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캐로 멱살 캐리-154화 (154/205)

# 154

오색 깃발의 문(2)

[오색 깃발의 문은 초대권을 받아서 입장한 자에게 주는 기회와 같소. 다만 기회라고 해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오. 금빛이나 은빛 깃발은 무조건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검은색과 붉은색은 들어가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오. 아주 위험하기 때문이오.]

카시마르는 금빛 깃발 너머의 세상을 바라봤다.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중앙에 깃발의 문이 세 개였다. 이게 금빛 깃발의 효과였다. 금빛 깃발은 깃발의 문의 개수를 늘려주는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금빛 깃발 문 너머로 들어갔을 때 다시 금빛 깃발의 문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아주 희박한 확률이라고 했다.

가장 좋은 건 은빛 깃발의 문.

은빛 깃발의 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랜덤으로 능력 하나를 준다. 주로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지만 가끔 뛰어난 아이템을 주기도 했다. 어떤 능력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초반 여행이 아주 쉽게 풀릴 수 있으니 은색 문이 나오는 건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은색 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청색 문과 붉은색, 검은색 문이 있었다. 카시마르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계단의 세계는 쉽지 않다는 것을 노인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계단 세계의 존재들은 능력도 뛰어나지만 보통의 무기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게 제일 문제요. 바깥 세계의 무기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지.]

[그러면 바깥 세계의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는 게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간혹 바깥 세계의 물건 중에서도 계단의 세계의 존재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요. 그게 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러는지 밝혀진 것도 없고.]

[무기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크게 의미가 없소. 이곳에서 엄청난 능력을 보인다고 해도 그곳에서는 단순한 필멸자에 불과할 테니까.]

[그러면 바깥 물건을 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는 않소. 바깥의 물건을 비싼 물건에 매입하는 수집가들이 있기 때문이오. 또 바깥의 물건에 특별한 힘을 부여하는 특별한 장인들이 있으니 버리는 건 그다지 추천하는 바가 아니오.]

카시마르는 잠시 서서 생각했다. 시간 제한이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상태를 점검하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악스트의 매대에서 구입한 배낭을 메고 있었다. 단순한 등산용 배낭처럼 보였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넓어서 상당히 많은 물품을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었다. 바깥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마법 배낭과 비슷했지만 무게를 줄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이 달랐다.

‘청색 깃발의 문부터.’

청색 깃발의 문은 어떤 위험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부터 다녀오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청색 깃발의 문에 들어서자 작은 방이 나타났다. 작은 방의 중앙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30cm 크기의 작은 조각상이 있었다. 손에 닿는 느낌이 차가웠다. 금속 보다는 가벼운 재질로 보였다.

조각상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시민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사람이 아니었다. 돼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엉성한 조각상이었다. 그러나 허튼 아이템이 주어질리는 없었다. 카시마르는 면접 후에 받은 서류 가방을 손가락을 튕겨서 소환했다.

게이트에서는 카시마르에게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했다.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서류 가방도 그 중 하나였다. 서류 가방은 배낭과 다르게 카시마르의 쇄골 쪽에 새겨진 작은 문신에서 소환되었다. 서류 상자는 어떤 물건이든지 서른 개까지 보관할 수 있었다.

배낭처럼 크기나 무게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유용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유용한 수준이 아니었다. 꽤 높은 수준에 오른 상위 존재들이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시마르는 서류 가방에서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서 돼지 조각상에 붙였다. 그러자 포스트잇에 돼지 조각상이 어떤 아이템인지 설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신의 조각상 - 깨트리면 보호막이 생성된다.]

돼지 조각상은 그리 좋은 아이템은 아니었다. 깨트리는 것으로 보호막을 생성시켜주는 일회용 아이템이었다. 다만 돼지 조각상은 깨지고 나면 그 안에 또 다른 머리의 조각상이 나타날 확률도 있었기에 마냥 나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소모성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다섯 번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한 번 깨트려서 쓰고 나면 깨진 조각들이 재조립되면서 원래의 크기보다 조금 작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돼지 조각상을 챙긴 카시마르는 다시 원래 들어왔던 길로 빠져나왔다. 이제 다음으로 들어갈 곳은 검은 깃발의 문이었다. 그는 검은 깃발의 문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장비를 점검했다. 붉은 별 해마의 물방울도 미리 꺼내두었다.

