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오래된 약속
“이이제이도 아니고······. 신박한 방법이기는 하다. 근데 저거 괜찮은 거냐? 원래 NPC들은 다 저런 게 가능해?”
“아냐. 아마 저놈만 가능한 걸 거야.”
“고문 전문가라서?”
핏불킹이 물었다. 그러자 카시마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대충은.”
“좀 자세히 이야기 해봐.”
“자세히 알아서 뭐하게. 형 이번 퀘스트에 끼어들 거야?”
“무슨 퀘스트인지 감이 안 와서 그래.”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닌 분이 관계된 퀘스트.”
“그니까 아까 네가 말한 제국의 고위층이 누군데. 고위층이라고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아.”
“안 듣는 게 좋아.”
“야. 그냥 말해봐. 궁금해서 그래.”
“오셔널. 성이 오셔널이야.”
“오셔널이면 황족이네?”
“어.”
“그랬군.”
“별로 안 놀라네?”
“제국에 썩은 곳이 한두 군데냐? 대충 감은 잡고 있었다. 그래서 넌 저놈 뒤에 있는놈도 잡아보려고? 퀘스트 받은 거야?”
“몰라. 일단은 간만 본 거야. 문제는 저 물건들이네. 난 경험치만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게 나와서 말이야.”
“물건은 정확하게 나누고 있어. 근데 장물 개념이라 혹시 모르니까 당장 풀지 말고 가지고만 있으라고 말해두었다. 창고에다 넣어두면 문제는 안 생길 테니까. 어차피 마법 아이템 같은 것들도 아니니까 딱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을 거야.”
이번 대스 해적단 소탕에 참여한 유저들은 평균적으로 레벨이 다섯 단계나 올랐다. 평균적으로 다섯 단계나 올랐다는 건 그보다 더 많이 오른 유저들도 있다는 거였다. 이번 소탕에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B랭크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경험치가 한 번에 들어온 셈이었다.
대스 해적단의 노움들만해도 C랭크 정도로 분류되는 몬스터들이었다. 그런 몬스터를 열 다섯명이서 처리했으니 당연히 경험치가 많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카시마르는 레벨이 12단계나 오르는 폭렙 수준의 레벨업을 경험했다. 파티원 중 가장 레벨이 낮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저 대스라는 놈 안 죽여도 돼? 죽인다며?”
“아직. 정보를 얻으려면 더 시간이 필요한가 봐.”
“충분해 보이는데.”
“아직이야.”
"그런가."
핏불킹이 작은 배 위에서 여전히 고문을 당하고 있는 대스를 힐끔 보며 말했다. 강숭이는 신이나서 대스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고문을 하고 있었다. 무슨 정보를 얼마나 얻어냈는지 아직 카시마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아직 끝나지 않은 건 확실했다. 대스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다 토해내면 강숭이가 신호를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야. 저거 관련 퀘스트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도움 필요하면 말해라.”
“왜? 도와주려고? 형 잘못하다가는 형 길드까지 다 딸려들어 간다.”
“이미 길드장이랑 이야기 끝냈어. 우리 길드 이름이 뭐냐. 꿀 매너 길드 아냐. 길드원들이 네 이야기 듣고는 저놈들은 매너 없는 놈들이라고 판단을 내렸어. 매너 없는 놈들에게는 가차 없지.”
“좋네. 그러면 인원이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를게.”
“그래.”
카시마르 일행은 대스 해적단의 해적선을 불 지르고 안에 있던 물건들을 죄다 옮겼다. 그들은 미리 가져온 창고 배낭에다가 물건을 담았다. 배낭을 창고처럼 쓸 수 있는 꽤 고가의 아이템. 그렇지만 다들 고렙들인지 상당한 수의 창고 배낭을 소지하고 있었다.
창고 배낭은 등급에 따라 담을 수 있는 물건의 양이 달랐다. 보통은 10평 정도 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냥을 하면서 많은 양의 잡템을 처리해야하는 유저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인 셈. 그러나 배낭 창고에 들어간 물품들은 인벤토리에 있는 것들처럼 바로바로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잘 선택해서 넣어야 했다.
“왜 두 개야? 하나씩 나누면 딱 맞는다고 하지 않았어?”
“파티원들이 너한테 미안하다고 조금씩 더 넣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N분의 1 하자고 했잖아.”
