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폭주
“쿨타임이 짧아진다는 건 새로운 정보로군.”
로스티드의 공은 상당히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허공 위에 있지 않았다. 공은 전원이 꺼진 가전제품처럼 바닥에 떨어져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키니가 공과 비슷하게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스티드의 공을 다루는 기술은 카시마르의 염력과 흡사했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로스티드의 공을 익힌 자는 딱히 염동력에 능숙하지 않아도 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스티드의 공은 사용자의 멘탈에 영향을 받는 물건.
주인인 키니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무용지물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시마르는 키니보다 몇 수는 위에 있었다. 심리전에서 완벽한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키니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고통.
불멸의 굶주림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베닉 일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고통을 겪어볼 이유도 사건도 그다지 없었다.
카니발에 몇 번이나 참여했으면서도 한 번도 죽지 않은 건 불멸의 굶주림에서 그만큼 그녀를 특별하게 대우했기 때문.
그런 그녀가 생전 처음으로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독과 저주.
독과 저주 중에 가장 끔찍한 부분만 배합한 것과 같은 고통.
고통을 느껴본 적도 별로 없는 그녀가 감당하기에 블러드 포그의 고통은 너무나 강렬했다.
“네가 많이 떠들어준 덕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 좋아.”
카시마르가 알게된 새로운 사실은 바로 강압적인 초대가 회수를 거듭할수록 재사용 시간이 짧아진다는 점이었다. 이전에 키니가 떠들었던 것들은 사실 카시마르가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던 정보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키니가 내뱉은 것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보였다.
“내가 필멸자라서 그렇게 정보를 퍼준 거겠지? 그래서 난 너에게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을 거야.”
“웨에엑!”
카시마르가 다가서자 키니가 다시 한번 구토했다. 이번에는 초록색 토사물 끝에 선홍색 피가 섞여 나왔다. 키니는 몸을 부들 떨면서 카시마르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덩치의 키니가 허수아비처럼 바닥을 기면서 카시마르를 힘겹게 올려다보는 모습은 묘한 느낌이었다.
키니는 이제 시야도 흐려지고 있었다. 블러드 포그는 그녀의 생명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빼앗아가고 있었다.
카시마르는 이번 전투로 얻어가는 게 많이 있었다. 그것은 불멸의 굶주림의 지배자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는 베닉 종족에게도 블러드 포그의 힘이 통한다는 것.
그 정도면 밀폐된 공간이기만 하면 대부분의 존재에게 블러드 포그가 통한다고 할 수 있었다.
“리크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리크토 그놈이 배신을······.”
카시마르의 말투는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대화의 주도권이 이제는 그에게 있다는 점이었다. 카시마르는 키니의 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키니는 필멸자가 아니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분명히 부활해서 다시 고위 존재로서 삶을 이어나갈 것이었다.
그래서 카시마르는 대답을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대답 여하에 따라서 리크토에게 여파가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잠깐 생각에 잠긴 카시마르는 리크토에게 영향이 덜 가도록 하는 쪽을 택했다.
리크토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리크토가 불멸의 굶주림 내부에서 처리가 되어버린다면 그로서는 빚을 받을 길이 없으니까.
카시마르는 리크토에게 제대로 빚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이전까지는 빚을 주는 대로 받아야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키니를 잡았으니 그는 꽤 큰 기회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상위의 존재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다양한 능력이나 아이템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모두들 카시마르가 카니발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아주 초반부터 빗나가고 있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근데 지금 네가 죽는 건. 리크토의 문제가 아니라 약해서라고.”
퍽!
카시마르가 키니의 머리를 축구공 차듯이 차버리면서 말했다.
***
“너무 늦는군요.”
마크리엘이 말했다. 그의 말투는 굉장히 부드러웠다. 라오와 몰텍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말투는 부드럽지만 목소리는 굉장히 저음에다가 기괴한 금속음까지 같이 나는 터라 상당히 듣기 불쾌했다.
그는 슬슬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벌써 들어간 지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시간을 끄는 건 계획에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키니님이 계획대로 잘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크리엘의 측근 중 하나인 도르기가 말했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 필요는 없죠. 공이 서른 개 정도만 넘어가도 계획대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키니님이 좀 더 욕심을 내시는가 봅니다. 아니면 사냥꾼의 신입이 예상외로 잘 버티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런가요?”
마크리엘은 도르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다음 뒤를 돌아서 리크토를 바라봤다. 리크토는 제일 구석진 자리에서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있는 데다가 불멸의 굶주림의 존재들이 일부러 리크토와 멀리 떨어져서 자리를 하고 있었다.
불멸의 굶주림의 일원들이 리크토 주변에 없으니 리크토가 마크리엘의 시야에 빠르게 잡혔다.
리크토는 마크리엘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빠르게 날아서 마크리엘의 근처로 당도했다.
“신입 사냥꾼이 작은 신이라고 했었지요?”
“예.”
“너무 늦는 것 같은데 짐작 가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불안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몰텍이 어떠한 연유로 그를 사냥꾼으로 뽑았는지 모르는 점. 제가 몇 번의 거래를 해봤지만 특별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놈의 애완동물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긴 했지만 지능이 뛰어난 것일 뿐 별다른 힘은 없어 보였습니다.”
