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빚
“호위로 오신 겁니까?”
카시마르가 물었다. 벨로바에 대해서는 이전보다 더 아는 게 많아진 상황.
그 이유는 카너가 보좌관으로 임명되고 바로 벨로바에 대한 자료를 받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벨로바는 고위 마족이었다.
파리와 유사한 곤충의 모습을 한 마족.
이들은 끔찍한 외관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태어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카시마르 입장에서는 벨로바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사냥꾼의 일원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대접받을만한 태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하······.”
카시마르가 말하자 벨로바가 한숨을 푹 쉬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말투였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벨로바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벨로바가 감전된 사람처럼 머뭇거리더니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카너가 대답했다.
벨로바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 괴성을 질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는데, 가만히 보니 그게 그냥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 대화를 하고 있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카시마르와 카너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택의 마당은 넓었고, 벨로바는 그곳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서 계속 괴성을 질러댔다.
10분 정도 괴성을 지르던 벨로바는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더니 하늘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카시마르와 카너의 시선도 하늘로 향했다.
잠시 뒤에 하늘에서 베르긴이 나타났다. 벨로바는 얼른 날아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베르긴의 옆에 있던 호위가 훨씬 빨랐다. 베르긴의 호위 중 하나는 철가면을 쓴 존재였다.
1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베르긴 옆에 있으니 무척 작아보였다. 그도 베르긴과 같이 마족이었다.
거미줄을 뿜어내는 능력을 지닌 마족.
입에서 실을 토하자 허공에 커다란 거미줄이 생겼다. 벨로바가 날아가다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댔다. 그때 베르긴이 얼른 벨로바에가 다가가서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허공에 떠 있던 거미줄이 흩어졌다. 벨로바를 붙들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거미줄이었지만 베르긴에의 힘에 허무하게 흩어졌다.
쿵! 쿵! 쿵!
베르긴이 벨로바의 뒷덜미를 잡고 무자비하게 바닥에 내팽겨치기 시작했다. 마치 이불을 터는 듯한 동작이었다.
“조금 심한 거 같은데요.”
카너가 말했다. 그러자 카시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긴의 구타는 한동안 지속 되었다. 지독한 구타 뒤에 다시 대화가 이어졌고 벨로바는 축 늘어진 상태로 카시마르 앞에 섰다.
“미안하네. 조금 의견 차가 있어서 말이야.”
“대화는 잘 끝나셨습니까?”
“그럼. 자. 말해 봐.”
"안.녕하세요. 주인님을 새로 모시게 된 벨로바라고 합니다."
베르긴이 벨로바의 뒷목을 잡았다. 그러자 벨로바가 고개를 숙이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약간의 살기가 느껴지는 대사였지만 카시마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베르긴은 묘하게 생긴 반지를 카시마르에게 건넸다.
“나와 다이렉트로 연락을 할 수 있는 물건이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정말 혹시나 이 녀석이 다시 실수를 한다면 반지를 문지르도록 해.”
“그렇게 하죠.”
벨로바가 호위로 합류하게 되었다.
***
서열 문제로 강숭이와 벨로바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강숭이는 카시마르의 노예고, 벨로바는 호위라서 둘의 위치가 다르긴 했다. 그래서 카너처럼 강숭이에게 적당한 대우를 해주면 그만인 일이었는데, 벨로바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카시마르의 호위로 배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강숭이와 트러블까지 생기니 더 기분이 최악이었다.
제일 문제는 강숭이나 벨로바나 카시마르 아래에 있다는 점이었다. 카시마르는 말로 알아서 잘 해결하라고 했기 때문에 벨로바는 무력을 쓸 수가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말싸움으로 하면 강숭이를 이길 존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특히 강숭이의 깝죽거림은 현역 시절 강철 멘탈이라고 불렸던 카시마르마저 빡치게 만들었을 정도니까.
벨로바와 강숭이의 다툼은 강숭이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어쨌든 강숭이가 카시마르 밑에 제일 오래 있었으니 명분 상으로도 벨로바가 밀리는 건 확실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바로 마켓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카시마르는 간만에 접속 하기 전에 핏불킹과 현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너무 더디지 않겠냐?”
