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동상이몽
불꽃 기사의 지위는 예전보다 낮아졌다. 여전히 그들은 제국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과거처럼 높진 않았다. 그 이유는 불꽃 기사들이 과거보다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불꽃 기사들은 가문과 신분에 상관 없이 불꽃 기사가 될 수 있었다.
불꽃 기사를 선발하는 기준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강함.
그런데 야네크가 가문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경쟁력이 점차 약해졌다. 초인 같은 강함을 자랑했던 불꽃 기사들의 본래 능력이 약해지고 야네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불꽃 기사들만 남게된 것이었다.
야네크를 활용하는 노하우는 과거보다 발전했지만 정작 그걸 다루는 불꽃 기사는 초라하게 약해졌다. 이제 불꽃 기사들은 육체를 단련하는 것보다는 야네크에 더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불꽃 기사들의 체술은 점점 하향 평준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불꽃 기사들 대부분이 이러한 흐름에 맞춰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흐름을 따르지 않는 가문도 있었다. 바로 리버스 가문이었다.
특히 리버스 가문은 야네크를 보유한 제국의 가문들 중에서 육체 단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가문으로 유명했다. 그 이유는 리버스 가문에 할당된 야네크 ‘리버스’가 가진 특징 때문이었다.
뒤집는다는 의미를 지닌 야네크 리버스.
큰 잠재력을 지닌 야네크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운이 좋지 않으면 야네크를 발동 시키기도 전에 죽을 수 있는 게 리버스 사용자였다. 그렇기에 리버스를 쓰는 불꽃 기사들은 야네크를 다루는 것보다는 육체를 단련하는데 힘을 쏟았다. 불꽃 기사 에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열심히구나.”
상체를 드러낸 채로 단련을 하고 있는 에르에게 그루한이 말했다. 그루한은 리버스 가문의 현재 가주였다. 가주이자 불꽃 기사 에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루한.
“야네크를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훈련은 지겹다면서 훈련장에 안 오시잖아요.”
에르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에르의 훈련을 도와주던 기사들이 잠시 동작을 멈췄다.
“마무리 단계 아니냐. 훈련 마무리하고 이야기 하자.”
그루한의 말에 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몽둥이를 들고 있던 기사들이 에르의 몸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리버스 가문의 불꽃 기사의 특징은 제국 내에서도 가장 무거운 갑옷을 두른다는 것.
무겁고 단단한 갑옷을 입어도 육체에 전달되는 충격을 버텨내려면 이런 무식하리만치 단순한 단련의 반복은 필수였다.
훈련을 마친 에르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루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루한이 직접 훈련장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루한이 직접 찾아올 정도로 중요한 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르의 일인가?’
다르는 에르의 친동생으로 일찍 가문을 떠나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내였다. 다르는 그동안 꽤 많은 사고를 쳤고 가문이서 그걸 몇 번이고 수습한 적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집무실에 들어온 에르가 물었다. 펑퍼짐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에르의 모습은 아까와는 다르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순한 인상의 에르였기에 근육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학자처럼 보였다.
“칼트 쪽에서 연락이 왔다.”
“칼트요? 그쪽에서 왜요?”
“기회가 온 것 같다. 우리가 그쪽 소속이긴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까지 없던 기회가 왜 생겼냐는 거죠.”
에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런 에르의 반응을 그루한은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루한은 에르를 가까이 불렀다. 에르와 그루한이 귓속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뭔데요?”
“네 말대로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정보를 샀다.”
“정보를요? 정보상이 알 정도면 이미 위에는 다 퍼진 소문일텐데요?”
“거기 말고 라튼 쪽에 알아봤다. 알지? 라튼 쪽은······.”
“아버지!”
라튼이라는 말에 에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루한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에르를 바라봤다.
“왜 소리를 질러!”
“아니 라튼 쪽은 카르 공작의 처가잖아요. 그쪽과 잘못 엮이면 큰일날 수 있다는 거 몰라요?”
“문제 없는 일이야. 라튼 가에서 내놓은 자식 있지 않느냐.”
“마컴인가 하는 놈 말이에요?”
“마컴이 아니라 마컬, 마컬이 어떻게 마컴이 되냐.”