“이거 진짜 대단한 광렙인 거야. 경험치도 경험치지만 저거 소탕하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잖아. 상급 던전 중에는 일주일 넘게 걸리는 곳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가성비가 쩐다고 볼 수 있지. 무엇보다 돈도 어마어마하게 줬잖냐. 바로 쓸 수는 없어도. 보통 이 정도 꿀 프로젝트면 세팅한 사람이 절반 이상 가져가. 그것도 적게 가져갈 때 그 정도야.”
“그래도 괜찮은데. 나 거의 10업 했어.“
“야. 나도 3업 했다. B 랭크부터는 렙 진짜 안 오르는데 대단한 거지.”
“좋네. 생각지도 않게 더 받게되었네.”
“그거 비밀번호는 503이다. 배낭 열고 들어갈 때 #503 누르면 돼. 그리고 투기장 금화는 다 너한테 몰아줬으니까 그렇게 알아.”
“투기장 금화를? 왜?”
“야. 그렇게 나눠도 그리 많은 게 아니라니까. 이번 사냥은 진짜 우리가 한 게 없어. 네가 다 세팅한 거에 와서 숟가락 얻은 거잖아. 진짜 정확히 따지면 우리가 너한테 돈을 주고 참여를 했어야 해. 아마 네가 사람들 그렇게 모아서 했으면 진짜 그렇게 참여할 사람 있었을 걸?”
“그랬다가는 이렇게 깔끔하게 분배가 이뤄지지 않았겠지.”
“아무튼 대단한 꿀 사냥이었으니까 받아도 돼.”
“골낳괴 친구들도 동의했어?”
“야. 그 친구들 사람 됐더라. 우리가 좀 더 나누자고 하니까. 그 친구들이 그러면 투기장 금화를 다 몰아주자고 이야기를 했어. 우리는 우리 길드원들 아니어서 조심스럽게 말 꺼냈는데 되게 생각이 됐더라고.”
“어. 그놈들 되게 착해. 게임도 재밌게 하고.”
“실력도 괜찮더라. 메리가 친구추가 받아놓은 거 보니까 조만간 길드로 데려올 거 같던데?”
“그래?”
“어. 아마도 메리가 사람 꼬시는 재주는 탁월하니까. 근데 너는 안 들어올래?”
“형네 길드?”
“어. 여기 사람들 되게 좋아.”
“봐서.”
“너무 간 보지 말고.”
“아무튼 땡큐야. 알아서 이렇게 분배까지 해주니 좋네.”
“그건 그렇고 너 라스베가스로 언제 갈 거냐.”
“라스베가스?”
“인마. 너 잊어먹고 있었던 거야?”
“아. 50주년 행사?”
“그래.”
“오래 되긴 했어. 거기도. 벌써 50주년이라니.”
“90년대 초부터 있던 곳이니까. 아무튼 너 언제 넘어갈 거냐? 나도 맞춰서 넘어가려고.”
“정확히 일정은 안 잡았는데.”
“이번에 사람들 다 오니까 좀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네 숙소 그대로 있잖아. 아냐?”
“아냐. 거기 세 준지가 언젠데.”
“거기를 세를 줬어?”
“어. 어차피 라스베가스 갈 일도 없는데 그냥 내버려 둬서 뭐해. 세 줬지.”
“그 돈만 해도 어마어마하겠네. 그럼 그 숙소는 못 쓰는 건가?”
“아마 그럴걸?”
“그럼 호텔 잡아야 하나?”
“CFC 쪽에서 숙소 잡아준다고 했을 걸? 정확히는 모르겠네.”
“그런 거 미리 알아놔야지. 이번 50주년 행사 때문에 아마 사람들 미어터질 거다.”
“우대표님이랑 이대표님이 그런 거 다 준비 해놨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맞다. 너 아직도 그쪽 소속이지?”
“소속은 그렇지. 딱히 일은 안 하지만.”
“그러면 뭐 알아서 좋은 곳 준비해놨겠네. 그 두 사람이 일을 좀 꼼꼼하게 하냐. 그럼 좀 일찍 넘어와. 오랜만에 술이나 좀 마시자. 이제 너 술 먹어도 되잖아.”
“뭐, 괜찮지. 아. 맞다. 근데 나 딱 맞춰서 가려고 했다.”
“왜?”
“로버트 있잖아.”
“로버트?”
“아. 로버트 데루데르 말이야.”
“아하 그 로버트!”
“어.”
“그 친구가 왜? 그러고 보니 로버트가 얼마 전에 은퇴했지?”
“그래. 그래서 가기 싫어. 벼르고 있을 거란 말이야.”
“왜? 로버트 성격도 좋고 매너도 좋잖아?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친하기는 하지. 근데 형 잊었어? 전에 그 친구랑 약속했었잖아.”
