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한국으로
“거참. 그 유명한 유저가 중악씨 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대표님도 코즈믹 게이트를 아십니까?”
“직접 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회사 소속 연예인 중 몇 명이 그 게임에 푹 빠져 있거든요. 그래서 생일 선물 이벤트로 그 게임의 아이템을 선물하자는 의견이 나오곤 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죠. 그리고 이번 대회도 덩달아 봤고요. 게임을 한 번도 플레이 해보지 않았지만 재밌더군요. 뭐랄까···그···.”
“익숙한 느낌이지요?”
“예. 맞습니다. 게임에 대해 잘 몰라도 감상하는 데는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크르는 격투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다른 E스포츠처럼 복잡한 부분도 크게 없고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해설도 쉽더군요. 모르는 용어도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고요.”
“일단 중계진들도 유저의 스킬이나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요. 깊게 들어갈 일이 없으니 쉬울 수 밖에요.”
“하하하. 그렇죠. 아무튼 재밌었습니다. 중악씨는 여기서도 악몽이더군요.”
“좋은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죠?”
“당연합니다.”
“아무튼 늘 부탁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하시면 섭섭합니다. 전 아직도 중악씨의 에이전트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전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그런데 이번 대회가 오프라인으로 열려서 본선 시작하게 되면 중악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텐데 괜찮을까요?”
“알아보는 사람이야 문제가 없는데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렇죠.”
“제가 왜 그런 약속을 하고 다녔는지 정말 후회됩니다.”
“그러게 제가 은퇴한 기념으로 적당히 방송 출연도 하시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한국에 이렇게 공식적으로 들어갈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요.”
“아무튼 게임 방송도 방송이니 소문은 금방 퍼질 겁니다. 그러면 중악씨와 약속을 했던 방송사 관계자들의 연락이 엄청 올거에요.”
유중악은 역대 최고로 돈을 많이 번 스포츠 스타였다. 현역 시절 단 한 번도 패배하질 않았고, 개인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래서 유중악은 안티가 거의 없는 스포츠 선수 중 하나였다. 당연히 방송 출연 요청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유중악은 그 많은 출연 요청을 훈련을 해야한다는 이유 하나로 거절했다. 그런 유중악이 은퇴를 했다. 자기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왔으니 방송 관계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은퇴 직후 유중악은 다음에 한국에 들어오면 방송에 출연하겠다고 방송 관계자들에게 약속을 했다. 그렇게 미루다가 유중악은 호주로 넘어가서 한국에 잘 들어오질 않았고, 그러다보니 방송사 관계자들은 유중악에게 속은 기분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벌써 오 년 전 일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오 년 넘었죠. 육 년 정도 되었네요.”
“시간이 꽤 지났으니 괜찮을 거 같기도 한데요. 아직도 그러려나요?”
“그때 너무 매정하게 호주로 가셨어요. 그리고 PD들한테 너무 약속을 많이 하셨고요. 그때 활동하던 사람들 지금은 PD가 아니라 대부분 CP로 있을테지만 그래도 약속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출연해야죠.”
“그나마 다행인 건 그때 활동하던 PD들이 다들 지위가 높아져서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폭이 넓어졌어요. 아마 정글 같은데는 가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 정도 융통성은 다들 발휘할 거에요.”
“우대표님은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그럼요. 중악씨가 방송에 나와서 활약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데요. 그리고 그런 모습은 중악씨의 골수팬들에게도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중악씨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 많다고요. 아직도 팬클럽 활동이 활발합니다.”
“일단 대회는 치러야하니까 바로 방송에는 못 나갈 거 같아요. 대회 끝나게 되면 촬영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근데 얼마나 나가야 할까요?”
“너무 귀찮지 않도록 조율을 해보겠습니다만 그래도 꽤 나가셔야 할 겁니다. 그러게 한국에 자주 좀 오시지 그러셨어요.”
“그냥 호주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요.”
우공학은 유중악이 한국에 자주 오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유중악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굳이 꺼내지 않는 일. 물론, 유중악이 그 일 때문에 한국에 자주 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중악은 호주에 있으면서 나름 바쁜 일과를 보냈다. 가정에 충실하면서 취미 생활을 유지한다는 게 보통 바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중악씨 한국에 오는 대로 마중 나가 있겠습니다. 아마 이대표도 같이 갈 겁니다.”
“이대표님은 지금 미국에 있다면서요.”
“중악씨 올 때쯤이면 한국에 들어와 있겠죠. 오셨으면 에이전시에 한 번 오셔야죠. 얼마전에 새로 들어간 에이전시 건물 안 보셨잖아요.”
“아니에요. 이번에는 혼자 들어가고 싶어요. 마중 나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룡씨가 마중 나가기로 했나요?”
