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카니발
샤악.
흉흉한 기세의 차크람이 이스메네의 뒷목부터 엉덩이 아래까지 피부를 파고 들었다.
이스메네는 살짝 따끔 거리는 주사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차크람이 만든 상처는 미세했다.
치이익!
마치 지퍼를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리크토는 이스메네의 정수리 부근을 붙잡고 사정없이 당겨버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스메네의 피부 가죽이 그대로 벗겨져서 리크토의 손에 들어왔다. 리크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피부가 벗겨진 이스메네는 허공에서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리크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스메네의 가죽을 갈무리했다.
“좋아. 나는 여기서 볼일 끝!”
툭.
이스메네가 바닥에 떨어져서 허우적댔다. 리크토가 웃으면서 카시마르와 카너를 바라봤다.
“이번이 두 번 째야. 내 뒤통수를 치지 않은 거. 두 번이나 그런 사람은 너희들이 처음이야.”
“······.”
“빚은 꼭 갚지.”
리크토는 카너의 어깨르 툭, 툭 두들기면서 지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뒤돌아섰다.
“맞다.”
휘잉!
그의 차크람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카너와 카시마르 쪽으로 향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바로 프린스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프린스는 놀란 눈빛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차크람의 반응 속도가 워낙 빨랐다.
가볍게 두 조각이 난 프린스는 비참한 몰골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건 서비스. 앞으로 암흑 사원에 올 일 생기면 암흑 돼지들을 가이드로 쓰지 말아. 저놈들은 외부 존재들을 데려와서 함정에 빠트리는 낚시꾼들이니까 말이야.”
“그게 사실입니까?”
“맞아. 그러니까 얼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야. 여기가 안전하다고 했지만 저 녀석이 문을 열면 바로 돼지들이 튀어나오거든. 돼지들과 싸우고 싶다면 더 있어도 되고.”
“이제는 죽었지 않습니까?”
카너가 프린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올 때 이미 연락을 해두었을 걸? 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저 문을 열고 돼지들이 뛰쳐나오지.”
“그들은 주변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잡아먹지 않는다는 거겠지. 사원 안에 들어온 자들은 지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노예로 쓰거나 제물로 사용해.”
리크토의 말을 들은 일행은 이스메네를 이끌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스메네는 공포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그녀는 바깥의 햇빛을 바라보자 더 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리크토는 사원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이미 빠르게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카시마르가 물었다.
“그녀는 고위 존재이기 때문에 당장 죽진 않을 겁니다. 저택으로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죠.”
***
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스메네는 한 달 전에 잡혀 왔던 그 장소에 그대로 묶여 있었다. 강숭이도 그대로였다. 강숭이는 이전에 사용했던 고문 도구들을 만지작 거리면서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이스메네의 상태가 달랐다.
피부를 강탈당한 이스메네의 상태는 아무리 봐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전과는 다를 거야. 이전에는 알아내기 위한 고문이었다면 지금은 고통을 주기 위한 고문이거든.”
강숭이가 이스메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스메네는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강숭이를 바라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강숭이가 뒤를 돌아봤다.
“선생님. 진짜 금제가 걸려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요.”
강숭이는 방금 전 마지막으로 이스메네를 시험해본 것이었다. 그녀가 동료에 대한 금제가 걸려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언가 다른 딜을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스메네는 더 내세울 카드가 없었다.
카시마르는 뿔을 휘둘러서 이스메네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바로 업적과 보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재미난 점은 여행자 사냥꾼에 대한 작은 정보가 카시마르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주적 존재의 보상 또한 주어졌다.
카시마르가 선택한 보상은 칼로의 카라멜.
우주적 존재의 힘이 담긴 아이템인데 특이하게도 일회성이었다.
다른 보상 중에서도 괜찮은 게 꽤 있었지만 카시마르는 카라멜을 선택했다.
그만한 가치를 하기 때문이었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비록 일곱 번 밖에 쓸 수 없는 물건이지만 위력은 정말 대단하니까요.”
칼로는 무수히 많은 손을 가진 우주적 존재.
얼굴은 푸른 해골의 모습이지만 그의 손은 각양각색이었다. 보드라운 어린아이의 손부터 기괴한 괴수의 손까지 칼로의 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칼로의 카라멜은 그런 칼로의 힘을 빌려주는 아이템이었다.