“아아아! 아 맞다! 은퇴한 뒤에 너랑 한 판 붙기로 한 거?”
“그래.”
“로버트 그거 까먹고 있을 걸? 그거 언제 약속한 건데. 한 7년 되지 않았냐? 너 은퇴한다니까 로버트가 술 먹고 질질 짜길래 약속한 거잖아.”
“그때는 나도 진지했어. 로버트만큼 재미난 상대가 없었거든.”
“하긴······ 로버트가 잘하긴 하지.”
카시마르는 세계 최고 종합격투기 단체인 CFC의 전 챔피언이었다. 악몽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라이트급부터 슈퍼미들급을 거쳐 라이트헤비급까지 5체급을 석권한 전설의 선수. 카시마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합격투가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다.
팬들은 종종 카시마르가 헤비급까지 석권한 거나 다름 없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헤비급의 끝판왕이라던 로버트 데루데르를 이긴 유일한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응. 피지컬도 좋고 테크닉도 좋고. 맷집은 더욱 좋고.”
“근데 그거 기억하고 있겠냐? 오래전 일이잖아.”
“작년에 연락 왔더라고. 상대가 없어서 곧 은퇴할 거라고.”
“하긴 로버트가 헤비급을 너무 쥐고 있었지. 상대가 없으니까.”
로버트 데루데르는 2미터가 넘는 거구에 어마어마한 리치를 지니고 있었다. 피지컬 만큼이나 대단한 맷집과 파괴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다가 미들급 수준의 스피드와 뛰어난 테크닉까지 지니고 있으니 헤비급을 꽉 쥐고 있을 만도 했다. 그런 로버트 데루데르가 몇 달전 마지막 경기를 가지고 은퇴했다. 아직 젊지만 은퇴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딱히 상대가 없다는 거였다.
원래 헤비급은 선수 풀이 얇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만큼 챔피언이 자주 바뀌는 체급이기도 했다. 한 방 걸리기만 하면 역전이 나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체급을 로버트 데루데르는 6년 동안 지배했다. 더는 상대가 나오지 않을 만도 했다.
“은퇴 뒤에 약속한 스파링 하자고 하더라고.”
“하하하하하!”
카시마르의 말에 핏불킹이 크게 웃었다.
“야. 그놈도 참 진짜 집요하다.”
“성격이 더럽거나 매너라도 없으면 그냥 무시를 할텐데. 애는 참 착해요. 그러니까 마냥 거절하기도 그렇고.”
“스파링 가볍게 하는 건데 뭐 어때. 너 은퇴한 뒤에 운동도 꾸준히 했잖아. 전에 보니까 몸이 예전보다 더 좋아진 거 같더만. 아무래도 현역 때랑 다른긴 하겠지?”
“현역 때랑 달라서 망설이는 거야.”
“가볍게 해. 로버트가 유리하긴 하겠네. 아직 젊고 은퇴 한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근데 로버트가 그런 걸로 앙심 품고 막 덤벼들고 그럴 애는 아니다. 알잖아. 그놈 외모랑 안 어울리게 착해빠진 거. 너랑 싸우고 난 뒤에 우대표님이 안 구해줬으면 그놈 아직도 악덕 에이전트 밑에서 착취나 당하고 살았을 거다.”
“로버트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야. 손.”
“손? 아. 네 오른손.”
“그래. 그때랑 다르잖아.”
“그럼 잘 한번 이야기를 해봐. 설마 막무가내로 하자고 하겠어?”
“그러려나?”
“그거 스파링 반쯤 재미로 하자는 건데. 공개 스파링이나 시합도 아니고. 안 해도 그만이지. 잘 이야기하면 알아들을 거야.”
“그래야겠어.”
“그리고 너 해적기랑 항해 일지 챙기지 않았냐? 대스꺼?”
“챙겼지.”
“그거 너 NPC한테 가져가면 추가 보상 받는 거 아냐?”
“맞아.”
“근데 일단 대스 해적단 거는 안 가져가는 게 나을 거 같다. 위험 인물이랑 관계된 거라 문제 생길 수도 있지 않겠어?”
“나도 그 생각은 조금 하고 있었어.”
“뭐, 정확히 무슨 퀘스트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카시마르는 핏불킹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강숭이는 대스를 끈질기게 고문해서 정보를 얻어내고 불태워 죽였다. 카시마르는 창고 배낭을 은행에다 맡긴 다음 바로 가리우스 제독에게 향했다. 대스 해적단의 깃발과 항해 일지는 창고에 넣어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