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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캐로 멱살 캐리-185화 (185/205)

# 185

자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전령은 안 보내도 될 뻔했소이다. 알고 계셨던 거요?”

“전혀.”

“전혀가 아닌듯 한데. 대체 뭘 내어 준거요?”

“내어주지 않았소. 내어주지 않아서 마음이 별로요. 좀 더 믿어줬으면 면이라도 섰을 텐데.”

카니발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 카니발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보다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피의 대부분은 바로 불멸의 굶주림 쪽 존재들의 피였다.

사냥꾼과 굶주림이 제일 먼저 격돌했고 시간의 광기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본래였다면 이렇게 급작스럽게 전투가 벌어지면 가만히 지켜보는 게 전략적으로는 좋은 판단이었다.

그래야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 특수한 경우였다.

굶주림의 수장인 마프리엘이 앞으로 치고 나온 상태였으니 시간의 광기 쪽도 자연스럽게 참전을 해야 했다. 혹시나 마프리엘이 잡혀버리기라도 한다면 시간의 광기가 자연스럽게 꼴등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니발의 점수는 플러스 마이너스가 되는 게 아니었다. 한 마디로 아군을 아무리 많이 잃어도 그만큼 상대를 죽이면 승리할 수 있는 게 카니발의 룰이었다.

불멸의 굶주림이 사냥개의 사냥꾼과의 충돌에서 한 명이라도 잡아낸 채로 카니발이 끝나면 시간의 광기는 그대로 패배하게 될테니 얼른 움직여야 했다.

시간의 광기에서는 라오의 지시대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노린 곳은 사냥개의 사냥꾼과 충돌한 지점이 아닌 바로 불멸의 굶주림의 후미였다.

카니발은 살육전이지만 원래는 이렇게까지 무식한 방법으로 붙지 않는다.

이들은 계단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우러러보는 고위 존재들.

지역 신, 나라 신, 세계 신 간단하게 부르곤 하지만 실상 이들은 낮은 존재들에게는 상당히 큰 존재들이었다.

당장 나라 신만 하여도 그 일대에서는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가장 따르는 존재가 없다고 일컬어지는 리크토만하여도 거느리고 있는 존재들이 몇백이 넘어갔다.

이스메네는 어떠했는가. 중립 인사들은 원래 따르는 존재들이 적었는데, 그런데도 이스메네의 저택에는 천 명이 넘는 식솔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 중 전투를 할 수 있는 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나라 신의 영향력이라는 게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장기판의 병졸들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이건 이전까지 벌어졌던 카니발이 아니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속 시원하게 말해줄 법도 하잖소.”

“무엇을?”

“신입에 대해서. 솔직히 키니를 잡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 덕분에 일이 이렇게 쉬워졌잖소.”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싸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두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라오와 몰텍이었다. 둘은 영화 감상이라도 하듯이 전투를 지켜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믿지 않았다면 믿겠소?”

“함정을 파놓은 건 아니란 말이군.”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카니발이 언제 열릴 줄 알고?”

“카니발이 열릴 때를 대비해서 데려다 놓은 게 아니란 말이오? 언제 열릴지는 모르나 언젠가 열릴 거라는 건 알지 않소?”

라오의 말을 들은 몰텍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라오를 바라봤다. 라오와 몰텍의 시선이 잠깐 부딪혔다.

“필멸자를 데려다 사냥꾼으로 쓴다는 건 바로 그런 이유 아닌가?”

라오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 건 기대도 안 했소이다. 저 녀석을 처음 봤을 때 정말 필멸자였거든. 지금은 작은 신이지만 그때는 작은 신도 아니었소.”

“그래도 데려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오.”

“내기를 했지.”

“내기?”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붉은 깃발의 문에 들어갔었소.”

“성취가 있었단 이야기로군.”

“없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 그곳에서 저 친구를 만났소. 아무 것도 아니었지. 시험을 치를 정도도 되지 않았소. 아시잖소.”

“하긴······ 그랬을 것 같기도 하군.”