일시적으로 잠재력을 폭발시켜주는 카라멜.
“그렇지만 위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솔직히 조금 걸리긴 합니다. 우주적 존재의 보상이 쉽게 얻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주인님께서는 조금 더 주인님을 믿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 주인님의 잠재력을 믿습니다.”
“제 잠재력이 뛰어날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칼로는 예지 능력이 있는 엘더 갓입니다. 그래서 잠재력을 정확하게 측정한다고 하죠. 칼로의 카라멜은 그런 의미에서 엄청난 아이템입니다. 이미 완성된 고위 존재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지만 성장하고 있는 주인님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제일 좋은 건 이걸 먹을 필요가 없는 거겠지요?”
카시마르가 카라멜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니까요.”
“하긴 그렇지요.”
확실히 위험한 세계였다. 팔번토에서 카시마르를 습격하려 했던 무리들이 더 고위의 존재였다면 카시마르는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긴 하루를 보낸 카시마르는 바로 접속을 해제했다.
***
“이스메네 잡았냐?”
“어. 잡았지.”
“리크토가 뒤통수는 안 쳤고?”
“그런 부분에서는 깔끔하더라고. 오히려 그놈은 우리가 뒤통수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더라고.”
“하여간 의심은 많은 놈이네. 저번에도 그리 의심했었지?”
“어. 뭐, 배경이 특수한 녀석이니까.”
유중악과 오정룡은 비밀이 없었다. 코즈믹 게이트를 하기 전부터 평생을 함께 해온 사이 아니던가. 둘은 서로를 그만큼 믿고 있었다.
“이제 어쩔 거냐? 여행자 사냥꾼 잡으러 다닐 거냐?”
“그럴 생각이야. 왜?”
“대회 열린다.”
“무슨 대회인데? 자크르 챔피언쉽은 아니지?”
“그건 아냐. 자크르 챔피언 쉽은 1년 주기로 열릴 건가 보더라.”
“그러면 이번에는 팀전인가?”
“그래. 5대5 팀전이 나올 거 같다.”
“올킬 방식?”
올킬 방식은 팀에서 한 명씩 나와서 경기를 갖는 걸 말했다. 이긴 사람은 계속 싸울 수 있었고 한 명이 다섯 명을 다 이길 시에는 올킬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건 팀전이 아니지. 아. 그것도 팀전이긴 한가? 근데 이번에 나온 건 진짜 팀전.”
“조합 싸움을 보겠다는 거네.”
“그렇지. 그래서 지금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회는 연합이고 길드고 없으니까.”
“형은? 형은 안 나갈 거야?”
“야. 나는 나가고 싶어도 아무도 같이 나가주질 않아. 막말로 50명이나 500명 정도 대규모 전투면 내가 인기 제일이겠지. 근데 다섯 명이잖냐. 인기는 개뿔. 찬밥 신세다. 요새 아무도 나랑 안 놀아줘.”
“하긴 그렇겠네.”
오정룡은 직업이 다양한 코즈믹 게이트 내에서도 희귀한 케이스의 직업을 가진 유저였다.
대규모 전쟁에 특화된 클래스.
많은 유저들이 오정룡과 같은 직업을 얻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한 직업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솔로 플레이에 취약한 직업들은 늘 있었지만 오정룡의 직업 같은 경우에는 그게 너무 극심했다. 그리해서 대부분의 유저들은 오정룡과 같은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
“너 안 나올 거냐?”
“내가 어떻게 나가.”
“외부 게이트 이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는 크게 관심 없어.”
“상품이 조금 끌릴텐데?”
“뭔데? 이번에도 데몬 토이 주는 거 아냐?”
“데몬 토이도 주는데 그보다는 계단 세계에서 유용하고 쓸 수 있는 아이템이 떨어진다는 소문이야.”
“그래?”
“어. 이 정도면 끌리지 않냐?”
“그닥. 지금도 잘 크고 있어. 아마 다른 유저가 넘어오면 이렇게 빨리 업그레이드 못할 걸?”
“그리 난이도가 높냐?”
“일단 레벨 시스템이 아니니까. 눈에 보이지가 않잖아. 이건 일단 많은 유저들이 넘어와야 알 수 있는 부분이야. 내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될 부분이니까.”