“아뇨. 가면 바로 가야할 곳이 있어서요.”
“아. 거기 들리시려고 하는군요?”
“네.”
“그러면 로드 매니저라도 보내놓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혼자 가고 싶어요. 그냥 공항 쪽에 자동차 한 대만 준비해주세요. 제가 직접 운전해서 가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저 운전 못하지 않아요.
“그래도요.”
“그 다음 스케줄 부터는 대표님 지시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면 일 보신 다음에 인천으로 가실 건가요?”
“숙소에 가서 하루 있다가 인천으로 갈 생각이에요. 인천에 며칠 있을 거 같거든요.”
“가족분들에게는 연락 안 하셨나요? 아. 지금 다들 중국에 있죠?”
“네. 호주로 자주 넘어와서 얼굴 보니 괜찮습니다. 다만 삼촌이 좀 뚱해 있겠네요.”
“조 대표님 말고 윤 감독님이나 팀 사일런스 분들 다 서운해하고 있겠죠.”
“그러니 이참에 가서 풀어줘야죠.”
“아무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숙소 걱정은 하지 마세요. 진짜 좋은 곳으로 구해놓을테니까요.”
“너무 무리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 좁지만 않으면 상관 없어요.”
“그래도 운동을 생활처럼 하지 않으십니까.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은 있어야죠. 아무튼 오시기만 하시죠. 이참에 정말 맛있는 음식점도 섭외해 둘테니까요. 이전까지는 중악씨 체중 관리 때문에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음식보다는 술을 드시고 싶은 거 아닙니까?”
유중악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제대로 들켰네요.”
***
유중악의 한국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래 유중악은 한 번 실행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시행하는 성격이었다. 가족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한 유중악은 바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우공학이 생각보다 일찍 숙소를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한 유중악은 스마트폰을 키고 공항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찾았다. 프로그램에 표시된 대로 차를 찾은 유중악은 우공학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프로그램에 입력했다. 그러자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유중악이 즐겨 타는 SUV 차량이었다. 그가 즐겨 타는 수제 차량 브랜드에서 나온 새 제품이 틀림없었다. 유중악은 짐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 정도 짐만 들고 움직여도 전혀 문제가 없는 이유는 숙소에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거기 때문이었다.
유중악은 조수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꽃다발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꽃다발은 생화가 아니라 조화였다. 추모공원에 가면서 사려고 했는데 우공학이 미리 준비를 해놓은 것이었다.
유중악은 서울에 있는 추모 공원으로 네비게이션을 찍고 움직였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유중악은 비가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중악은 꽃을 들고 추모공원으로 들어가서 안치 번호를 찾았다. 평일의 납골당은 한산하기만 했다.
“형. 나 왔어.”
유중악은 침착한 표정이었다가 염윤호의 사진을 보더니 왈칵 울음을 쏟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염윤호가 웃고 있는 사진을 보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염윤호는 유중악과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형이었고, 이후에는 유중악이 염윤호의 사업에 투자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비상한 아이디어로 자본금 1억도 되질 않는 돈으로 큰 기업을 만든 벤처 사업가. 가상 현실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도 염윤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염윤호는 4년 전에 과로로 사망했다. 심각한 일 중독이었던 염윤호는 유중악이 농담처럼 건넨 살이 너무 빠지는 거 아니냐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죽는 날까지 즐겁게 일을 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잔뜩 쏟아낸 다음 비서에게 30분만 자겠다고 한 뒤에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그는 한창 오랫동안 준비해온 코즈믹 게이트를 가상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서 힘을 쏟는 중이었다.
"형이 만든 게임 엄청 잘 나간다. 나도 엄청 재밌게 하고 있어."
유중악은 지금도 종종 생각을 하곤 했다. 염윤호에게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코즈믹 게이트를 만든다고 했을 때 반대했으면 어땠을까?
유중악은 염윤호의 사진을 보며 조용히 울었다. 울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유중악의 큰 어깨가 들썩이는 모습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공학이 잡아준 숙소는 유중악의 마음에 딱 들었다. 오정룡과 유중악은 숙소에서 본선에 오른 유저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오정룡은 포장해온 중식을 먹고 있었다.
“야. 너 진짜 안 먹어?”
“나 아까 간단하게 먹었다니까.”
“이거 많은데.”
“형 정도면 충분히 먹을 수 있어.”
본선 진출자들이 이전에 한 3분에서 5분 사이의 짤막한 인터뷰였다면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긴 심층 인터뷰였다.
“저러다 지면 어쩌려고 저렇게 도발을 하지? 야. 이거 맛있다. 이집 멘보샤 잘하네. 먹어보라니까.”