[검은 깃발의 문에는 괴물들이 출현하오. 괴물들을 물리치면 상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지. 그대는 필멸자니 잘하면 우주적 명성을 얻을 수도 있소. 하지만 이쪽 세계의 괴물들은 보통의 방법으로 잘 죽지 않소. 그러니 붉은 별 해마의 물방울이 있으면 그걸 사용하시오. 다만 붉은 별 해마의 물방울로도 상대가 죽지 않는다면 그대로 도망 쳐야 하오. 특히 그 안의 괴물 중에는 상대에게 최면을 거는 종류의 끔찍한 괴물도 있으니, 최대한 가까이 안 붙는 게 좋소.]

검은 깃발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매캐한 감옥을 연상되는 곳이었다. 검은 깃발의 문 입구에는 폴리스 라인 같은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곳을 넘어가면 괴물의 시선을 끌게 되니 조심해야 했다. 카시마르는 일단 라인 밖에서 작은 횃불을 꺼내 어둠 속으로 던져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횃불은 바닥에 떨어지면 그대로 활활 타올라 주변을 한동안 밝혀주었다. 물론, 불로도 사용 가능했다.

안에 있는 괴물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곰이었다. 겨울 잠이라도 자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크기는 3미터 정도로 바깥 세계의 몬스터들과 비교하면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움직였다.

카시마르의 이런 감각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다. 조금 큰 곰처럼 보이는 이 곰은 스킨 도펠이라는 괴물이었다. 도플갱어의 아류로 분류되기도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도플갱어보다 훨씬 끔찍한 괴물이었다. 스킨 도펠은 대상을 죽인 뒤 그 모습을 모방하는 몬스터였다. 주로 하급 괴물의 모습으로 상대를 유인해서 잡아먹곤 했다. 강력하고 다양한 마법을 쓸 수 있으며 그의 눈빛을 바라본 하위 존재들은 쉽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이 있었다. 카시마르는 이러한 위압감을 느끼고 보다 신중히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라인을 살짝 넘어서 얼른 붉은 해마의 물방울을 불었다. 작은 물방울이 생성되면서 천천히 곰의 가죽을 뒤집어 쓴 스킨 도펠의 얼굴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스럽게도 스킨 도펠은 아직까지도 잠을 자고 있었다.

붉은 물방울이 소리 없이 스킨 도펠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물방울이 스킨 도펠의 몸에 닿는 순간 스킨 도펠은 격렬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붉은 물방울은 스킨 도펠의 몸부림에도 작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있었다.

카시마르는 최대한 라인 가까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공격이 들어온다면 주저하지 않고 뒤로 물러설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라인을 넘어가면 어떤 치명적인 부상도 회복되지만 미션을 포기한 것이 되어버린다. 스킨 도펠은 얼굴에 있는 물방울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쳤지만 불가능했다.

저항 마지막에 스킨 도펠은 카시마르를 노려봤다. 카시마르와 스킨 도펠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카시마르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바깥의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기이한 느낌이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고 호흡도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그제야 카시마르는 스킨 도펠이 현재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임을 깨달았다.

스킨 도펠은 그 뒤로 몇 분 정도 더 발버둥치다가 축 늘어졌다. 완전히 사망한 것이었다.

[필멸자의 신분으로 스킨 도펠을 죽였습니다. 우주적 명성 1이 추가 됩니다.]

스킨 도펠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비록 생명력이나 내구력은 동급의 괴물들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동급 괴물들 보다 월등한 지능과 마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라 신도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게 바로 스킨 도펠이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아직까지도 스킨 도펠의 눈빛이 선명한 느낌이었다. 면접 때 획득한 포스트잇을 스킨 도펠의 시신에 붙였다.

스킨 도펠의 시신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부속물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떤 괴물은 가죽, 내장부터 뼈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스킨 도펠은 그렇게까지 다양한 가치가 있지 않았다. 스킨 도펠의 시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눈이었다.

흰 공처럼 보이는 두 눈.

카시마르는 스킨 도펠의 두 눈을 서류 가방에다 집어넣은 다음 빠져나왔다. 스킨 도펠의 두 눈은 비싸게 거래되는 물건이었다.

