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청소
[중지! 중지!]
핏불킹은 얼른 길드원에게 중지 명령을 내렸다. 카시마르의 생명력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걸 확인한 핏불킹은 얼른 지원 명령을 내렸다가 취소했다.
카시마르의 생명력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번개와 푸른 번개. 두 개의 빛줄기가 꽈리를 틀듯이 서로를 휘감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이펙트 장난 아닌데요. 저런 스킬도 있었어요?”
메리가 물었다. 메리는 핏불킹 옆에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전투 병력이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도 처음 보는 거야.”
“저건 상대 기술을 흡수한 거 같은데.”
“새로 만든 아이템의 힘이겠지.”
“공헌도를 어마어마하게 갈아 넣은 이유가 있구나. 엄청난데요.”
꿀매너 길드 사람들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여유가 있었다.
“핏불형. 좀 더 지켜봐도 되는 거죠?”
슭곰발이 물었다.
“어. 큰 데미지가 들어왔었는데 버텨냈어. 제대로 반격도 한 것 같고.”
핏불킹은 여전히 카시마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퇴각하려는 거 같은데요.”
“방금 그 공격으로 주변 부대가 싹 사라졌어.”
카시마르가 소환한 두 줄기의 번개는 주변을 죄다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카시마르의 주변에 있던 적들은 제대로 저항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마법사, 불꽃 기사 구분할 것도 없었다. 그들도 두 줄기의 번개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으니까.
다만 불꽃 기사들이 죽은 자리에는 표식이 하나 있었다. 두 줄기의 번개는 무기, 의복, 마법 아이템마저 모두 재로 만들어버렸다. 오직 불꽃 기사들의 야네크만 온전한 모습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퇴각 못하게 만들어줘야지.”
핏불킹은 얼른 양치기 소련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신호만 기다리고 있던 양치기 소련은 포탈과 연결된 장치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주문을 외우자 그의 주변에 설치된 돌조각상들이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은 아주 높이 떠오른 다음 포탈이 있는 위치로 정확히 떨어졌다.
붉은 빛이 포탈을 내리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작업 끝났습니다.]
양치기 소련은 얼른 핏불킹에게 연락을 넣었다.
[벌써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네요.]
[원래 그래요. 근데 작동 안 될 겁니다.]
[그러면 더 좋네요.]
[네. 좀 더 천천히 몰아도 될 겁니다.]
“어떻게 되었어요? 붉은 빛이 잠깐 번쩍거리다 끝난 거 같은데.”
“그게 완료된 거래.”
“이제 어쩌죠?”
“한 명도 빠짐없이 잡아먹을 자신이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데, 그게 아니면 이대로 지원만 해주는 게 좋지.”
“포탈이 작동안 하면 도망갈 곳 없는 거 아니에요?”
“불꽃 기사도 있고 마법사도 있어서 도망갈 수는 있을 거야. 가다가 몬스터들한테 잡혀먹을 수도 있겠지만 따로 활동하면 충분히 제국까지 살아갈 수 있을 걸? 시간은 좀 걸리겠네.”
번개의 방출이 끝나자 카시마르는 쉬지 않고 두 개의 뿔을 휘둘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제국의 병사들이 카시마르의 뿔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카시마르는 원정대와 처절한 결투를 하면서 다수와의 싸움에서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그건 병사 수 백을 베는 것보다 마법사, 사제, 불꽃 기사 한 명을 베는 거 훨씬 이득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카시마르는 다인전에서 주요 인물들을 노리는 방식으로 싸움을 해왔는데 지금은 잡기 쉬운 병사들만 골라서 잡는 중이었다.
병사들도 나름 카시마르의 공격에 반응했지만 두 개의 뿔의 공격력은 무지막지했다. 들고 있는 무기 채로 베어버리는 날카로움을 가진 무기여서 방어가 소용 없었다.
카시마르는 병사들을 도륙했고 그건 탈마우드가 퇴각 명령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카시마르가 의미 없는 병사들을 골라서 죽이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빠진 생명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퇴각한다!”
탈마우드는 다른 직속 수하를 내보려고도 생각을 해봤지만 그들을 내보낸다고 카시마르를 잡는다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직접 목격한 카시마르는 괴물이었다.
