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격
착각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카시마르가 보통의 존재와 같이 피로를 느낄 거라는 착각.
카시마르는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거기다 잡몹 수준의 돼지들을 잡는데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았다. 세 개의 뿔이 카시마르 주위를 빠르게 돌면서 돼지들이 접근 자체를 하지 못하게 했다.
돼지들 중에는 활이나 투척 무기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공격들도 카시마르의 근처를 털 끝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그들 중에 가장 방어 능력이 좋은 돼지들도 뿔의 공격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염동력에 의해서 원격으로 조종되는 세 개의 뿔.
세 개의 뿔은 쉬지도 않고 계속 주변을 맴돌면서 돼지들을 처단했다. 거기다 수도사들도 예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다.
4명의 수도사들이 거둔 성과는 결코, 카시마르나 벨로바의 아래가 아니었다.
제일 수준이 떨어지는 자는 제일 활약할 거라 생각했던 벨로바였다.
벨로바도 학살 수준으로 돼지들을 죽였지만 카시마르나 수도사와 비교해서는 손색이 꽤 있었다.
덕분에 가이드들은 딱히 위험을 경고할 필요도 없었다. 돼지들이 아예 접근 자체를 못하고 다 죽어 쓰러지는데, 무슨 경고를 한단 말인가. 함정이 있는 곳을 넌지시 언급해주는 것 외에는 가이드들이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능력도 어느 정도 힘들어하는 상대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지 이처럼 압도적인 힘을 가진 상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탐험대는 세 갈래 길을 1시간 정도도 안 되는 시간에 빠져나왔다. 기록이 있다면 역대 최단 기록일 터였다.
가이드들은 이곳에서 짧게는 12시간 길게는 이틀이나 삼일 정도까지 전투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쏟아지는 물량이 많은 지점이었다.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의 지점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서 빠져나왔다는 건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더 강한 적이 나오나?”
카시마르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덟 갈래 길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는 아까 있었던 관문이었고, 이 다음부터는 하급 돼지들의 대장격인 돼지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하지만?”
“별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켈론은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카시마르 일행이 보여준 무위는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좀 더 속력을 내도 되겠군.”
“지금보다 더 속력을 내잔 말씀입니까?”
“문제 있어?”
“하지만 이런 사원은 천천히 움직이는 게 정석입니다. 그래야 적들이 한꺼번에 몰려오지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돼지들이 떨어트리는 아이템을 선별하려면······.”
“어차피 여기서는 귀중한 아이템은 안 나오지 않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쓸만한 아이템이 가끔 나오긴 합니다.”
“쓸만한 아이템을 얻으러 이곳에 들어온 거 아냐. 그러니 이너스에 걸리는 아이템을 제외하고는 다 버려.”
이너스는 우주적 존재의 아이템을 탐색하는 장치였다. 수없이 떨어지는 아이템 중에서 우주적 존재의 아이템은 그래도 가져갈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탐험할 때 필수적으로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아이템이었다.
“그···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런다고 해도 가이드 비용을 떼먹진 않을 테니까.”
가이드는 전투에 능한 자들이 아니었다. 특수한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니어서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길잡이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들을 부리는 비용도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를 쓰는 비용이 높으니 고용주는 당연하게도 사원 안에서 많은 걸 가져가려고 했다. 그리 가치가 높지 않은 물건들도 사원 안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좀 더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잡템은 그래봤자 잡템이었다.
카시마르는 지금 상당한 재산을 모은 상태였고 그렇기에 잡템을 챙기는 시간보다 탐험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여서 빨리 여덟 갈래의 길로 가고자 했다.
그곳에서부터 진짜 위험이 시작되고, 그만큼 큰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최대한 빨리 안내하겠습니다.”
“얼마나 걸릴까? 지금 정도 속도로 움직이면?”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빠져나온 적은 처음이라서요. 그래도 삼일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일이라. 그래도 많이 줄어들긴 했군.”
“예.”
“그럼 일단 가보도록 하지.”
가이드의 말대로 여덟 갈래의 길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다. 곳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긴 했지만 가이드의 안내로 함정에 걸리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함정 자체가 조악해서 걸려도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이 사원에 진짜 위험성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공격.
아무리 강력한 존재여도 피로는 쌓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피로를 카시마르 일행은 아주 적절히 대응하여 쌓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카시마르 일행의 전투 인원들이 다수와의 싸움에 특화된 자들이라는 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긴 했다.
“이쯤이면 거의 다 온 거 아닌가? 가이드?”
벨로바가 물었다. 카시마르 일행의 진격 속도는 가이드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시간이 지나면 돼지들을 공략하는 속도가 줄어들거라 예상했던 것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었다.
세 갈래 길을 빠져나온 카시마르 일행은 더 빠르게 돼지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벨로바는 연사력을 줄이는 대신 강력한 대물 저격총 종류를 요정들에게 장착시켰고, 그게 밀려드는 돼지들을 처리하는데는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알아냈다.
한 발만 쏴도 뒤에 있는 돼지들이 수십 명이 그대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카시마르는 세 개의 뿔을 단순히 휘두르는데만 쓰지 않고, 스킬까지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은 수 백마리의 돼지들을 그대로 재로 변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수도사들도 돼지들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지자 전보다 훨씬 빠르게 상대를 처리했다.
카시마르, 수도사들, 벨로바는 번갈아 가면서 전투에 나서서 돼지들을 공략했다.
