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Chapter 2. 주인공 (1)
***
띡, 띠리릭.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나 왔어.”
‘다녀왔습니다’가 아니라 편하게 건네는 반말이었다. 어차피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연장자니까.
사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처음 몇 년은 원래 하던 대로 ‘다녀왔습니다’를 고수했다.
집에 들어올 때 하는 인사를 바꿔야 하는 이유,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한데 내가 스물한 살 때였던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세아가 나를 쏘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거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고.
이 집에 오빠랑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냐고.
당시 이미 남매 사이가 서먹해져 있었으나 그 무렵까진 적어도 나를 ‘오빠’라고 불러주긴 했다.
나는 내 사소한 기분 때문에 되려 세아가 부모님의 부재를 강하게 실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날부로 주저 없이 말투를 고쳤다.
열네 살,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라 예민할 텐데.
내 평판이 하도 개판이라 쟤도 부끄러울 텐데.
거의 매일 밤 싸돌아다니느라 오빠 노릇도 제대로 못 해주는데.
최소한 이런 부분 정도는 신경을 써주고 싶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별다른 효과는 없는 듯했다.
수십 수백 번의 우연과 필연이 겹쳐 세아와 내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이젠 최근에 오빠 소리 들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부득이하게 나랑 대화할 일이 있으면 호칭 같은 건 생략하고 본론만 말하지. 내가 용건 없이 말 걸면 대답은커녕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잦고.
꼭 지금처럼 말이다.
“피자 시켰어?”
거실 TV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세아의 등에다 대고 물었다.
당연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피자 박스가 놓여 있는 탁자 가까이 다가가 재차 말을 이었다.
“나 하나만 먹어도 돼?”
그제야 겨우 한숨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술 마시고 왔잖아.”
“별로 안 마셨어. 안주도 안 먹었고, 배고픈데.”
“…….”
짜증스러워하는 기색을 한껏 내비친 세아가 몸을 일으켰다.
자기가 쓰던 컵과 접시를 부엌으로 가져가더니,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이번에는 좀 오래 만나는 것 같은데…… 적당히 하고 그만하는 게 어때? 파혼당해서 여기서 더 창피해지기 싫으면.”
“그런 거 아니래도.”
적잖이 난처한 심경에 나는 작게나마 부정했다.
이세아 얘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단 말이지.
첫 번째, 내가 파트너를 바꿔가며 방탕한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오해.
그야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 많긴 하다.
상대가 자주 바뀌는 데다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 날 점심쯤 국밥 한 그릇씩 먹고 들어오는 날도 부지기수다.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데 찾아보면 목격담도 있고, 나도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신분과 외견을 바꾼 서연희와 주로 업무 관련으로 만난 거다. 그 외의 경우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두 번째 오해.
‘파혼당하기 싫으면’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
세아만 빼면 그걸 진지하게 염두에 두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셨고, 내가 이러고 살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유명무실한 약속이다.
어린 세아야 논외로 두고,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 중 그 누구도 약혼이 그다음 과정으로 이어지길 바라지 않을 거다.
내 약혼자도, 걔의 부모님도, 나도.
그러니 내가 앞으로 뭘 어떻게 노력하고 행실을 단정하게 하든 파혼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올해 여름까지는 결론이 나겠지. 걔도 졸업하고 직장 다닐 때 됐고, 더 미룰 수는 없으니까.
-라는 설명을 세아에게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는 없었고, 환멸에 가까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던 동생은 피자 박스만 남겨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이건 남은 거 나 먹어도 된다는 뜻이겠지?
우리 집 가계는 내가 관리하고 있고, 피자 몇 조각 먹는 것까지 눈치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서글프게 자문한 나는 탁자를 내려다봤다.
보니까 ‘리뷰 이벤트’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스파게티는 아예 손도 안 댄 상태다. 피자 시킬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
사실상 피자는 사은품이고 이게 본체인데…….
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벤트 신청은 왜 한 거람?
조금 의아했으나 나 먹어도 되냐고는 차마 못 물어보고, 그냥 내가 먹기로 했다.
이건 식으면 회복이 안 되잖아. 합리적이고 정당한 판단이라 해야겠지.
남은 피자 다섯 조각 중에 두 조각만 접시에 옮겨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오늘 큰일을 치르고 왔으니 이거부터 좀 먹고 샤워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삼십 분쯤 지나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후우…….”
따뜻한 물에 몸을 씻어내고 침대에 누우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여러 가지 고민으로 골치가 아팠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해냈다는 만족감도 들었다.
내가 주인공인, <세계의 수호자>의 후속 외전 <마신의 탄생>.
그 길었던 여정을 끝내고 드디어 에필로그 ‘장례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것까지 마무리하면 챕터 클리어와 완결 보상을 받고 정식 속편이 이어진다고 했지.
긴장과 기대감으로 심장이 세게 뛰었다.
나는 더 강해질 테니까.
속편이 시작되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도 더 명확해질 거고.