칼라단의 마법사의 보호막조차도 가볍게 뚫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기술이었다.
그런 번개가 담긴 창을 정면으로 맞고도 오히려 더 강력한 공격으로 되돌려주는 건 탈마우드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치고 들어오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카시마르는 거대한 맹수처럼 탈마우드에게 달려드는 중이었다. 병사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지만 카시마르를 조금도 저지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지원 능력 좋은 마법사 몇만 붙여주세요. 제가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탈마우드는 자신의 직속 수하 중에 여인이 없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로브를 뒤집어 쓴 여인이 서 있었다. 탈마우드는 여인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여인이 품속에서 회중시계 하나를 꺼냈다. 마정석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회중시계였다. 탈마우드는 회중시계를 확인하자마자 입을 들썩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여인이 입을 열었다.
“마흔일곱 번째입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탈마우드는 수하 몇 명과 눈을 맞추고는 재빨리 포탈 쪽으로 말고삐를 돌렸다. 포탈이 보이기는 했지만 포탈까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병사들은 피난이라도 가는 것처럼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중이었다. 탈마우드는 그 모습을 보며 오합지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토벌이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하게 된 것은 병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정보의 오류.
원정대들이 증언보다 카시마르는 훨씬 괴물이었다.
“저 정도 괴물이라면 원정대가 상대도 되지 않았을텐데요.”
탈마우드의 부관이 옆으로 말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디로. 왜 하나 같이 처절한 전투였다고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야기 해봐.”
“하나는 원정대와의 전투 이후로 그가 더 강력해졌다는 것이지요. 여행자들은 보통 인간의 기준으로 가늠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으니까요.”
“하긴···그들이 처음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하여도 감히 불꽃 기사를 넘볼 수 있을 거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었지.”
“지금은 웬만한 불꽃 기사들은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하물며 칼라단이 저렇게 허무하게······.”
“다른 가능성은?”
“다수와 싸울 때 더 강력해지는 특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원정대도 충분히 다수였다.”
“이런 식으로는 그를 잡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크르로 그를 처리해야한다는 건가?”
“예.”
“자크르로 그를 이길만한 불꽃 기사라······.”
탈마우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자가 몇 명 있었다. 그러나 탈마우드는 그들도 확실하게 이긴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
카시마르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카시마르와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는데 여인만 그를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카시마르에게 다가와서 로브를 벗어던지더니 인사했다. 그녀는 제국을 상징하는 갑옷과 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칼트 친위대 소속 프랑소와 리안입니다.”
창!
소개를 마친 리안은 검을 뽑아 들었다. 보통의 검보다 훨씬 가느다란 검이었다.
카시마르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탈마우드의 부하들이 그에 맞춰서 주문을 외웠다.
휙!
프랑소와는 별다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카시마르에게 다가와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팅!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충격. 카시마르는 프랑소와의 공격을 아주 가볍게 막아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그러나 프랑소와는 예상했다는 듯이 다른 공격을 했다.
휙!
이번에는 카시마르도 약간 놀란 상황이었다. 다른 능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검을 휘두른 것 뿐이었다. 다만 카시마르가 놀란 것은 프랑소와의 검이 생각보다 매섭고 빠르다는 점이었다.
카시마르가 코즈믹 게이트에서 상대한 그 어떤 검사보다도 프랑소와의 속도는 빨랐다.
티티팅!
최강의 피지컬을 지니고 있다는 카시마르조차도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프랑소와는 빨랐다.
치익!
프랑소와의 검이 카시마르의 목줄기를 노렸다. 갑옷 사이를 노린 영리한 공격.
그러나 카시마르는 턱 끝을 내리는 것으로 프랑소와의 검을 막아냈다. 프랑소와의 검이 투구로 긁고 지나갔다. 카시마르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시간 좀 걸리겠네.”
“엄청 빠르네요. 날다람쥐 같은데요?”
골낳괴가 프랑소와를 지켜보면서 말했다. 그들은 프랑소와가 카시마르를 붙들고 시간을 끌고 있는데도 무척 여유로웠다. 포탈이 닫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탈마우드의 수하들에게 안전한 퇴로는 없었다.