그 다음은 붉은 깃발의 문을 처리할 차례였다. 카시마르는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붉은 깃발의 문은 여행하다 보면 비교적 자주 보게 되는 문이요. 상위의 존재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종종 열어놓기 때문이지.]

[상위 존재라면? 계단 세계의 존재들이 안에 있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검은 깃발의 문보다 위험하다고 할 수 있소. 그 안에는 붉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상위의 존재들이 있을 거요. 그들은 중앙에 표시된 곳을 벗어날 수 없고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 공격도 할 수 없소. 그리고 보복도 할 수 없도록 눈도 가리고 있지.]

[그러면 위험할 게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그 안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가 미지수라는 게 문제요. 영웅이나 작은 신 정도라면 크게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그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그보다 상위의 존재라면 어떻겠소? 잘못 공격했다가 그들의 반탄력에 죽는 필멸자들도 상당히 많았소.]

[그러면 그 문은 어떤 의미로 열어둔 겁니까?]

[가능성을 보는 거지. 계단의 세계에는 수많은 세력들이 다툼을 벌이고 있소. 그러니 가능성이 보이는 필멸자들을 포섭하여 육성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 붉은 깃발의 문은 대부분 그런 의미로 열어두는 거라고 보면 이해가 쉽소. 물론, 그걸 통해서 명성을 획득하려는 게 주된 목적이겠지만. 일단 문 안에 있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오. 그들이 내는 시험을 통과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오.]

상위의 존재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의 위험이 따르는 게 분명했다.

붉은 깃발의 문에는 라인이 없었다. 돌바닥으로 이루어진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중앙에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트릴 사내가 붉은 천을 눈에 두르고 서 있었다. 그는 카시마르가 들어서자마자 코를 움직이며 냄새를 맡았다.

“필멸자인가?”

그는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 자신보다 하위의 존재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꽤 높은 존재가 들어와야 여러모로 재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그가 내는 시험도 난이도가 높아지고 그가 붉은 깃발의 문에서 얻어가는 영향력도 높아지는 법이었다.

“필멸자라······ 좋다! 모든 힘을 풀고 있도록 하지. 대신에 한 번의 기회만 주겠다. 한 번의 공격으로 내게 상처를 입힌다거나··· 아니, 조금이라도 놀랄만한 공격을 한다면 그에 맞는 사례를 하도록 하지. 대신 딱 한 번의 공격만 받아주도록 하겠다. 어떤가?”

“좋소.”

카시마르가 짧게 대답했다.

“좋아. 목소리에 힘이 있군. 필멸자여. 이름은?”

“카시마르.”

“이름도 좋군. 준비가 되면 공격하도록.”

카시마르 입장에서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가 힘을 풀었다는 것은 적어도 반탄력으로 인해서 죽을 위험은 없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분위기를 보면 그는 상당히 상위의 존재인 듯 했다. 공격을 성공시키기만 한다면 크게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

카시마르는 두 개의 뿔을 꺼내들었다. 그는 두 개의 뿔을 하나의 뿔로 변환한 다음 성큼다가가서 사내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푸슉!

보통의 무기는 사내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내지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두 개의 뿔은 달랐다. 우주적 존재의 힘이 두 개가 뒤섞여 있는 물건. 거기다 그 재료는 상위 다크 영의 뿔이었다. 슈브 니구라스의 자식들인 다크 영은 최하 세 번의 목숨을 부여받아 태어나는 상위의 종족이었다.

차앙! 펑! 쾅!

하나의 뿔은 사내의 목을 절반 이상 파고들었다. 절반 이상 파고든 상태에서 사내는 힘을 끌어올렸다. 카시마르는 그 여파로 튕겨나가 벽에 부딪혔고 그대로 기절했다. 카시마르가 있던 자리에는 보호막이 깨져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카시마르가 조각상을 이용해서 보호막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힘은 그런 보호막 정도는 간단하게 파쇄할 정도로 강력했다.

사내가 내뱉은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모든 힘을 풀고 카시마르의 공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두 개의 뿔의 위력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고, 그는 죽지 않기 위하여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붉은 깃발의 문에서 규칙을 어겨서 명성이 하락했다는 경고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우주적 명성이 하락했다는 것은 계단 세계의 자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손해였다. 그런 손해를 겪었음에도 사내의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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