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하청
“끝내주네. 클린님 버프가 더 좋아진 거 같은데요?”
핏불킹이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끝내주는 장면이긴 했다. 해일처럼 뿜어져 나온 충격파는 주변 숲의 지형을 바꿔 놓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과시했다.
“카시마르님 스킬이 끝내주는 거죠. 전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장난 아니네요.”
“아. 늑대 가죽 이벤트 때 클린님 안 계셨어요?”
“전 그때 오프라인이었습니다.”
“그랬군요.”
토벌대에서 생존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지휘관인 탈마우드도 뿔의 분노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뿔의 분노에 휩쓸리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흩어져서 도망쳤지만 귀환은 장담할 수 없었다.
불꽃 기사의 수준이 아니라면 고렙 몬스터들이 득실 거리는 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불꽃 기사들도 무사 생환을 장담 못하는 곳이 서쪽 지역이었다.
핏불킹은 길드원들에게 야네크를 가장 먼저 챙기게 했다. 불꽃 기사가 아닌 자에게 야네크는 관상용 무기에 불과했지만, 관상용일지라도야네크는 귀한 가치가 있었다. 포로보다도 더 귀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끝났네. 한 고비 넘겼다.”
핏불킹이 말했다. 전투를 끝낸 카시마르가 길드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수행기사인 아렌과 카렌은 얼른 카시마르에게 달라붙어서 그에게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다음에는 정말 쉽지 않겠지?”
“제국 전력이 이 정도 수준이지는 않을 거야.”
“거기다 한 번 당했는데 또 당하지는 않겠죠. 포탈 관련된 부분도 해결하겠죠. 다음에는.”
골낳괴가 말했다.
“그럴 겁니다. 아마 다음에는 포탈을 하나 더 열 수도 있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양치기 소련이었다. 양치기 소련은 숲속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밧줄이 들려 있었다. 밧줄의 끝에는 병사들이 견고하게 포박되어 있었고 양치기 소련은 그들을 끌고 오는 중이었다.
“포로입니다. 이쪽으로 뛴 놈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나름 머리를 쓴 거죠.”
“포탈 반대편으로 뛰었으면 오히려 안 좋을텐데. 사방에 라브시안 쪽 전사들이 포진되어 있어서 말이야. 그들은 포로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핏불킹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포로는 최대한 살려두라고 부탁해놨어. 레이가 전달 했을 거야.”
“전달했어도 살려둘까요? 원한이 장난이 아닐텐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구세주의 말이니까 잘 지킬지도 모르겠네.”
“근데 포로를 막 잡아놔도 괜찮은 거야? 그거 다 리스크라며.”
“리스크이지만 잘 쓰면 아주 좋은 카드가 될 수 있지.”
“가둬둘 감옥도 마땅치 않은 상황인데.”
“괜찮아. 병사들은 회유해서 우리 전력으로 만들면 되고 계급이 좀 높은 친구들은 정보 캐내면 돼.”
“회유한다고 그게 되냐 이 말이야.”
“야. 그새 잊었어? 우리에게 고문 전문가 있잖아. 요새 스트레스 쌓인 게 많아서 잘할 거다.”
“강숭이.”
“그래. 그 음숭한 놈 이럴 때 써먹어야지.”
“강숭이는 크릿 봐야하는 거 아니에요?”
골낳괴가 말했다.
“틈틈이 일 시키면 돼. 아무튼 그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도록 하고.일단 여기 정리는 메리한테 맡기기로 했어.”
“형이 안 하고?”
“그보다 더 빨리 처리해야할 일이 있다. 너도 가야 돼.”
“나도?”
“응. 낳괴 너네들이랑 레이 같이 가야지.”
“뭔데?”
“K길드.”
“눈치챈 거에요?”
“이 난리가 터졌는데 눈치 못채면 이상하지. 어쨌든 압박할 수는 있어. 계약 상당히 길게 잡아놨거든.”
“그렇다고 해도 그쪽에서 할 의도가 없으면 문젠데.”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거고. 그쪽이 프로페셔널하길 바래야지.”
“그럼 가 보자. 원수진 것도 아닌데. 근데 예상보다 빠르긴 하다.”
“난 어느 정도 예상했었는데? 그쪽 애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그럼 이제 얼굴 보고 협상해야겠네요.”
“그래야지. 이미 보자고 말해놨어.”
카시마르 일행은 K길드의 관계자를 만나러 움직였다.
***
“이건 대놓고 끌어들인 거네. 개놈들.”
컨신은 대놓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었다.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많이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불쾌하긴 하지만 나쁜 제안은 아니야. 어차피 제국과 북제국 사이에 껴서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다들 좋아하고 있었잖아. 성전 이후로 얻은 경험치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솔직히 나오는 아이템 수준도 다르고 말이야.”
로드로드가 컨신의 말을 받았다.
“그 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애초에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생각을 해보셔야죠.”
류키가 로드로드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그게 아마추어 같은 생각이라는 거지. 성전 일은 우리가 실패한 게 맞아. 제대로 당했지. 하지만 그걸 감정적으로 풀면 우리만 손해를 보는 거 아니겠어?”
“로로의 의견에 일리가 있어. 성전 때의 일은 어차피 한 쪽은 죽는 거였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겼어야 하는 싸움이라는 말이야. 이기면 그만큼 크게 가져가지만 졌을 때는 그만큼 리스크가 큰 싸움. 거기에서 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칸피아가 말했다.
“이번 일도 성전에 못지 않게 리스크가 크죠. 그러니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들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데 소집을 한 거고요.”