“네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어떤데?”
“답답한 게 있지. 사냥을 한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영향력을 모으면 강해지는 게 아니었나?”
“그건 기초 단계야. 쉽게 설명하자면······ 저번에 내가 계급에 대해서 알려줬잖아.”
“필멸자, 초월자, 작은 신 뭐 그런 거?”
“어. 초월자가 영웅 계급이랑 같은 건데 이건 지역에 따라서 부르는 게 다른가 봐. 어쨌든 영향력의 크기로 나눠놓은 거란 말이야. 근데 어느 정도 올라가면 우주적 명성으로 올릴 수 있는 건 한계치가 있어.”
“결국 업적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 거지.?”
“어. 우주적 명성은 기본 화폐로만 작용하는 것 같아. 물론, 많으면 좋긴 하겠지만 명성이 많다고 해서 강해지거나 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업적은 다르지. 업적이 높아지면 상위의 존재가 될 수 있고, 더 강해질 수 있으니까. 보니까 여기 세계는 시스템이 게임이라고 이해 하기 보다는 그냥 다른 세계라고 이해하는 게 편해.”
“다른 세계라······.”
“어. 다른 세계.”
“그래서 너는 다음 계획이 뭔데?”
“지금 고민 중이야. 사원을 돌까. 아니면 여행자 사냥꾼들 잡으러 다닐까. 일단 둘 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서.”
“사원은 또 뭐야?”
“아. 사원 이야기는 안 했던가?”
유중악은 사원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오정룡은 그걸 주의 깊게 들었다.
***
“위에서 카니발을 열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사냥개의 사냥꾼들이 모두 모인 자리.
몰텍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웬만한 일에는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 강심장인 사냥꾼들이 크게 반응했다.
“갑자기 왜?”
“언제는 예고하고 열린 적 있었나?”
딘탈로스의 사냥개들에게 카니발은 축제가 아니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내전.
불멸의 굶주림과 시간의 광기 사냥개의 사냥꾼.
아우터 갓의 계시가 내려오면 이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다.
다시 계시가 떨어질 때까지.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을 잡아먹고 보다 강해진다.
쉽게 말하자면 물갈이를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물갈이 과정에서 나오는 출혈이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었다.
이전 카니발에서는 사냥개의 사냥꾼의 수장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카니발이 끝이 났다.
계시가 내려올 때까지 싸움을 지속하는 것.
그리고 세 주축 중 수장 하나가 죽는 것.
이 두 가지만이 카니발을 멈출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카니발이 열린단 말입니까? 어디에서?”
렘이 물었다.
“이번에는 사냥개의 들판에서 열릴 것이다.”
“오고 있겠군요.”
“그래.”
몰텍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니 장내의 존재들 중 심각한 표정이 아닌 자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몰텍은 뒤에 있던 사내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두루마리를 들고 있던 비서가 나서서 큰 소리로 전투의 축복을 읽기 시작했다.
“아흔 아홉 명의 뛰어난 사냥개의 사냥꾼들이여······.”
“잠깐!”
전투의 축복을 멈춘 건 몰텍의 왼쪽 자리에 앉아 있는 베르긴이었다. 아르긴은 벨로바와 흡사한 생김새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날개와 눈이었다. 그의 눈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베르긴. 전투의 축복······.”
“닥쳐봐.”
렘의 말을 베르긴이 심각한 목소리로 잘랐다. 몰텍은 인상을 썼지만 바로 베르긴을 나무라지 않았다. 베르긴은 가볍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몰텍님.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축복에 잘못 된 게 있어서 말입니다. 왜 아흔 아홉명입니까?”
“뭐?”
“아흔 여덟 아닙니까?”
베르긴의 말에 장내에 있던 몇몇 존재들이 크게 반응했다. 몰텍과 렘도 마찬가지였다.
베르긴은 오랫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존재.
당연히 카시마르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아. 그······ 그 녀석 이름이 뭐지?”
천하의 몰텍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를 아흔 아홉 번째 사냥꾼으로 지정해 놓고도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냥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이 사냥꾼이 들어왔다는 소식만 살짝 들었을 뿐이지 실제로 만난 적이 있으니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 당장 불러와!”
몰텍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