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복종의 표식
엘더의 광신도들은 엔렌즈를 이용하여 수명을 연장하고 힘을 사용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엔렌즈를 꾸준하게 생성하는 엔렌즈 나무의 가치는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그러니 아우터 갓 쪽 존재들에게 엔렌즈 나무는 없애야할 대상이었다. 엔렌즈가 세상에 많이 풀린다는 건 그만큼 엘더 갓쪽의 사제들이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반대로 엘더 갓 쪽 인사들에게는 리비언이 없애야할 존재였다.
리비언은 아우터 갓 쪽 존재들에게 힘을 주는 존재.
다만 리비언은 엔렌즈와 다르게 과일이 아니었다. 리비언은 필멸자들이 타고나는 운명이었다.
인간에게서 그 표식이 나타날 수도 있고 다른 종족이나 미물에게도 그 표식이 나타날 수가 있었다.
어쨌든 리비언의 표식을 타고난 생명체를 잡아먹으면 아우터 갓쪽 존재들은 강력해진다.
사제들이면 신을 더 깊게 받아들이게 된다.
리비언이 엔렌즈와 다른 점은 엔렌즈가 엘더 갓의 사제들이 아닌 엘더 쪽 존재가 먹으면 그저 기운을 복돋아주는 정도에 그친다면 리비언의 표식을 가진 생명체는 아우터 갓의 사제들을 제외한 존재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리비언의 표식이 그 범용성에 있어서는 엔렌즈보다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위력도 그러했다.
엔렌즈 한 알을 먹을 때보다 리비언의 표식을 가진 자를 잡아먹는 게 훨씬 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장점도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리비언의 표식을 가진 생명체는 그다지 많이 나타나지 않았고, 잡기도 쉽지 않았다. 리비언의 표식을 가진 자는 그만큼의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엔렌즈는 그보다 훨씬 구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구하기도 쉽게 정기적으로 공급이 되는 나무를 구할 수도 있으니 엘더 쪽에서는 사제들이 힘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물건 다 챙길 수 있겠습니까?”
카시마르가 물었다.
“문제 없습니다. 리크토의 저택에서 나온 물건이 워낙 적어서요. 다만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몇몇 물건은 해체를 해야하는 것들도 있어서요.”
피서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행은 상당히 많은 짐수레를 가져온 상태였다. 기습이라고 하지만 꽤 대규모 작전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리크토가 저택에 있는 것까지 계산해서 준비해온 것이기 때문에 여유가 상당히 있었다.
“시간은 아직 넉넉하죠?‘
“예. 마켓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니까요. 참석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참석했으니 리크토가 돌아오려면 멀었습니다.”
“그럼 사방팔방 꼼꼼하게 챙기도록 하죠. 쥐새끼 한 마리 못 빠져나가게 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넬스.”
“예.”
“타밀라의 물감입니다. 사용법은 알고 있겠죠?”
카시마르가 타밀라의 물감을 꺼냈다.
“알고 있습니다.”
“인원 몇 명을 데리고 리크토의 저택 쪽부터 먼저 작업하도록 하세요. 오래 걸리겠습니까?”
“아닙니다. 타밀라의 물감이 좋은 아이템인 이유가 그것인데요. 지정만 하고 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처리하고 오도록 하세요.”
카시마르는 능숙하게 호위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라코이 카너가 있을 때는 이런 명령을 내리는 건 카너의 몫이었다. 사냥개의 일원이 된 이후로 늘 카너가 붙어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카너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휘 체계에 대한 걱정을 상당히 많이 했었던 카너였는데, 지금 카시마르는 그런 걱정을 말끔히 씻을만한 리더쉽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위대들은 빠르게 아이템을 옮기기 시작했다.
***
“저 엔렌즈 나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벨로바가 슬그머니 옆으로 와서 물었다. 카시마르는 카심을 보고 있었다. 물건을 옮기는 일이 어느 정도 완료가 되자 카심은 입구의 문을 살피는 중이었다.
“고민 중입니다.”
“없애는 게 최선이긴 합니다만······.”
“카너라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죠. 상인이니까요.”
“지금은 제 보좌관입니다.”
“어쨌든 엔렌즈 나무는 어떤 식으로든 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요.”
카시마르의 말에 벨로바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카시마르를 바라봤다.
“저걸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안 됩니까?”
“저건 생각보다 위험한 상징입니다.”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네.”
벨로바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차피 오늘 일은 외부로 새어나가선 안 됩니다. 그러니 이용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아니면 새어나갈 틈이라도 있는 겁니까?”
이번에는 카시마르가 벨로바를 바라봤다. 카시마르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벨로바는 다시 한번 놀랐다. 놀랍도록 차분했기 때문이었다. 차분한 것에서 더 나아가 추궁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벨로바는 놀랐다. 은연 중에 카시마르를 낮게 보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해봤자 낙하산으로 사냥개가 된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느껴지는 기세는 그게 아니었다. 묘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그 문신이 틀린 게 아니었군.“
“새어나갈 틈이라도 있습니까?”
벨로바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카시마르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에는 명백하게 추궁하는 말투였다.
“아닙니다. 다들 서약을 했으니 여기서 말이 새어나갈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건 자연적으로 발생한 나무라서 옮길 수도 없습니다.”
“굳이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 있는 걸 알고 있기만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리크토를 컨트롤 하실 생각입니까?”
벨로바가 물었다.
“컨트롤이 아니죠. 그에게 기회를 줄 생각입니다. 빚은 이자까지 쳐서 받은 거 같으니까요. 선택은 그가 하는 거죠.”
***
물건을 옮기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예상치 못한 공간이 또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1시간 넘게 시간이 걸렸는데, 아직 여유가 있었다. 라코이 카너에게서 연락이 오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카시마르 일행은 다방면으로 준비를 하고 이곳에 넘어왔다.
