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그때랑은 다르다니까!
올 타임 레전드 1위에 랭크 되어 있는 격투가 카시마르.
그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완벽에 가까운 격투가로 평가 받고 있었다. 체력, 맷집, 반응 속도, 동체시력, 멘탈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고, 스탠딩 타격 스킬 까지도 훌륭했다. 그런데다가 올림픽 레슬러급 이상의 레슬링 실력에 서브미션 스폐셜 리스트의 그라운드 게임도 깨버리는 그라운드 실력까지 지니고 있어서 어떤 파이터도 카시마르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평가하곤 했었다.
실제로 카시마르는 무패로 은퇴를 했다. 라이트급에서부터 헤비급까지 석권하면서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았고, 1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를 판정까지 가지 않고 승리했다. 이 정도면 팬들이 그를 격투의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는 카시마르에게도 한 가지 약점은 있었다. 데뷔 때부터 꾸준하게 지적되어 온 약점.
바로 펀치력.
커리어 경기 대부분을 피니쉬한 선수에게 펀치력 논란이 있다는 게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카시마르 본인도 인지하고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카시마르는 펀치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카시마르가 상대를 쓰러트릴 때는 상대의 멘탈을 먼저 부순다.
압도적인 기술과 전략의 힘으로 상대에게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자신은 거의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가 약해졌다고 판단하면 이빨을 드러내서 물어 뜯어버린다. 펀치력이 약한 카시마르가 상대를 피니쉬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된 스타일이었다.
카시마르의 펀치력 논란은 헤비급까지 체급을 올렸을 때도 계속 이야기가 나왔다. 체중이 늘면 당연히 펀치력이 강해진다. 그러나 그 강해진 수준도 헤비급 파이터들과 겨루기에는 그다지 강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펀치력은 어느 한 부분으로 정해지는 부분이 아니었다. 하체, 허리, 어깨, 팔, 체중 이 모든 게 펀치력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펀치력과 관련이 깊은 부분은 바로 주먹이었다. 주먹 자체가 단단하고 무거우면 기본적으로 펀치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테니스 공으로 아무리 세게 던져도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지만, 야구공으로는 살짝만 던져도 큰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그만큼 펀치력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주먹의 무게 자체가 관여하는 게 컸다.
물론, 카시마르의 주먹이 테니스공만큼 가볍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비범하지 않다는 이야기지 카시마르의 펀치도 상당히 매서웠다. 무게감이 없는 대신에 급소를 정확히 노려치는 핀포인트 타격을 갈고 닦았기 때문이었다.
“로버트. 진짜 괜찮은 거야? 이거 예전이랑 달라.”
카시마르가 오른손을 들어보이면서 말했다.
“알아. 나이트메어. 몇 번을 이야기해. 괜찮다니까.”
카시마르와 로버트 데루데르는 간단히 몸을 풀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은 실제 크기의 옥타곤에서 실전 같은 스파링을 벌일 예정이었다. 당연히 심판도 있었다. CFC에서 은퇴한 심판 중 하나인 존 크리시가 심판을 보았다. 참관인은 로버트 데루데르의 트레이너인 칼 로웬과 태런 무어. 그리고 MMA 전문가이자 카시마르의 빅팬인 루빈 블랙. 그들은 세기의 스파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보기 위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로버트 고집 더럽게 세네.”
핏불킹이 말했다.
“엄청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저 몸무게 반칙 아냐? 평체인 거 같은데?"
루빈 블랙이 말했다.
“스파링인데 뭐 어때.”
핏불킹과 칼 로웬, 태런 무어 루빈 블랙은 다 친한 사이였다. 특히 핏불킹은 카시마르가 은퇴한 뒤에 칼 로웬의 팀 소속의 선수가 나갈 때 몇 번 경기 전략에 대한 도움을 준 적 있었다.
“루빈.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 스파링이니까. 대충 포인트로 결판이 날 거 같은데.”
“둘 다 현역일 때 기준이면 당연히 나이트메어. 포인트 싸움에서는 데루데르가 한 수 아래지.”
“지금은 다르다는 생각이야?”
“현역이 아니니까.”
“전 생각이 좀 다른데요!”
“오! 루딤!”
현 월드원 라이트급 챔피언이 스파링 시작전에 맞춰서 딱 등장했다. 루딤은 레전드 복서인 골로카네의 아들로 RPG라는 닉네임을 가진 선수였다. RPG의 뜻은 로켓 런처만큼 펀치력이 강하다는 의미. 라이트급인 그의 펀치력은 헤비급에 버금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루딤은 생각이 좀 다른가?”
“다르죠. 무조건 형이 이깁니다.”
“밑에서 배웠다고 너무 편들어주는 거 아냐? 은퇴한지가 언제인데.”