“아무튼 그 친구가 물어오는 정보를 믿을 수 있어요? 가문의 회의에도 껴주지 않을 정도라던데.”
“그러니 뒷탈이 없지. 라튼 쪽에서는 마컬에게 정보를 전혀 주지 않거든.”
“그러면 그 정보는 신빙성이 있어요?”
“구체적인 정보는 아니다. 분위기만 보는 거지. 이상하지 않느냐. 우리 가문의 야네크는 그리 뛰어난 게 못 돼.”
“잠재력만 높다고 평가 받죠.”
“그래. 아무튼 현 상황에서 위에서 직접 연락이 올 이유가 없단 말이다. 분위기 봐서는 카르 공작이 직접 널 보자고 할 것 같은데······.”
“그럼 정말 꽤 중요한 일이군요. 그래서 마컬이라는 사람에게 얻은 정보는요?”
“위쪽에서 은밀하게 큰 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어떤 사업을요?”
“그것까지는 몰라. 마컬이 그것까지 알 수 있겠냐.”
“하긴 그런 정보는 또 철저하게 관리하죠. 위쪽에서.”
“그래. 아무튼 중요한 건 위쪽에서 사업을 벌였는데 그게 틀어졌다는 거다.”
“귀족파도 모르는 거죠?”
“그래.”
“뭘까요?”
“그걸 우리가 궁리해봤자 알 수 있겠냐. 아무튼 이번에 사업이 틀어져서 불꽃 기사들이 꽤 많이 다친 모양이다.”
“불꽃 기사가 다칠 정도의 일이면······.”
“성전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고.”
“성전은 끝났잖아요.”
“뒤처리가 남았을 수 있으니까.”
“검은 교단의 뒤처리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교단이 황제파에 도움을 요청한 거겠죠?”
에르는 성전 때 등장했던 거대 괴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런 괴물들이라면 불꽃 기사들도 얼마든지 당할 수 있었다.
“그래. 귀족파는 모르게. 알다시피 검은 교단과 관련된 자들이 떨어트리는 물건은 이쪽 세상의 물건이 아닌 경우도 있으니. 가치가 있겠지.”
“기회가 온 걸 수도 있겠네요.”
“그래.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잘 해볼게요.”
“그거 때문에 부른 게 아냐. 이번 기회를 잘 살리기 위해서 질린드 옷을 구매했다.”
질린드라는 말에 에르의 눈이 커졌다. 질린드 옷은 고위 황족이나 귀족들이 암살에 대비해서 입는 내의였다. 충격 흡수효과가 대단하고 마법 저항력도 높여주는 물건이어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아직 유저들 사이에서도 풀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고가의 물건.
“아버지. 돈이 어디서.”
“돈 걱정은 네가 할 필요가 없다. 질린드 정도면 리버스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겠지.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여줘라. 리버스가 얼마나 뛰어난 야네크인지. 네가 아니 우리 가문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는지 말이다.”
“예!”
에르가 고개를 세차게 숙이면서 대답했다.
***
“어때? 가능할 거 같아?”
카시마르가 물었다. 그러자 핏불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겠는데. 근데 저번에 저쪽에서 포탈을 하나 더 열수도 있다고 했어. 양치기야. 안 그랬냐?”
핏불킹이 구석에 있던 양치기 소련을 불렀다. 양치기 소련은 이미 꿀매너 길드원들과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충분히 가능하죠. 포탈 하나에서 둘은 더 열 수 있습니다. 바로 옆에 여는 거니까요. 근데 황제파에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넘어오느냐가 관건이겠죠.”
“이번에는 정말 어려울 거야.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아무 대책 없이 넘어오지는 않을 테니까.”
핏불킹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획기적이네요. 넘어오자마자 사르르 녹는 병력을 볼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로드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로드로드는 말을 잘했다. 말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친화력도 좋아서 사람들 사이에 금방 파고들었다.
“저 사거리 늘려주는 기술 저희 길드 메디아에게 걸어주면 훨씬 효과적일 거 같은데요. 메디아 기술 중에 빛의 전이라는 스킬이면 싹 녹일 수 있을 겁니다. 대상이 죽으면 그 다음 대상에게 똑같은 데미지가 들어가는 기술이라서요. 이건 숫자 제한도 없어요.”