급습이긴 해도 허술하지는 않았다. 분신을 만들어서 라코이 카너와 함께 마켓으로 보냈다. 그리고 마켓이 끝나는 즉시 라코이 카너는 카시마르에게 연락을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락은 아직 없었다. 늘 그래왔던 대로 마켓이 상당히 오래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열었습니까?”
문을 살피던 카심이 비밀 공간을 열고 다시 입구쪽으로 돌아왔다. 어지간히 문의 결계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예. 저건 그리 대단한 결계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거죠. 얼핏 봤을 때는 꽤 비싼 결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여러 겹으로 합쳐진 결계였어요.”
“그렇군요.”
“공격 기능은 없지만 대신에 열쇠가 없으면 절대 열리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거라는 거죠.”
“이 안의 물건들을 보면 충분히 그럴만 하죠.”
“그래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이 결계 조각 몇 개를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하겠습니다. 단지··· 이게 어떤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확인한 다음에는 반드시 가져다······.”
“그렇게 하세요.”
카시마르는 카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답했다. 그 말에 카심이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가···감사합니다.”
“저도 그 결계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니 간단한 결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카심과 대화를 마치자 피서가 다가왔다.
“엔렌즈 나무를 제외하고 물건을 다 옮겼습니다.”
“그러면 돌아가도록 하죠.”
“타밀라의 물감은 쓰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벨로바가 말했다.
“아니요. 쓰도록 하세요. 말끔하게 흔적을 지우세요. 그래도 리크토는 잘 찾아올 겁니다.”
***
마켓을 마치고 돌아온 리크토는 가마에 올라탄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번 마켓에 대한 행차는 그리 달갑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이번 카니발에서 치른 희생이 워낙 컸기에 그로서는 빠질 수가 없었다.
엄청난 타격을 입은 불멸의 굶주림.
이번 카니발로 인해 굶주림에서 리크토의 입지는 이전보다 더 위태해졌다. 그렇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엔렌즈 나무가 있으니 더 빠르게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최근에는 좋은 일들이 꽤 있었다.
아주 튼튼한 가죽을 얻었고, 염원하던 동족의 눈을 찾아 아바타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늘 바라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쉽게 얻어졌다.
그러니 이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엔렌즈 나무만 잘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엔렌즈 사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었다.
엔렌즈를 사냥개 밖으로 내보내고 그 대가를 받아오는 일이 늘 마음에 걸리던 것이었는데, 그것도 최근에 해결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덕택에 리크토는 무척 빠르게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아직이야?”
리크토가 가마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그러자 하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히 이 근처가 맞는데······.”
“맞는데?”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질 않는다니?”
“그게 저택이 보이질 않습니다.”
“마중 나오라고 하면 되잖아!”
“그게 연락도 되질 않습니다.”
“뭐?”
눈치 빠른 리크토는 바로 심각성을 인지했다.
***
주변을 몇 시간이나 헤매고 나서야 리크토는 저택이 있던 자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에 저택은 없었다.
리크토는 몇 번이나 둘러보았지만 그곳이 저택이 있던 자리가 확실했다.
그러나 그곳은 주변과 비슷한 풍광만 있을 뿐이었다.
리크토는 얼른 엔렌즈 나무가 있는 장소로 움직였다. 그곳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하에 들어섰을 때 리크토는 결계가 해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엔렌즈 나무를 확인했다.
물론, 그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아이템들은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창고에는 엔렌즈 나무만 덩그러니 있었다.
리크토는 그 모습을 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현실이었다.
한 시간 정도를 창고에서 시간을 보낸 리크토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하인들을 불렀다.
마켓을 함께 다녀온 호위와 하인들.
리크토는 차크람을 들고 그들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그들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 채 리크토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가 수하들을 죽인 것은 배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 그들을 죽인 건 그래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이야기도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카시마르도 외부에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것을 우려했지만, 리크토는 그보다 더 했다.
절대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
왜? 대체? 어떻게?
라는 질문들은 이미 창고 안에서 정리한 리크토였다.
답은 없었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 전까지 추론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저 위의 질문들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느냐였다.
리크토는 수하들의 시신을 보면서 차크람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무척이나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답은 나와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놔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길은 있었다.
그를 공격한 자는 흔적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흔적이 없다.
그것이 곧 흔적이었다. 타밀라의 물감을 누구에게 넘겼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으아아아악!
땀을 닦아낸 뒤에 들리는 리크토의 포효.
그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주변에 그의 분노를 들어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주인님. 그가 도착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라코이 카너였다. 카시마르는 응접실 의자에 앉아서 정리된 아이템을 확인하고 있었다. 주변에 호위대도 그대로였다. 벨로바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있었다. 무장도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이 리크토의 저택을 습격하기 전과 같이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리크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리크토는 카시마르의 저택으로 들어왔다. 저택의 하인들은 예정대로 리크토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리크토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카시마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리크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크토의 몸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돈되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호위대, 벨로바, 라코이 카너 그 누구도 리크토에게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리크토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둘러본 리크토는 입구에서 움직이지 않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스메네의 말끔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이스메네가 아니었다.
이스메네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리크토였다.
챙!
차크람을 꺼내든 리크토.
카시마르, 카너, 벨로바는 별다른 반응하지 않았다. 호위대만 살짝 움찔할 뿐이었다.
차크람을 꺼내든 리크토는 자신의 몸에 작은 생채기를 냈다.
이전에도 목격한 적 있었던 광경이었다.
그리고는 옷처럼 입고 있던 이스메네의 가죽을 벗기 시작했다. 곧 이어 인체근육모형처럼 생긴 리크토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무릎을 꿇고 이스메네의 껍데기를 진상하듯이 카시마르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처분을 기다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