“대체 몰텍은 무슨 생각으로 그를 뽑은 것일까요? 문득 이게 미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크리엘님.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미끼로 사냥꾼을 뽑는다면 사냥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몰텍의 지배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몰텍과 비견될만한 전사들이 꽤 있지 않습니까. 특히 베르긴과 렘은 수장을 해도 될만한 위치의 전사들입니다.”
도르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크리엘은 도르기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둘 다 욕심이 없지요. 둘 다 몰텍을 열렬히 지지하고요.”
“무엇보다 카니발이 언제 열릴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떤 예지 능력자도 예지할 수 없는 게 카니발의 시기입니다.”
“하긴 그렇지요.”
도르기의 말을 들은 마크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키니님도 카니발에 벌써 여러 번 참여했습니다. 작은 존재에게 당할 정도로 허술한 분이 아닙니다.”
“두 가지 부분에서 걱정이 됩니다. 하나는 예상보다 너무 늦어진다는 것. 다른 하나는 사냥꾼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리크토가 신입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텐데요.”
“있다하더라도 무얼 해주겠습니까. 사냥꾼들이 가진 아이템들은 그보다 고위 존재가 되어야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닌 아이템도 많이 있지요. 도르기.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조금 성급했던 것 같기도 하군요.”
“그에 대한 대비도 충분히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키니님에게 충분히 지원했습니다. 비록 일회성 아이템들이지만 불의의 기습 같은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도르기의 말에도 마크리엘은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마크리엘은 리크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하려고 했지만 허공에 떠 있는 집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말은 전투가 끝이 났다는 이야기.
사냥개들의 이목이 모두 한군데로 쏠렸다.
“드디어 끝난 모양입니다.”
도르기의 말에 마크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흡족한 표정을 짓던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 이유는 집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존재가 키니가 아니라 카시마르였기 때문이었다.
카시마르의 등장에 놀란 것은 불멸의 굶주림뿐만이 아니었다. 사냥개의 사냥꾼, 시간의 광기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저···저게.”
카시마르의 손에는 키니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키니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대로였지만 카시마르는 초대받기 전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퍽!
카시마르는 불멸의 굶주림 쪽으로 바라보고는 키니의 머리를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키니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에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본 마크리엘이 엄청난 속도로 카시마르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 안됩니다! 안 됩니다! 마크리엘님!”
도르기를 비롯한 불멸의 굶주림의 일원들이 얼른 마크리엘을 향해 날아갔다.
콰콰콰콰쾅!
마크리엘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카시마르 주변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폭발이었다.
카시마르는 그로를 이용해서 방어하면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마크리엘의 공격은 그로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카시마르는 순식간에 폭발에 휩싸여 큰 데미지를 입었다. 마크리엘은 다시 한 번 폭발을 일으켰고 그걸로 목표를 완벽하게 지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싸움은 카시마르와 마크리엘의 자크르가 아니었다.
카니발.
마크리엘은 잠시 이성을 잃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냥꾼의 일원들이 우르르 날아와 카시마르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낙하산. 너 진짜 물건이다.”
사냥꾼의 일원인 소르베알이 말했다. 그는 1미터도 안되는 작은 체격을 가진 존재였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인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눈은 피처럼 붉었고 귀는 엘프처럼 뾰족했다.
소르베알은 얼른 방어막을 쳐서 카시마르를 보호했다.
카시마르는 마크리엘의 첫 공격으로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걱정 마. 너 죽게 안 둔다. 낙하산. 네가 이번 카니발의 일등공신이 될 테니까.”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카시마르는 카니발이 벌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렘과 베르긴이 선두에서 마크리엘을 노렸다. 둘이 마크리엘을 노려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걸로 1위는 사냥꾼의 차지였다. 카시마르가 이미 키니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아무런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크리엘을 죽이는 순간 카니발은 사냥꾼의 승리로 끝이었다.
그러니 한 주축의 수장이 앞으로 나온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걸 불멸의 굶주림에서도 알고 있었고 얼른 마크리엘을 보호하려 치고 나왔다.
휘이이이잉!
렘이 불꽃을 내뿜으며 마크리엘을 공격했다. 마크리엘은 자신의 주변에 폭발을 일으키고는 그걸 다시 입으로 마셔버렸다. 그러자 폭발이 마크리엘 입속으로 사라졌다가 더 거대한 폭발로 나타났다.
“마크리엘님! 베르긴! 베르긴을 조심하십시오!”
상성상 렘은 마크리엘에게 그리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크리엘에게 위험한 상대는 묵직한 방어력과 근접 공격력을 지니고 있는 베르긴.
벨로바와 다르게 베르긴은 사마귀 같은 팔로 상대를 잘라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쿠우우웅!
큰 폭발이 터져나왔고 도르기가 얼른 그 폭발속으로 뛰어들었다. 베르긴과 렘의 조합이라면 마크리엘이라도 꽤 위험할 터였으니까. 그러나 도르기의 이러한 걱정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베르긴이 마크리엘을 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르긴은 도르기를 노렸다.
마크리엘의 힘을 몇 배나 증폭시켜줄 수 있는 참모.
“이······.”
도르기는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죽었다. 베르긴이 도르기의 머리를 깨물어서 그대로 들어 올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도르기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도르기를 처리한 베르긴은 폭발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앞에 밀려드는 불멸의 굶주림들을 향해서 움직였다.
지금의 기회였다.
상대가 정비를 하기 전에 몰아치는 게 중요했다.
그걸 알기라도 하듯이 사냥꾼들이 뒤 따라서 전투에 돌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