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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캐로 멱살 캐리-193화 (193/205)

# 193

서약

응접실 있는 자들은 리크토가 한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가장 의외인 건 벨로바의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벨로바와 리크토는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리크토는 동족을 사냥하느라 외톨이였고, 벨로바는 기행과 게으름 때문에 가문에서 외면 받았다.

그래서 서로 죽이 맞는 부분이 꽤 있었다. 거기다 리크토는 사냥개의 일원이라고 벨로바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높게 대했다. 그 점이 벨로바와 리크토가 친해진 계기가 되었다.

“제안을 하지.”

리크토가 말했다. 말투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취하고 있는 자세와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말투.

카시마르가 천천히 반응했다.

“제안이라······.”

“그래. 제안.”

“의외군.”

“왜? 제안이라는 말을 해서?”

“지금 당신이 취하고 있는 자세와는 많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항복의 표시이긴 하다. 졌음을 시인하는 거야. 하지만 패장에게도 협상할 카드는 남아 있지.”

“그 협상할 카드가 무엇이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사냥개의 추적이 시작될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너도 무사하지는 못해. 같은 사냥개를 공격했으니까.”

“뭔가 크게 착각하는군.”

“뭐?”

“만들어낼 이야기는 많아. 우연히 엔렌즈 나무를 발견했다고 해도 되고, 정보를 입수했다고 해도 돼.”

“그걸 믿어줄 거 같나?”

“당신 말보다는 믿겠지.”

“들어오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필멸자의 말을?”

“그래도 당신보다는 기반이 있다고 할 수 있지. 당신은 적이 많잖소. 리크토.”

“사냥개가 사냥개를 공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사냥개가 엔렌즈를 팔아서 부를 축적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누가 더 잃을 게 많을까?”

카시마르와 리크토의 자세는 누가 봐도 카시마르가 위에 있었다. 그러나 둘의 대화는 생각보다 팽팽했다. 장내의 존재들은 둘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당연히 잃을 게 많은 건 너야. 나는 여분의 목숨이 있지만 넌 없으니까.”

“내 목숨을 쉽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나?”

“내가 움직일 필요가 없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배신자는 목숨이 하나 건 여러 개 건 의미가 없지 않나? 사냥개가 뒤쫓을 텐데.”

“······.”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리크토. 지금 이런 퍼포먼스까지 보여주고 신경전으로 힘을 뺄 건가?”

카시마르의 말투가 아까보다 부드러워졌다. 강숭이와 다니면서 포악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지만, 사실 카시마르는 그리 포악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선수 생활을 뒤돌아보면 포악하기보다는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포악한 성정만 가득한 그였다면 약점을 노출한 리크토를 더 밀어붙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살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살길을 열어준다는 건 리크토와 같이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은 그만큼 치명적인 거였으니까.

“동맹이어도 좋고, 수하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대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하지만 그만한 대우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만한 대우라고 하면?”

“목숨을 버리라는 명령에는 따르지 않겠다. 지금처럼 불멸의 굶주림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활동하겠다. 대신에 엔렌즈 나무로 얻은 수익의 절반을 주겠다. 서약도 하도록 하지.”

리크토의 제안은 깔끔했다. 엔렌즈 나무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상당했으니 카시마르에게는 무조건 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카시마르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 정도로는 안 돼. 불멸의 굶주림으로 활동하는 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엔렌즈를 처분하는 일은 이제 내 허락하에 해야 돼. 70퍼센트가 나의 몫이다.”

“그걸 처분하는 일이 쉬운 것 같은가?”

“리크토. 그대 말대로 그대는 패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미 아바타를 다룰 줄 아는 그대니 조금 돌아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을까? 이 제안을 받지 않으면 네 말대로 우리 둘 다 손해를 보게 되겠지. 하지만 네 말대로 내 손해가 더 클까? 아니. 엔렌즈 나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냐. 그러니 네 손해가 훨씬 크다. 난 엔렌즈 나무 없어도 충분히 올라갈 자신이 있거든.”

“······.”

리크토는 카시마르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게임은 누가 더 손해볼 게 많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더 절박한가가 중요한 게임이었다.

지금 절박한 건 리크토였다.

그에게 남은 건 휴대용 이공간에 남은 아이템들.

그러나 그 아이템들은 말 그대로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휴대하고 다니는 것들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투용 셋팅이었는데 이건 재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처분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리크토는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였다.

엔렌즈 나무가 있지만 카시마르와의 협상이 결렬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결렬될 것을 대비해서 준비를 해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도망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가 막심한 일이었다. 도망치는 순간 그는 사냥꾼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야할 테니까.

결국, 리크토는 카시마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카시마르는 리크토에게 이스메네의 가죽을 돌려주었다.

둘은 표면상으로는 동급의 사냥개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종관계로 묶이게 되었다. 리크토는 주종관계라기 보다는 동맹으로 생각하는 듯 했지만 카시마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서약의 힘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몇 가지 물건은 돌려줄 수 없겠나?”

리크토가 말했다. 이스메네의 가죽을 다시 뒤집어쓴 그는 말끔한 모습을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안 돼.”

“저택도 사라진 상태야.”

“그래도 돌려줄 수 없다. 네 이공간에 있는 물건을 처분하도록 해.”

“휴대용 이공간에 있는 물건을 어떻게 처분을 하나.”

“그중에서도 필요 없는 물건은 있을 텐데?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던가.”

“껍데기까지 벗겨 먹을 심산인가?”

“껍데기를 벗어준 건 그쪽이야. 그리고 이걸 나쁘게만 받아들이지 마. 여기 있는 친구들은 이제 다 동료야. 네가 혼자 처리하려고 했던 엔렌즈가 라코이 가문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라코이 가문이 위험해지겠지.”