“그래서 문제를 내기로 했소. 대답이 마음에 들면 크게 보상을 하기로 했지. 그 정도면 나로서는 후하게 호의를 베푼 셈이니까.”

“그것도 그렇군.”

라오는 전투보다는 몰텍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협공을 받고 있는 불멸의 굶주림의 존재들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냥개들 중 가장 강한 존재들이 모여 있는 집단은 사냥꾼이었고, 그 다음은 시간의 광기였다.

그러나 시간의 광기나 불멸의 굶주림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둘이 붙으면 불멸의 굶주림이 조금 더 유리하다는 편이 있었다. 그 이유는 불멸의 굶주림에 있는 존재들은 특이한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니의 경우처럼 불멸의 굶주림은 그런 특이한 능력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집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전면전.

전면전으로 붙으면 가장 취약한 집단이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있었다.

굶주림 쪽에서는 최대한 마프리엘을 보호하면서 뒤쪽으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려 했지만, 사냥꾼과 광기 쪽에서 집요하게 따라붙어서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를 냈는데 기가 막힌 답을 하더군. 그래서 소원을 물었지. 그랬더니 사냥꾼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하더군.”

“그래서 데려온 거요?”

“그럴 리가. 다른 소원을 말하라고 했는데 필요 없다 했소. 필멸자 주제에 약점을 기가 막히게 눈치 챈 거지.”

“무시하지 그랬소?”

“소문을 내고 다니겠다더군. 그래서 죽여버리려 했는데 재밌지 않소. 그래서 진짜 데려왔소. 지원을 해주고 어디까지 클 수 있는 보자는 식으로. 그래서 일단 작은 신으로 만들어주었지. 그 뒤로 지원을 해주긴 했는데 신경 쓰진 않았소. 나름 치열하게 살았는지 크긴 큰 모양인가 보더군. 키니를 잡을 정도면.”

몰텍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적당한 진실을 섞어서. 거짓말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건 바로 진실을 적절히 섞었을 때. 지금 몰텍의 이야기는 나름 그럴듯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라오는 그걸 전적으로 믿지 않을 터였다. 후에 나름 조사를 해서 진실을 가려내려고 할테지만 오히려 그게 더 몰텍의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줄 것이었다.

몰텍과 카시마르가 붉은 깃발의 문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몰텍이 라오에게 이렇게까지 교묘하게 거짓을 늘어놓은 것은 바로 뿔 때문이었다.

카시마르가 가지고 있는 그 우주의 기운이 담긴 무기.

몰텍에게 통한다면 라오에게도 통한다. 그 어떤 존재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있기에 그 사실만큼은 반드시 숨겨야만 한다고 몰텍은 생각했다.

“뭐, 퍽 그럴듯한 이야기로군.”

“믿을 거라는 생각 안 했소. 믿지 않아도 상관 없고. 어쨌든 저 친구는 이제 사냥꾼이니까.”

“키니를 어떻게 잡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테고.”

“나도 모르는 걸 어찌 알려준단 말이오?”

라오와 몰텍의 시선이 다시 한번 부딪혔다. 라오와 몰텍은 딱 이 정도 사이였다. 적당히 정보를 주고 받고, 적당히 싸울 수도 있는 사이.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놓고 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이였기에 둘은 의외로 대화를 자주 하곤 했다.

“굶주림 쪽은 이번에 큰 타격을 입을 테고······.”

“그거야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지 않소.”

“균형이 무너져 내리면 개입할 여지가 생기지 않겠소?”

라오의 말을 들은 몰텍이 피식 웃었다. 라오는 몰텍의 웃음을 보고서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위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소?”

“그거야······.”

라오가 몰텍을 보며 웃었다. 몰텍은 라오의 웃음 속에서 탐욕을 보았다. 라오는 위의 주시에도 개의치 않고 불멸의 굶주림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가만 보면 당신은 일을 너무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소.”

몰텍의 이야기에 라오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올라갔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웃음이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드시오?”

“타밀라의 물감으로 사냥개 전체를 뒤집어 놨던 건 기억 나지 않으시오? 그때 약속한 게 있을텐데.”