“은퇴한 뒤에 운동 더 많이 했을 걸요? 안 그래요? 오감독님?”
루딤이 핏불킹을 보며 물었다. 핏불킹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표정으로 있었다. 데루데르와 카시마르는 일단 체급에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데루데르는 2미터가 넘는 키에 리치도 어마어마했고 평체가 130kg가 넘었다. 말그대로 내츄럴 헤비급의 괴물. 헤비급의 마왕이라는 닉네임이 딱 어울리는 선수였다. 반대로 카시마르는 평체가 100kg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키는 189정도에 불과했다. 보통 사람으로 치면은 큰 편이긴 했지만 헤비급 선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카시마르는 원래 라이트급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외관으로만 보자면 전력 차이는 확실했다. 그런데다가 한 쪽은 은퇴한지가 6년이 넘은 선수고 한 쪽은 이제 은퇴한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현역이나 다름없는 선수. 아무리 MMA의 역사상 최악의 악몽이라고 불렸던 선수라도 상대를 압도하기는 힘들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작 카시마르와 핏불킹은 상대인 데루데르를 걱정하고 있었다. 루딤도 당연하다는 듯이 카시마르의 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운동 많이 했지.”
“그래? 나이트메어가 은퇴한 뒤에 운동을 더 많이 했어?”
“복귀하려고 그랬지. 루빈. 손 부상만 해결되면 복귀해서 데루데르랑 다시 붙기로 했었어. 하지만 그게 어려워졌지. 주먹 뼈만 부러진 게 아니라 신경까지 건드려서 수술을 크게 했으니까.”
“은퇴한 뒤에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는데.”
“아직 더 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것 저것 익히면서 지냈지. 덕분에 체력은 아직도 멀쩡해. 평체는 헤비급 현역일 때보다 줄었을지 몰라도 몸 상태는 그때와 비교가 안 되지.”
“확실히 몸은 가벼워 보이네.”
태런 무어가 카시마르를 보며 말했다.
“손에 합금 넣은 거 때문에 은퇴한 놈이랑 MMA룰로 하겠다니 말리지는 않겠다만 아무리 로버트라고 해도 위험할 걸?”
“로버트 맷집은 아직도 팔팔해. MMA 시합 통틀어서 유효타 맞은 것보다 나이트메어와 시합 한 번 하면서 맞은 게 훨씬 많으니까.”
칼의 말은 사실이었다. 로버트 데루데르는 헤비급에 있으면서 대부분의 경기를 1라운드에 끝내버렸다. 2라운드까지 간 경기도 있었지만 그때도 타격은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헤비급 경기 특성상 공방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몸 풀기가 끝나고 바로 스파링이 시작되었다. 로버트 데루데르와 카시마르는 둘 다 래쉬가드와 경기용 팬츠를 입고 있었다. 카시마르는 옥타곤 위에 올라서자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버트와 카시마르 둘 다 경기 자체를 즐기는 사내들이었다. 특히 카시마르는 격투 중독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싸우는 걸 좋아했다. 그러니 카시마르 입장에서 이 스파링은 싫지 않은 일이었다. 강자와 싸울 수 있다는 건 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규칙은 알지? 스파링이니까 반칙하지 말고. 기량대로 싸워. 대신에 시합보다 훨씬 빨리 말릴 거야. 알겠지? 이건 아까도 이야기한 거니까. 제대로 지켜.”
“네.”
“넵.”
카시마르와 로버트 데루데르는 대답을 하고 가볍게 글러브 터치를 하고 물러섰다. 가까이 서니 두 선수의 덩치 차이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카시마르는 긴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 오랜만에 카시마르의 현역 시절의 눈빛이 나오고 있었다.
바로 스파링이 시작되었다.
로버트 데루데르는 베이스가 킥복싱이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콤비네이션을 쓸 줄 알았고 스피드도 빨랐다. 그런데다가 펀치력도 어마어마한 상황. 그러다보니 헤비급에서는 그를 그라운드로 끌고 내려간 사람이 거의 없었다.
휭!
로버트가 먼저 잽을 날렸다. 카시마르는 차분하게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다가 로버트의 잽을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움직여 피했다. 그리고 앞으로 들어가면서 잽을 카운터를 날렸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 보는 사람들이 오! 하는 탄성을 질렀다. 로버트도 번쩍하는 카시마르의 펀치를 맞고는 씩 웃어 보였다. 역시 나이트메어였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고 싶었던 사람이자 가장 존경하는 파이터.
로버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헤비급 타이틀 9차 방어의 기록을 세운 순간 보다도 더 설렜다. 로버트는 카시마르의 잽을 맞고는 확실히 가볍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나이트메어의 주먹은 가벼웠다. 그래서 그는 더욱 앞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제대로만 본다면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팡!