덕분에 이틀도 걸리지 않아서 카시마르 일행은 여덟 갈래의 길 앞에 도착했다.
그것도 중간에 카시마르가 긴 시간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걸린 시간이었다.
“그럼 여기다 이정표를 세워두고 되돌아가도록 하지.”
“네. 되돌아갈 때는 이보다 수월할 것 같습니다.”
“나갈 때 다시 걸어서 돌아가는 건 비효율적이야.”
“그렇지만 사원에서 나가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카시마르도 그런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 새로 알게된 방법이 있었다.
바로 몽계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몽계 통신은 이용이 금지된 사항이었지만 보안만 철저히 한다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이미 가이드인 켈론과 루스는 카시마르와 종신 계약을 맺었고, 사원 탐색에 관한 사항을 어디다가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이건 몽계 통신 아닙니까?”
“맞아.”
“이걸······.”
“문제될 게 있을까?”
카시마르가 켈론과 루스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자 켈론과 루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문제 없습니다.”
탐험대는 몽계 통신을 이용해서 사원을 쉽게 벗어났다. 카시마르는 카너에게 미리 연락을 해둔 뒤였고, 카너는 몽계 안으로 들어와서 카시마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시마르는 카너가 들어온 입구를 통해서 몽계 밖으로 나왔다. 카시마르의 저택과 바로 연결된 곳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연락을 주셔서 놀랐습니다. 무언가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요.”
“생각보다 쉽게 해결했어. 가져갔던 물자들도 거의 사용하질 않았고.”
“수도사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나 보군요.”
카시마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갈래의 길 안쪽 가이드는?”
카시마르의 질문에 카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못 찾았어?”
“네.”
“기존에 있던 가이드는? 병으로 골골 거린다면서.”
“네. 그쪽은 설득이 안 됩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거절입니다. 지병이 있다는 것과 현역에서 은퇴했다는 이유입니다.”
“사냥개라는 이야기도 언급했나?”
“네. 그런데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알아보니 사냥개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운 모양입니다.”
“사냥꾼을 싫어하는 건가?”
“그건 아니고······.”
“뭔데? 말을 해봐.”
카너가 머뭇거리자 카시마르가 채근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라니까?”
“네. 격이 떨어지는 인사와는 일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너의 말에 카시마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시······ 그 가이드 이름이 탈타드 아닙니까?”
켈론이 대화에 넌지시 끼어들었다. 그러자 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요.”
“유명한 자인가?”
“당연합니다. 그 사람이 예전에 그 탐험대를 이끌었죠. 폴의 복합 던전을 클리어한 자가 그 사람입니다. 싸우는 가이드라고 아주 유명했습니다.”
“전투에 능한가보군?”
“네.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이드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탈타드면 그렇게 고집을 피울 만합니다. 능력은 출중하지만 조금 성격이······.”
“복합 던전은 뭔가?”
“여러 던전이 섞여 있는 곳을 말합니다. 일반 던전보다 훨씬 규모가 크죠. 다양한 종족이 그 안에서 모여사는데, 그들은 서로 반목하기도 하고 힘을 합치기도 하면서 던전을 지키죠.”
“우주적 존재의 사원보다 난이도가 있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 우주적 존재의 사원은 아직 완전 클리어가 된 적 없으니까요. 덕분에 사원이 있는 곳 주변은 폐허나 다름 없죠. 팔번토는 희귀한 케이스니까. 논외로 치고요.”
“카너. 리크토에게 연락을 넣어봐.”
“알겠습니다.”
카시마르는 일단 탐험대를 해산했다. 완전 해산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에게 휴식을 준 거였다. 예상보다 탐험이 쉽게 끝나서 아쉬운 부분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으니까.
***
리크토는 카시마르의 부름에 단번에 저택으로 날아왔다.
“탈타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몇 번 같이 일을 한 적 있었고요. 인맥이 꽤 화려한 자입니다. 그가 카시마르님을 무시한 것은 그 인맥을 믿는 거겠죠.”
“얼마나 화려한데?”
“시간의 광기 쪽도 많이 알고, 불멸의 굶주림의 고위층들도 꽤 알죠. 던전이나 사원 말고도 다른 가이드 일도 하니까요. 용 잡을 때도 움직이고, 이괴가 출몰했을 때도 활약하기도 했고요.”
“그러면 사냥꾼의 윗선의 힘을 빌려도 크게 의미가 없겠네?”
“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저희는 지금 하는 일을 최대한 감춰야 하는 상황 아닙니까. 윗선의 요청을 받아서 압박해봤자 일이 꼬이기만 할 뿐이죠. 아! 왜 그자가 카시마르님의 요청을 거절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왜?”
“탈타드는 베닉 일족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사냥꾼의 들판에서 산단 말이지?”
“제가 알기로는 사냥꾼 중 한 명이 가이드 비용 대신에 저택을 선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좋은 저택이니 일가가 다 함께 사는 거겠죠.”
단순하게만 생각했는데 일이 꽤 복잡했다. 탈타드가 요청을 거부한 이유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카시마르는 짧게 한숨을 쉰 다음에 카너를 바라봤다.
“대안은 없는 거겠지?”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카너의 대답을 들은 카시마르는 리크토를 바라봤다.
“리크토. 탈타드를 불러.”
“어디로 부르란 말씀입니까?”
“일이 있다고 이야기해서 저택으로 불러.”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조용히 있던 벨로바가 물었다.
“격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격 떨어지는 상대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줘야죠.”
카시마르는 카너에게 타밀라의 물감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