“그때!”

라오가 처음으로 인상을 쓰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예언자가 분명히 사냥개에 타밀라의 물감이 있다고 했었소.”

“하지만 나오지 않았잖소.”

“그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군. 어쨌든 어떻게 할 거요? 벌써 꽤 많이 사라진 것 같군.”

라오가 턱짓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불멸의 굶주림의 존재들이 상당히 많이 쓰러진 상태였다.

“베닉 일족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소.”

“만만하게 보지 않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굶주림의 일원들 중에는 죽으면 소멸되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많다는 것은 알지. 어떻소?”

“뭐가 어떻다는 말이오?”

“이참에 굶주림에 관한 이야기도 끝내는 게 깔끔하지 않겠소?”

“어떻게 끝내자는 거요?”

“카니발에서 이기는 쪽이 알아서 하는 건 어떻겠소?”

“지는 쪽은 개입하지 않고?”

몰텍의 질문에 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니발은 잡아먹기 위한 행사가 아니오. 윗분들은 별로 반갑게 생각하지 않을 거요.”

“윗분들이 한 분만 계시는 것도 아니지 않소.”

“좋소. 그러면 이기는 쪽이 알아서 하는 걸로 합시다. 룰은 어떻게? 굶주림 쪽을 처리하고 붙는 걸로 하겠소?”

“그러면 룰이 복잡해지지 않소. 마프리엘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도 찜찜한 일이고. 우리 사이에 청산해야될 것들이 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룹시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라오의 말은 불멸의 굶주림을 누가 더 많이 잡아먹느냐로 승부를 가리자는 이야기였다.

몰텍으로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라오 쪽도 자신은 있었다. 일단 시간의 광기 쪽이 사냥개의 사냥꾼보다는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몰텍과 라오는 간단하게 합의를 하고는 계속 전투를 감상했다. 둘이 전투에 뛰어들지 않는 건 굳이 뛰어들지 않아도 상황이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라오와 몰텍은 한 가지 명령만 더 부하들에게 전달한 후 카니발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들이 전달한 명령은 하나였다.

시간의 광기, 사냥개의 사냥꾼들은 서로를 건드리지 말 것.

철저하게 불멸의 굶주림만 공격하라는 이야기였다.

***

카시마르는 소르베알의 치료로 금방 정신을 회복했다. 소르베알은 전투 특화 존재들만 모여 있는 사냥개들 중에서 몇 안 되는 서포터 위치의 존재였다.

“카니발은 어떻게 됐습니까?”

카시마르가 물었다.

“보다시피.”

소르베알이 살짝 옆으로 비켜주면서 말했다. 그러자 전투의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불멸의 굶주림은 방진을 형성하고 버티고 있었지만 양쪽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버티기에는 쉽지 않아 보였다.

불멸의 굶주림의 존재는 벌써 백 명 가까이 쓰러진 상태였다. 카니발이 열린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많은 숫자가 죽은 것은 엄청난 손실이라고 봐야했다.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있어도 돼. 어차피 일등공신은 너야. 누구도 그거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을걸? 어차피 끝날 일이고.”

“그런가······.”

“질문 하나만 하자.”

카시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니를 어떻게 잡은 거지?”

“······.”

소르베알의 질문에 카시마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잘.”

“잘?”

“잘.”

“아예 푹 재워줄까?”

“열심히 잘 싸워서 이겼는데. 이겨도 문제가 되는 겁니까?”

“푸하하하! 낙하산 제대로 배웠구나? 그렇지. 가지고 있는 패는 함부로 까는 게 아니지.”

“전투가 멈췄습니다.”

“저건 잠시 숨 고르기 하는 거지. 이번 카니발에서는 불멸의 굶주림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이 정도로는 어림 없어.”

소르베알이 살짝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니 진짜 멈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리가. 멈출 이유가 없는데?”

소르베알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카시마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투는 거짓말처럼 멈췄고, 그 누구도 더 싸울 의사가 없어 보였다.

카시마르와 소르베알은 곧 전투가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프리엘이 이유였다.

마프리엘이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결을 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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