메디아가 차분한 표정으로 길드원들을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리스크는 크지만 우리한테는 무조건 이득인 일 아닌가?”
로드로드가 말을 꺼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왜 이득이라는 거지?”
“이건 저쪽에서 손을 내밀어 준 거라고 봐야해.”
“그러니까 왜 이 상황이 이득인 거냐고.”
컨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북제국과 제국 사이에 껴서 도태될 운명이었어.”
“그건 가정일 뿐이죠.”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성전 이후로 랭킹 떨어지지 않은 사람 손 들어봐 없지? 컨신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1000위권 밖으로도 밀려난 친구도도 있지. 안 그래?”
“조금 억지 같네요.”
“아니. 억지가 아냐. 우리는 붉은 산맥에서 도망치면서 사냥을 해야 하고 사냥해서 나오는 아이템들도 제대로된 값을 주고 팔 수도 없지. 같은 아이템을 사더라도 더 많은 값을 치러야하는 상황이고. 그나마 돌파구라고 뚫어 놓은 게 투기장인데. 투기장 코인의 가격은 이미 급상승했지. 코인을 꽤 많이 확보해둬서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해야 돼. 우리는 점점 망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로드로드의 말에 어느 누구하나 대놓고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건가요? 이건 성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어요.”
메디아가 말했다.
“승산이 제로에 가깝더라도 이건 받아야 하는 배팅입니다. 어차피 지금 이대로 서서히 망해가나 이번 일에 합류해서 한 방에 망하나 망하는 건 마찬가지에요. 그럴 거면 차라리 배팅 받아서 패라도 까봐야죠. 그리고 어차피 접어야 할 게임이라면 일찍 접는 게 이득 아니에요? 희망고문하면서 질질 끌어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거지. 다들 프로라면서. 먹고 살아야지.”
꽤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보통 같았으면 크게 반발했을 상황인데도 길드원들은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딜을 받기에는 뭔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류키가 말했다. 그러자 로드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냥 딜을 받기에는 조금 그렇지. 솔직히 기분 나쁜 건 사실이거든. 그러니까 우리는 프로 답게 이걸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생산적으로 처리하자는 말이야.”
“생산적으로 어떻게 말인가요?”
“솔직히 이번 일 계획한 거.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기가막혔잖아요. 우리 모두 다 속아 넘어간 상태고. 그러니까 우리도 똑같이 합시다.”
로드로드가 메디아를 보면서 웃었다. 길드원들이 로드로드의 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K길드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온 인물은 메디아였다. 그녀가 다른 길드원들을 대동하지 않고 나온 건 꽤 의외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몸매가 확연히 드러나는 마법사의 옷을 걸치고 나온 상태였다. 멀리서도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왔어요. 그래서 저희 길드의 힘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메디아는 이야기를 길게 끌지 않았다. 이미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카시마르가 대답했다.
“당신은 정말 예측할 수가 없는 사람이군요. 성전이 끝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국과의 싸움.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메디아가 물었다.”
“승산이 없다고 해도 할 겁니다.”
“저희가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생각인가요?”
메디아가 카시마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카시마르 대신 핏불킹이 나섰다.
“그에 따른 페널티가 있겠죠.”
“그걸 감수한다고 하면요?”
“이 계획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솔직히 길드원들의 반발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저도 감정이 없다고는 말 못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렇지만 그쪽은 프로 아닙니까?”
“제대로 걸렸다는 느낌은 있죠. 요 근래에 길드원들이 정말 만족하고 있었거든요.”
“이 근처가 사냥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죠.”
“네. 아주 좋아요. 사냥터를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합류하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이 싸움의 목적이 무엇이죠?”
“라브시안 부족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게 목적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희 길드는 프로들이 모여 있습니다. 프로들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이면 뛰어들지 않아요.”
“반대로 돈이 되는 일이면 불구덩이라도 들어가겠죠.”
“맞아요. 그러니 이 전투의 끝이 어떻게 될지가 중요해요.”
“단순히 사냥터 독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거군요? 뭘 원합니까?”
“저희가 합류한다고 해도 병력적으로는 열세인 상황이지요?”
메디아가 차분하게 물었다.
“열세죠. 상대는 제국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정확히는 제국의 최대 파벌인 황제파가 적이지만. 언제까지 그들이 밀고 들어올지 모르니.”
“이번 프로젝트에 저희가 합류하게 되면 모든 걸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면 저희는 모든 걸 걸고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도록 움직일 겁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메디아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면서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자 카시마르가 조금 직설적인 이야기로 그녀를 재촉했다.
“아! 그 방법이 있었네.”
조용히 있던 핏불킹이 손가락을 튕기면서 감탄사를 뱉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핏불킹을 바라봤다. 메디아의 시선도 핏불킹에게 향했다.
“지금 그거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죠? 하청.”
핏불킹의 말을 들은 메디아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러나 그걸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청?”
“성전으로 인해서 나가리. 아. 죄송합니다. 나가리라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
“괜찮습니다. 계속 이야기 하세요.”
“아무튼 검은 교단 쪽 인원이 한 둘이 아니니까. 지금 그쪽을 끌어들이겠다는 소리 아니에요. 맞죠?”
“맞습니다.”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걸 끌어들이고 관리할 권한을 K길드 쪽으로 넘겨주길 바라는 거고요.”
“정확해요.”
핏불킹과 카시마르는 서로를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길드원들에게 귓속말을 보내서 동의를 얻었다.
솔직히······ 받지 않을 수 없는 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