기어 다니면서 앵벌이를 할지, 형님 밑에서 여유롭게 심부름이나 하며 살지는 첫 만남에 정해지는 거야! 알았어?!”

한 소년이 식당에 모인 서른 남짓의 아이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소년의 미간에는 깊은 흉터가 사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지만, 눈빛들만큼은 소년의 그것을 닮아 열기를 띠었다.

그동안 소년이 보인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한 달 치 운영비가 통째로 분실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한 소녀가 범인으로 지목됐고, 누명이란 걸 모두가 알았지만 두려움 속에서 침묵은 지켜졌다.

진범은 최고참이었고 형님들과 친분이 깊었으니까.

그럴 리 없다고 분개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때의 일로 미간의 깊은 흉터가 남았지만, 소년은 직접 증거를 내밀어 진범을 추려 냈으며, 형님 중 한 명이 그 기개를 높이 사 아이들 전원의 처우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강민철이란 이름의 소년은 고아들의 영웅이었다.

“소리 좀 그만 질러. 너 맨날 그러고 다음날 고생하잖아. 목도 약하면서.”

“사내는 질러야 할 때 질러야 하는 법.”

“어휴. 땀 뻘뻘 흘리면서 허세는.”

소녀는 뚱한 표정이었지만, 수건으로 소년의 이마를 훑는 손길은 섬세했다. 가현이란 이름의 그녀는 누명 쓴 소녀였다.

손수건에 순순히 닦여지면서, 민철은 팔짱을 낀 채로 입구를 노려보았다.

형님들이 다 잡혀가고, 앞으로는 풍족한 후원하에 생활할 거란 얘기가 들려왔지만, 민철을 비롯한 아이들은 그런 형편 좋은 미래를 순진하게 믿지 않았다.

분명 다른 조직에 흡수된 상황을 그런 식으로 포장한 거겠지.

첫 만남에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야 한다.

분명 팔다리 한둘은 부러지겠지만 얕보이는 것보단 훨씬 낫다. 조폭은 배짱을 먹고 사는 종족인 것이다.

문이 벌컥 열린 순간 민철은 외쳤다.

“눈에 힘!”

“힘!”

“……쯧쯧, 남자들이란.”

* * *

기대했던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눈들 활활 타는 거 보게. 저거 다 모아서 화력 발전을 돌려도 되겠네.

난 픽 웃으며 가장 앞장서서 눈에 힘주고 있는 놈을 마주 보았다.

강민철. 내 영입 대상 1순위.

오랜만이구나, 쌍문동 아르센 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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