유중악이 말했다. 본선에 오른 유저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유력한 우승 후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참가자에 대한 디스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표적이 된 건 당연히 카시마르였다.
“격투기랑 같은 거지 뭐. 심리적으로 조금이나마 우위를 점하려는 발버둥 아니겠냐? 그만큼 큰 대회고 첫 대회이기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한 거지. 그나저나 재네들 다 짰냐? 어째 다들 너를 공격하네. 커뮤니티에서는 네가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고, 본선에 오른 참가자들은 네가 가장 거품이라고 말하는 상황이야.”
“그래서 나도 후회 중이야. 이참에 엄청 세게 좀 말할 걸 그랬어. 너무 온순하게 말한 거 같아.”
“그건 네 스타일이 아니잖아.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는 거 아니다. 그냥 네 스타일 대로 해.”
“뭐, 이미 인터뷰 다 했는데. 뭐.”
“네 인터뷰는 언제 나오냐?”
“이 방송 끝나면 웹에 다 올려놓는다고 했어. 기다리기 귀찮으면 나중에 보던가.”
“아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야부리 터는 것도 재밌는데 뭐.”
“형. 야부리가 뭐냐. 야부리가. 그런 이야기 좀 하지마.”
“야. 야부리가 어때서. 내가 쌍욕을 했냐?”
“야부리 일본말 아냐?”
“일본말 쓰면 안 돼?”
“에휴. 됐어. 거기 와르바시 좀 줘봐. 나도 하나 먹어보자.”
유중악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ㅋㅋ 미친놈. 근데 야부리가 일본어 였냐?”
“일본어 아닌가? 뭐 어때. 욕만 아니면 됐지. 근데 형 늦었는데 안 가도 돼?”
“나 여기서 자고 갈 텐데?”
“아. 왜에.”
“대표님이 너 대회 끝나면 튈지도 모른다고. 필히 붙어 있으라고 하셨다.”
“아니 중국팀이랑 친선 스파링 있는데 왜 은퇴한 나를 나오라고 하냐고.”
“낸들 아냐. 그리고 우리 쪽에서 그런다는 게 아니라 매드 익스트림에서 요청한 거야.”
“내가 한국에 있는 거 누가 흘렸으니까 그런 요청이 들어오지.”
“그거야 내가 말하긴 했지. 근데 어차피 대회 시작하면 다 알려질텐데 뭔 상관이야. 너도 이참에 중국 애들이 얼마나 성장했는데 확인도 좀 해봐. 요새 중국 애들 장난 아니다. 일단 피지컬 좋은 애들이 엄청 나오니까. 타격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그리고 약도 엄청 하고.”
“뭐, 아직도 중국 내 격투 리그에서는 약물 검사가 미미하긴 하지. 아무튼 오늘은 일찍 자야 돼. 내일 바쁘다.”
“내일 또 왜?”
“너 골낳괴 애들 안 볼 거야?”
“봐야지.”
“그거 내가 내일 점심에 보자고 해놨다. 그래도 대회 전에는 얼굴을 봐야할 거 아냐. 내가 저기 클리온 호텔 한식당 예약해뒀으니까. 넌 내일 가서 애들 보고 밥이나 사면 돼.”
“왜 마음대로 스케줄을 잡아.”
“너 어차피 내일도 여기 틀어박혀서 게임 할 거 아냐? 너 원래 골낳괴 애들 이전에 보자고 했는데 계속 미뤘다면서. 이제 대회 이틀 남았다. 내일 아니면 언제 보게? 그래도 너 엄청 도와준 애들인데 밥은 한끼 먹여야지.”
“알았어.”
“그리고 거기 점심 30만원 짜리 코스로 예약했다.”
“뭐?”
“거기가 미슐랭 3스타 짜리 음식점이란다. 제일 비싼 거 먹어봐야지.”
“그거 형이 계산하는 거지?”
“미쳤냐. 돈 많은 네가 내야지.”
유중악은 어이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오정룡을 바라봤다.
“골낳괴 애들한테 그 정도도 못해줘?”
오정룡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상하잖아. 무슨 상견례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처음 만날 때는 격식 있게 보는 거야. 비싼 거를 먹여 놔야 분위기가 좋아진다고.”
“알았어. 다 좋아. 좋은데. 맛 없기만 해봐.”
“맛있지. 다들 극찬하는 한식당이라니까.”
“아무튼!”
***
다음 날, 유중악은 골낳괴 친구들과 만나서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유중악은 오정룡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골낳괴를 데리고 식당을 빠져나가는 대 탈주극을 벌였고 한동안 오정룡에게 그 일로 시달려야만 했다.
한국에서 나름대로 즐겁게 시간을 보낸 유중악.
그렇게 대회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