리크토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도 충분히 위험한 줄을 잡고 있습니다.”

라코이 카너가 말했다.

“좀 더 쉽게 처분할 수 있기야 하겠군.”

“원하는 것도 얻을 수도 있고. 이쪽의 고위 존재들 중에는 엘더 쪽의 물건을 수집하는 자들도 있지. 그들에게 팔기 위해서 물건을 모아둔 거 아니었나?”

“반은 맞지.”

“반은?”

“직접 사용하려고 했지.”

“직접?”

“그래. 거기 있는 물건들을 잘 사용하면 외신 쪽 존재들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리크토가 말한 외신 쪽 존재들이란 바로 아우터 갓의 사람들을 의미했다. 이들은 아우터 갓과 엘더 갓이라는 명칭 대신에 외신과 고대 신이라는 명칭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이쪽에서 흔히 나오는 그레이트 올드 원은 대부분 외신 쪽의 존재들을 의미했는데, 드물게 외신 쪽의 편에 있지 않고 중립을 지키거나 엘더 갓 쪽에 속해 있는 그레이트 올드 원들도 있었다.

“그건 헛소리야.”

조용히 있던 벨로바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벨로바 쪽으로 향했다.

“그 아이템 몇 개 지녔다고 해서 우리들을 쉽게 없앤다고?”

“왜 이러십니까? 가능하다는 거 아시면서.”

이번에는 리크토와 벨로바가 시선을 교환했다.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네 말대로 가능하다고 해도 사용할 수 없어. 흔적이 남으니까.”

“얼마 전까지는 사용할 수 있었죠.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묵혀두고 있었을 뿐.”

“타밀라의 물감을 그런 용도로 가지고 있었던 거로군.”

“그래.”

리크토의 말투는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카시마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내게 들어온 물건은 내줄 수 없다. 대신에 다른 걸 주지.”

카시마르가 카너를 바라봤다. 예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갔기 때문에 준비한 걸 내줄 차례였다.

이들은 리크토가 이런식으로 나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적당히 리크토의 이야기를 맞춰주었다. 리크토도 그걸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리크토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이 그에게는 딱히 좋을 게 없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너가 가져온 물건을 보자 표정이 달라졌다. 이전보다는 절박하지 않지만 늘 갈망하고 찾아헤맸던 물건을 카너가 가져왔다. 카너가 가져온 건 스킨 도펠의 눈이었다. 가문의 창고를 연 것이었다.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으니까.”

리크토는 스킨 도펠의 눈을 받아들고 돌아갔다. 리크토가 사라지자 그에 대한 회의가 꽤 오랫동안 열렸다.

중요한 건 신뢰의 문제였다.

“서약이 강력하긴 하지만 끊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목숨 하나를 버린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그는 이미 여러 번 주인님의 뒤통수를 노렸습니다. 너무 믿는 건 위험합니다.”

“전 좀 의견이 다릅니다. 리크토는 자존심이 강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데서 자신의 본 모습까지 드러냈습니다. 그로서는 최대한 성의를 보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벨로바님은 그의 말투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는 믿지 못할 존재입니다. 말끔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를 말끔하게 처리할 방법은 있나?”

“그러니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죠.”

카너와 벨로바의 의견은 팽팽하게 갈렸다. 카시마르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양쪽 의견 모두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카시마르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적당히 이야기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둘 다 합당한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이번에는 카너 보좌관이 조금 양보를 했으면 해. 리크토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는 것도 맞지 않나? 그와는 이미 손을 잡았으니 지금은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

마켓이 열리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카시마르는 마켓에서 얻은 물건을 처분해서 충분한 강화제를 샀다. 강화제를 마시는 건 적당한 텀을 두고 해야 하는 거라, 모두 마시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들고 있던 아이템을 모두 처분하여 구한 강화제가 바닥이 나자 카시마르는 다시 재물을 구할 방법을 생각했다.

“리크토의 저택에서 가져온 아이템들은 은밀히 해야하는 거라 시간이 상당히 걸립니다.”

“그래도 가치는 꽤 되겠지?”

“그렇습니다. 그 아이템들을 모두 처분할 수 있다면 주인님의 신체 능력은 나라 신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 처분할 수 있다면 말이지.”

“엘더 쪽 물건을 수집하는 존재들이 의외로 많으니 조금 기다려보시지요.”

“선생님. 암흑 사원을 가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용히 있던 강숭이가 입을 열었다. 암흑 사원이라는 말에 벨로바도 반응했다.

“거기는 얻는 것에 비해 위험도가 너무 높다고 하지 않았던가? 안 그래 카너 보좌관?”

“그렇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지금 주인님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좋은 사냥감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건 정보가 있어야 하는 일이라서요. 그럴 바에는 암흑 사원을 공략하는 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소득이 없을 걸 각오한다면 말이지?”

“예. 그렇지만 소득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우주적 존재의 사원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보상이 가득합니다. 다만 너무 위험하다는 게 문제이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탐험이 가능할 겁니다. 리크토가 주인님 손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 리크토가 암흑 사원에 대해서 꽤 아는 눈치였지. 그러면 리크토를 만나러 움직이지.”

“주인님께서 말입니까? 리크토에게 이리로 오라고 연락을 넣겠습니다.”

“아니. 리크토의 저택을 방문하도록 하지. 저택을 얼마나 복구했는지 보고 싶거든.”

카시마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호위대가 대기했다. 카시마르 일행은 매서운 속도로 리크토의 저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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