“어차피 나는 이 가면 때문에 스킬을 쓸 수가 없잖아. 계단 세계에서는 좋은 전투 기술을 얻는 것도 어렵지만, 얻는다고 해도 쓸 수가 없으니 의미가 없어.”
“그걸 스탯 빨과 아이템 빨로 커버하겠다?”
“그거지.”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좋긴 하겠다만 효율이 극악이라며. 거기 존재들 상대할만큼 강해지려면 강화제를 얼마나 때려 부어야 하는 거냐?”
“어마어마하게.”
“그럴만한 돈은 있고?”
“벌어 봐야지.”
“괜찮을지 모르겠다.”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돈만 있으면 꾸준히 강해질 수 있다는 거야. 강화제는 생각보다 구하기 쉬운 아이템들이니까. 어떻게 보면 널려 있지.”
“널려 있다는 건 그만큼 비싸고 안 좋다는 거 아니겠어?”
“그렇지. 그래서 강화제를 쓰는 존재들은 한정되어 있어.”
“그래. 저번에 네가 이야기 했잖아. 조련사들이 많이 쓴다고.”
“어. 지능이 낮은 괴수들을 강화하는 방법은 강화제 밖에 없으니까.”
고위 존재들 중에서는 괴물을 이용해 싸우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데리고 있는 괴수를 강화시키기 위해 강화제를 필수적으로 사용해야하는 자들이었다.
“혹시 그 라코이 가문의 힘을 빌리려는 거야?”
“그쪽은 충분히 도움을 주고 있어. 계획이 있긴 하지만 당장 목 맬 건 아니고. 그보다 형 쪽은 어떤데?”
“뭐 어때. 대회 준비하고 그러지. 운영진이 너한테 연락하거나 한 건 없었지?”
“전혀.”
“그럼 특별 이벤트 같은 건 없겠네. 소문이 워낙 많아서.”
“어떤 소문?”
“전에 월드 자크르 챔피언쉽 끝나고 불꽃 기사와 싸움 있었잖냐.”
“그랬지. 아. 그런 것처럼 날 등장시키겠다고?”
“응.”
오정룡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팀전인데 날 등장시켜서 어쩌려고?”
“방법은 생각하면 많지. 근데 됐어. 연락 가지 않았다며.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계단 세계로 유저들이 대거 넘어가면 말이다.”
“넘어가면?”
“그때는 운영진이 뭘 하고 놀까?”
“뭘 하고 놀다니?”
“아니. 지금 코게는 운영진들이 이벤트도 하고 그래서 밸런스를 맞추고, 아니다 밸런스를 맞춘다는 표현은 좀 그렇구나. 아무튼 적당히 관리를 하고 있잖아. 근데 계단 세계는 보니까 그런 게 전혀 안 먹히는 동네인데.”
“거기서부터는 이제 운영진이 손 떼고 그냥 지켜보겠다는 거 아닐까? 일단 계단 세계가 시스템은 더 탄탄해. 스탯 이런 것만 없다 뿐이지 훨씬 잘 정돈된 세계야. 그러니까 난이도도 훨씬 높고.”
“넘어가면 알 일이지. 그 여행자 사냥꾼들 잡는 이야기는 좀 진전이 있어?”
“별로.”
“그래도 이야기 들어보면 재미는 있나 보네.”
“솔직히 제국 쪽에서 있을 때는 반쯤 노가다였잖아. 컨텐츠가 많아서 재밌긴 해도 좀 그랬지. 근데 지금은 안 그래.”
“노가다가 없는 세계라··· 솔직히 그거 때문에 난이도가 막장인 거야. 유저들 대부분이 움직이는 만큼 성과가 있는 걸 바라는데, 거긴 그렇지가 않으니까.”
“그러니까 진짜 재밌어 지는 거지.”
“너만 재밌을 수 있어.”
“형도 한 번 와봐. 재밌을 거야. 아직 영상 공유가 안 되는 터라 말로 설명하는 건 좀 그래.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운영진이 개입하는 이벤트 말이야. 가능해.”
“어떻게?”