그들은 포탈까지만 가면 생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들의 생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날다람쥐보다 훨씬 짜증나지. 사실 저놈한테는 저런 스타일이 가장 위험해.”
“어떤 스타일이요?”
“피지컬로 먹고 사는 놈인데 그게 먹히지 않으면 애를 좀 먹지. 보통 유저들은 상대하기 쉬울지도 몰라. 잔 스킬들이 많잖아.”
“빠른 스피드 밖에 없으면 그렇겠죠. 그런데 카시마르형 무기에 부딪혀도 멀쩡한 거 보니 저것도 야네크인 것 같은데요.”
“그러겠지.”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리 빠르다고는 해도 카시마르 형 정도면 충분히 방법을 찾을 거 같은데요. 방법이 마냥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잔상을 쓰는 방법도 있고.”
용재가 말했다. 그러자 핏불킹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전투를 지켜보다가 포탈 쪽을 바라봤다. 토벌대는 포탈 쪽으로 알아서 몰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핏불킹은 바로 카시마르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야! 너 일부러 시간 끄냐?]
[어. 알아서 몰려가잖아. 제대로 진형도 안 잡고 있으니 한 방에 쓸어버리게.]
[그 기술이 그렇게 범위가 넓어?]
[딱 좋게 몰려들고 있어. 클린님한테 버프 좀 센 거 넣어달라고 해.]
[어떤 거? 스킬 강화?]
[어. 타이밍 알려줄게.]
[오케이.]
카시마르와 대화를 끝낸 핏불킹은 길드원들에게 전체 귓속말을 날렸다.
[조금씩 전진해서 따라갑시다. 들키지 않도록. 그리고 지원 분들은 신호 받으면 카시마르에게 버프 넣어주세요. 클린님은 스킬 강화 쪽으로 센 거 하나 부탁하고요.]
[알겠습니다!]
[예!]
[넵!]
[그리고 라브시안 쪽 전사들은 아직 투입하지 마세요. 카시마르 스킬에 휩쓸리면 같이 죽습니다.]
[마지막에 투입되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은 투입 안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자. 다들 준비해요. 저쪽 선두가 포탈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포탈이 작동 하지 않는 걸 알면 바로 흩어질 거에요.]
챙! 챙! 챙!
프랑소와는 신나게 카시마르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시마르에게 데미지는 전혀주지 못했다. 프랑소와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시간을 끌기 위해서 계속 공격했다.
카시마르는 프랑소와의 공격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방어하면서 뒤쪽 상황을 살폈다. 어차피 길드원들이 나무 위에 올라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라 카시마르가 크게 살필 필요도 없었다.
핏불킹에게 오케이 싸인을 받은 카시마르는 두 개의 뿔을 하나의 뿔로 바꾼 다음 프랑소와의 검을 맨손으로 붙잡아버렸다.
카시마르는 왼손으로 검을 붙잡고 오른손에 든 뿔로 프랑소와의 복부를 공격했다.
휙!
놀랍게도 프랑소와는 검을 과감하게 버리고 뒤로 물러나서 공격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카시마르의 손에 있던 검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프랑소와는 처음 봤을 때처럼 짧게 인사를 한 다음 재빨리 사라졌다. 날다람쥐처럼.
카시마르는 도망치는 프랑소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토벌대를 후미를 쫓아서 달렸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포탈을 보고 선 채로 뿔을 앞으로 내밀었다.
카시마르의 머리 위에 각종 버프가 떠올랐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버프인 미스터 클린의 버프도 떠올랐다. 커다란 주먹 모양의 버프.
곧이어 뿔의 힘이 개방되었다.
뿔의 분노.
원래의 분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충격파가 토벌대를 향해 쏟아졌다.
핏불킹의 예상은 들어 맞았다.
라브시안의 전사들이 출동할 필요도 없었다.
죽은 자보다 생존자의 숫자를 세는 게 훨씬 쉬울 정도였으니까.
뿔의 분노가 지나간 자리는 청소라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깔끔했다.
토벌대가 청소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