불이 꺼져 어둑한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되뇌었다.
“할 수 있어. 절대로 포기 안 해.”
속편의 제목이 무엇이든, 주인공이 누구든.
그 누가 내 앞길을 가로막든.
나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낼 거야.
물론 나 자신도 알고 있다.
나는 나쁜 짓을 하고 있어.
세계 최고의 영웅 두 사람의 아들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형편없이 사는 중이고, 그 와중에 테러리스트 노릇이나 하고 다니는 범죄자야.
하지만.
그런 건 다 인정하지만…….
그래도 혼나는 건 나중으로 미룰래.
이시혁과 정세빈.
온 마음을 다해 소중히 여겼던 내 소설의 주인공과 히로인.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사랑하는 부모님.
그분들이 되살아나시고 나서.
“앞으로도 힘낼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각오처럼 전한 나는 잠을 청했고…….
아침에 깨 보니 휴대전화로 소식이 와 있었다.
[산일전자 부회장 염의준 사망]
[용의자는 국제 테러단체 팬텀의 조직원들로 추정]
“좀 빠르네.”
어젯밤까진 보도 통제를 걸어놓은 듯하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공개됐다.
하기야 습격이 있었단 건 본 사람도 많고 소문이 퍼졌을 테니 길게 숨기기도 어려웠으려나.
사적으로도 연락이 왔다.
장례식장 위치가 기재되어 있는 정중한 메시지.
침대를 빠져나와 옷장을 열었다. 제일 왼쪽에 걸어둔 검은 상복이 눈에 들어온다.
꺼낼 일이 그리 많지 않은 복장이지만 오늘은 입어야겠지.
방에서 나오니 등교 준비를 하는 세아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내 인기척에 흘끗 나를 보더니 뭔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을 우물거리는 모습.
나는 짧게 일렀다.
“소식 들었지?”
“…….”
“오빠는 점심쯤 갈 건데, 너는 학교 끝나고 와. 따로 옷 챙겨입지 말고 그냥 교복 입으면 돼.”
내가 굳이 말 안 해줘도 학교 측에서 알아서 애들 인솔해서 오긴 할 거다. 제1 아카데미에서 염의준이 역임하고 있던 직책이 상당했으니까.
세아의 눈가가 얕게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뭇거리더니 이내 욕실로 들어간다.
생각보다 충격이 큰 모양인데…….
장례식이야 어찌 됐건, 그것만은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
시신이 없는 장례식장에도 조문객은 많았다.
내가 아는 얼굴들. 그리고 모르는 얼굴들.
상주는 염의준의 동생이었다.
염의준과는 이래저래 경영권 다툼이 있었고, 그런 만큼 썩 우애가 깊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겉보기엔 대단히 비통한 표정이다.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찔리는 느낌을 애써 억누르며 장례식장에서 해야 할 절차를 마친 나는 가장자리의 탁자에 앉았다.
이따금 내게 말을 거는 이들이 있었다.
안부를 주고받고, 먹먹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이 오가며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의준이 저놈이 너를 많이 예뻐했는데…….”
“네…….”
“엊저녁에 너랑 식사도 했다고?”
나는 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자리가 너무도 불편했다.
염의준을 죽인 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어.
하지만 나와 그는 서로만을 아는 사이가 아니다.
다른 수많은 이들이 얽혀 있었고, 그중엔 선하고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나 자신이 어떠한 반론의 여지도 없이 완전한 가해자가 된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아니, 어쩌면 그게 진실이려나.
그때 문득 들려온 말이 내 상념을 끊어냈다.
“애 그만 귀찮게 하고 좀 내버려 두죠?”
새까만 정장 차림에 싸늘한 분위기.
기껏해야 삼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서연희였다.
“도진이 오랜만이네.”
“아, 네.”
말투에서는 딱히 정감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나와 둘이 있을 때만 보여주는 언행 말고, 안개의 마녀로 활동하는 서연희는 본래 이런 성격이니까.
그녀가 흘려내는 무언의 압박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곧 자리를 떴다.
서연희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친근한 빛을 띠었고, 여전히 쌀쌀맞은 어조로 내게 물었다.
“언제까지 있을 거니?”
“세아랑 같이 갔다가 내일 다시 오려고요.”
어련하겠냐는 듯한 눈길을 보낸 서연희가 말했다.
“한 잔 받을래?”
나로선 이 사람 앞에서 고개 돌리고 술 마시는 게 어색했지만 본인은 은근히 만족한 눈치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오후 세 시를 넘긴 무렵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귀를 기울여 상황을 알아보니 오늘 일찍 수업을 마친 제1 아카데미에서 일부 학생들이 단체 조문을 온 듯했다.
“세아도 왔나?”
“저기 있네요.”
꽤 많은 인원이었으나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세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애가 아직도 표정이 안 좋은데…….
내심 걱정스러워 세아와 다른 학생들 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홀로그램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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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수호자>의 정식 속편, <???>의 주인공 ---와 조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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