카시마르는 잽을 적중시킨 뒤에 로우킥을 날리고 로버트와 거리를 벌렸다. 로버트와 대놓고 싸우는 건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카시마르의 움직임은 전혀 죽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 동작으로 알아보았다.
“움직임 여전하네. 역시 나이트메어는 나이트메어야.”
루빈 블랙이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말했다.
“이거 시합 같은 스파링이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저 정도 움직이면 로버트도 제대로 하려고 할 테고. 안 그래? 미스터 오?””
“사실상 2차전이 될 수도 있겠네.”
사람들은 카시마르의 움직임에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핏불킹의 반응은 시큰둥 했다.
“뭔가 큰 착각들을 하고 있네. 저놈의 스타일은 로버트와 만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어. 그 말은 옥타곤 위에서는 저놈을 잡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지. 1차전 때 고전한 거? 1라운드에 오른손 주먹에 금이 간 채로 싸웠으니 그럴 수밖에.”
“로버트도 6년 동안 놀고 먹은 건 아니니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
칼이 핏불킹의 말에 반박했다.
“발전도 비슷한 수준의 경쟁 상대가 있을 때 하는 거야. 로버트가 6년 동안 제대로된 상대가 있었나? 그때랑은 달라. 지금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컨디션도 그다지 좋지 않았어. 증량에 대한 부담이 몸에 잔뜩 왔던 시기니까. 시합에는 나갈 수 있어도 100퍼센트 컨디션이라고 할 수 없었지.”
“하지만 작은 체격에 나이트메어가 헤비급에서 뛰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거 아닌가?”
루빈 블랙이 말했다.
“그 이유가 뭐겠어. 결국에는 펀치가 가볍다는 이유 때문인데 이제 그런 고민을 안 해도 되잖아. 그러니 적정 체중을 찾아서 몸 상태가 제대로 돌아왔어. 저 봐. 아이고. 저럴 거 같더라.”
핏불킹이 인상을 쓰고 옥타곤 위로 턱짓을 했다. 루딤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미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로버트 데루데르가 바닥에 쿵하고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뻑!
카시마르는 오른발 로우킥으로 거리를 잰 다음에 다시 한 번 오른발 하이킥 모션을 취했다. 그는 사우스포 자세를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모션만 취하고 때리지는 않았다. 그러자 로버트가 얼른 앞으로 들어오면서 원투를 날렸는데, 카시마르는 더킹으로 원투를 슥슥 하고 피한 다음 치고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오소독스 자세로 스위치했다. 한 호흡에
이루어진,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스탠스 전환이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이어지는강력한 오버핸드 라이트 훅.
뻑하는 소리와 함께 로버트 데루데르의 다리에 힘이 그대로 풀러버렸다. 2미터 거구가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한 방.
카시마르에게 패한 뒤로는 다운 한 번 당한 적 없는 로버트 데루데르가 쓰러졌고 크리시는 바로 스파링을 중지 시켰다. 로버트 데루데르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상당히 허탈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게 예전이랑 다르다니까.”
“펀치력이 저렇게 차이가 난다고?”
“대체 주먹에 뭘 넣은 거야?”
“크게 뭘 넣은 건 아니야. 다만 의료용 뼈를 이식했으니 전보다 무거워졌지. 100g 정도?”
“그건 알아. 근데 저렇게 차이 난다고?”
“크게 차이는 나지 않겠지. 하지만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줄 수 있지. 100g 그리 큰 무게는 아니야. 스마트폰 정도보다 조금 가벼운 수준이지. 하지만 저놈이 스마트폰을 들고 사람 턱에 내려친다고 생각해봐. 누가 버틸 수 있겠어? 그걸 알기 때문에 저놈이 복귀를 하지 않은 거야. 비록 100g 정도 무게 차이지만 저놈이 쓰면 반칙이 되니까.”
로버트는 더 스파링을 하자거나 하지 않고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카시마르는 자기 손이 반칙이었으니 스파링 결과에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로버트는 확실히 그런 부분에서는 쿨했다. 스파링이 끝난 뒤로는 유쾌한 성격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일주일 뒤에 카시마르는 CFC 5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고 거기서 자신의 경기 영상이 담긴 하이라이트 영상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전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파티에도 참석했다.
50주년 행사를 무사히 마친 카시마르는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핏불킹도 함께였다. 마땅히 하고 있는 일이 없는 핏불킹이라 카시마르의 집에서 놀고 먹고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카시마르는 일정을 소화하면서 코즈믹 게이트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투기장에서 자크르를 하면서 꾸준히 레벨업을 했고, 쉴 때는 유명 유저들의 플레이 동영상을 감상하면서 대회에 대비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월드 자크르 챔피언쉽 예선 참가 신청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