“이전처럼 세계관 자체를 흔드는 큰 이벤트는 어려워도 그런 거 있잖아. 유저들에게만 뜨는 메시지 같은 거. 그런 걸로 이벤트 할 수 있지 않을까?”
“간접적인 지원이라는 거지? 하긴 지금도 간접적으로 움직이긴 하지. 그게 너무 심해서 직접적인 것처럼 보여서 문제지만.”
“그러니까. 카니발 때도 아우터 갓들이 개입해서 아이템 주고 그러잖아. 그런 퀘스트 주고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지.”
“다만 이전과는 좀 형식이 달라지겠네.”
“그건 그렇겠지.”
유중악과 오정룡은 대화를 짤막하게 마치고 코즈믹 게이트에 접속했다.
***
마켓은 사냥개들이 대부분 참여하는 이벤트였다. 전리품과 보상을 처분하여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 마켓에 참석하는 건 아니었다. 사냥개들 중에는 마켓에 참여하는 걸 귀찮아하는 존재들도 있었다.
카시마르도 그랬다. 카시마르가 내놓은 로스티드의 공이 이번 마켓의 주요 쟁점이 될 건 확실했지만, 굳이 카시마르가 그걸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카시마르는 경매나 물물교환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하는 아이템들은 굳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시마르는 마켓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켓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참석했다고 할 수 있었다. 카시마르는 이번에 입수한 아이템 고블의 데칼코마니 아이템을 사용해서 마켓에 참석을 했기 때문이었다.
고블의 데칼코마니는 분신을 만들어준다. 분신은 별다른 힘이 없지만 지금 카시마르가 실행 하려는 계획에는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켓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카시마르가 분신을 만들어서 마켓에 보냈다. 그렇다는 것은 그 사이에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데르마델로티마의 술. 이것도 정말 처분하실 겁니까? 이건 활용에 따라 가치가 변할 수 있습니다.”
“네. 좋은 아이템이긴 하지만 저와는 좀 잘 맞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데르마델로티마의 술은 어쨌든 소환수를 소환하여 부리는 아이템이었다. 이런 소환수들은 부리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전투 능력이 달라졌다.
아쉽게도 카시마르는 그런 쪽으로는 그리 좋은 센스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카시마르의 포지션은 근접 격투가 어울렸다. 또 본인도 그걸 제일 좋아했다.
그래서 아데르마델로티마의 술을 처분하기로 했다. 상당히 큰 돈을 거머쥘 수 있을 테니까.
라코이 카너는 분신을 데리고 마켓으로 향했다. 마켓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서 카시마르는 저택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카시마르의 뒤에는 이스메네를 잡을 때 모였던 호위팀들이 있었다. 거기다 벨로바까지 함께였다.
준비된 은밀한 루트를 통해서 이동하는 카시마르.
그의 목적지는 바로 리크토의 저택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리크토는 이번 카니발에서 살아남았다. 그런데다가 시간의 광기의 존재들을 몇 명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전리품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마켓에 참여할 것이었다.
물론, 완벽한 정보는 아니었다.
리크토의 측근을 포섭해서 빼낸 정보가 아니었으니까. 변덕이 심한 리크토라면 얼마든지 마음을 바꿔서 마켓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큰 상관이 없었다.
카시마르는 충분히 리크토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의 옆에는 벨로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크토가 없으면 없는대로 좋다.
카시마르는 리크토의 저택을 습격하고 그곳에서 돈 되는 물건은 죄다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뿐인가?
지금 카시마르는 4차원 창고를 여는 아이템도 지니고 있었다.
그 말은 리크토의 비밀 창고도 충분히 털 수 있다는 의미였다.
“흔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너무 시끄러운 건 피해야겠죠.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합시다.”
카시마르가 리크토의 저택을 까마득한 상공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벨로바가 날벌레들을 소환했다. 전에 봤을 때처럼 총을 들고 있는 벌레들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거슬리는 소음이 들렸다. 카시마르는 고개를 돌려 소음이 난 곳을 확인했다. 날벌레들이 총에 소음기를 장착하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 건 피하라고 해서···요.”
“시작하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