메디아는 한 때 마법사 중에서도 1위를 한 적 있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녀가 월드 자크르 챔피언쉽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한 건 그녀가 가진 스킬이 대부분 광역 스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저거 데몬 토이에게만 걸 수 있는 스킬이에요.”
“그래요?”
“네.”
“제노키오의 스킬은 대부분 다 데몬 토이 용도인가요?”
“유저 상대로는 없어요.”
“아쉽네요.”
“근데 저한테는 몇 개 걸 수 있게 되어 있더라고요.”
카시마르가 말했다.
“어떤 스킬이요?”
“공격력 강화랑 스플래쉬 데미지 부여하는 게 있어요.”
“스플래쉬 데미지는 좋네. 너한테 딱 좋은 스킬 아냐?”
“그렇긴 한데. 사거리 올리는 거 찍고 나면 남은 포인트가 있을지 의문이야.”
“한번 거리 재보면 되죠. 지금 몇 개 찍었는데요?”
“일단 사거리 업그레이드 스킬에 10개 정도 투자한 상태에요.”
“그러면 거리 재서 맞추고 남으면 이제 스플래쉬, 공격력 업그레이드 이쪽에다 투자하죠. 카시마르님의 평타에 스플래쉬까지 들어가면 전쟁에서 진짜 유용하게 쓰일 거에요.”
“그러면 일단 거리부터 재보자.”
카시마르 일행은 대포를 포탈 쪽으로 발사해서 거리를 재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시야를 공유하는 정령을 포탈 쪽에 띄우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주변을 계속 울렸다.
“생각보다 거리 맞추는 게 쉽지가 않네.”
“그래도 포가 강력해서 그런가 바람 영향은 그다지 안 받는 거 같은데요?”
“그러게 그건 다행이다. 카시마르야.”
“왜?”
“5포인트 더 투자해 봐. 포인트 끝났냐?”
“아직 남았어. 투자할 게.”
“5포인트 정도면 닿을 거 같은데.”
“그러면 포인트 꽤 남겠는데?”
“얼마나?”
“7포인트 정도?”
“그러면 넉넉하게 7포인트 투자하자. 포탈을 투과해도 상관 없으니까.”
“알았어.”
카시마르는 제노키오의 사거리 업그레이드 스킬에 35포인트를 투자했다. 로드로드는 상황에 직접 개입해서 거리와 방향을 맞추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2시간 정도 지나자 OK 사인이 떨어졌다.
“정확히 포탈 쪽에 들어가네. 10번 모두 정확해.”
“그럼 이제 저쪽 포탈을 잘 감시하는 게 중요하겠네.”
“그건 지금까지 잘 해오던 거니까.”
“근데 방금 든 생각인데. 저 대포 유저가 직접 조종해서 발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카시마르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봤다.
“돼.”
“그건 왜?”
“그러면 제노키오가 내게 스플래쉬, 공격력 업그레이드 버프를 걸어주고 내가 저걸 움직여서 발사하면 스플래쉬 공격력 업그레이드가 적용되는 거 아냐? 내가 저걸 사용하면 무기로 판정 받을테니까.”
카시마르의 말에 사람들의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킬 찍었냐?”
“어.”
“그러면 스플래쉬에다가 다 찍어봐.”
“스플래쉬에다가 다?”
“그래. 어차피 공격력은 몇 포인트 차이 나봤자 적용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근데 스플래쉬는 다르지. 땅에 쏘고 퍼지는 범위만 확인하면 되니까.”
“근데 저거 맞춰놨는데 움직여도 되나?”
“다 적어놨어. 포인트나 찍어.”
카시마르는 제노키오의 스플래쉬 버프 스킬에 남은 포인트를 투자했다.
쿵!
“일단 저게 기존의 범위고. 이제 네가 해봐.”
핏불킹이 평평한 바닥에다가 대포를 쏘고 말했다. 평평한 바닥에 대포의 흔적이 남았다. 지금도 꽤 큰 범위였다.
쿵!
이번에는 카시마르가 직접 조종해서 대포를 쏘았다.
흔적을 비교했다.
달랐다.
카시마르가 직접 움직여 쏜 대포가 범위가 더 넓었다. 대충 봐도 차이가 느껴질 정도의 범위였다.
사람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