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Chapter 2. 주인공 (3)
등장 비중과는 무관하게, <세계의 수호자>엔 내가 특별히 아꼈던 인물들이 몇 존재한다.
가령 서연희를 대표로 들 수 있다.
지면상 자주 나오진 않았으나 어지간한 조연들보다도 훨씬 설정에 공을 들인 캐릭터니까.
어떻게 그녀가 영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외전으로 썼다면 족히 한 권 분량은 나왔겠지.
지닌바 능력도 출중했다.
특정 조건들이 갖춰지면, 그때만은 사실상 무적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초월적인 권능.
그리고 안개의 마녀 서연희로서가 아니라 그녀가 본래 지닌 외모. 이 부분은 아예 대놓고 설정 파일에 적어놓았다. 세계관 최고 미녀라고.
그러니 이시혁과 정세빈을 제외하고 가장 소중히 여긴 캐릭터를 꼽으라면 그건 반론의 여지 없이 서연희가 되겠지만…… 그녀보다는 못해도 신경을 쓴 캐릭터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지금 장례식장에 온 무신(武神) 한태강이고.
제1 아카데미 출신이며 내 부모님의 일 년 선배.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드높은 초일류 길드 ‘영원’의 수장.
36 영웅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이자 세계 최강의 권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약혼자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염의준의 영정에 절한 그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나도 꽤 키가 큰 편이지만 그는 나와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만큼 체구가 장대하다.
190cm를 넘긴, 검은 상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근육질의 몸.
표정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빈틈이 없었고, 떨떠름한 눈길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거기서 두 가지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괘씸함과 한심함. 어느 쪽도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지.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한심한 놈…….”
그럴 상황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짐작하던 것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말이어서.
나는 한태강을 좋아했다.
<세계의 수호자>를 쓸 때부터 오늘날까지 쭉.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사실은 속정이 깊은 사람.
동료들에게는 믿음직한 수호신이었고, 아내에겐 로맨티스트였으며, 딸에겐 엄격하면서도 좋은 아버지인 사람.
나야 대하기 껄끄럽고 가끔 본의 아니게 얼굴을 마주하면 이렇게 타박이나 듣는 신세지만…… 그건 한태강의 잘못이 아니다.
세상 어느 아버지가 자기 딸을 이런 한량이랑 결혼시키고 싶겠어.
무뚝뚝한 어조로 그가 말을 이었다.
“세라는 여름에 한국 올 거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
한세라.
한태강의 딸이자 내 약혼녀.
올해 스물다섯 살로 나랑 동갑인데 지금은 대학원 공부하러 미국에 가 있다.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부터 조기졸업이니 뭐니 바쁘게 살더니 어느덧 대학원까지 마칠 때가 된 모양이네.
한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태강의 눈빛에 노여움이 스몄다.
“그 애가 귀국해서 얘기를 꺼내면, 나는 막아줄 생각이 없다.”
나보다도 뒤편에 있던 세아가 놀라서 흠칫했다.
내 동생은 저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겠지.
현시점에선 허울뿐인 약혼이 되었으나 그나마도 확실히 깨버리겠다는 뜻이다. 세라 걔가 원한다면 기꺼이 파혼을 시키겠다고.
그러니 방금 말은 한태강이 내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파혼당하고 싶지 않다면 여름까지 조금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보라는 권유이자 경고.
나는 나직이 답했다.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허어…….”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내뱉은 한태강이 눈가를 좁혔지만, 나로서는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앞으로 잘해보겠다고 답하면 거짓말이 되니까.
세라가 외국에 있는데 내 쪽에서 먼저 뻔뻔하게 파혼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도저히 못 할 짓이니까.
걔가 귀국하면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내 귀책을 사유로 가능한 한 원만히 파혼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됐다, 더 말하기 싫으니 그만 가봐라.”
불쾌함이 깃든 어조.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나는 그 자리를 나섰다. 등 뒤에서 한태강이 부드럽게 건네는 말이 들린다.
“세아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네…….”
목소리 자체야 원체 중후하지만 나를 대할 때와 전혀 딴판으로 부드러운 어감이었다. 하긴 내가 못마땅한 거지 우리 세아까지 그렇게 여길 이유는 없으니까.
장례식장을 나가기 직전에 한 번 고개를 돌려봤다. 혹시나 쓸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하면서.
하지만 홀로그램은 여전히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고, 우연의 일치인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세아와 같이 온 제1 아카데미의 학생들.
다들 외모가 빼어났으나 개중에서도 특히나 눈에 확 띄던 남학생과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은 뭐랄까, 이런 표현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되게 좀 예쁘장하게 생겼다. 아까 보니 세아랑 친분이 있어 보이고.
여학생은 눈이 치켜 올라가서 새침한 인상인데,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동생 세아한테는 당연히 안 되지만 그래도 외모가 굉장히 뛰어나긴 했다.
얘는 반대로 세아와 사이가 나쁜 것 같던데.
나랑 세아가 말을 주고받을 때 혼자만 작게 코웃음을 쳤거든.
그즈음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억측일 거고, 그래야만 하겠지만…….
둘 다 저 남자애를 좋아해서 세아와 다투는 사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난 결코 용납 못 해.
고개를 도리질하며 애써 부정한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장례식장을 완전히 벗어난 바로 그 순간.
돌연 홀로그램 메시지가 나타났다.
+
에필로그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마신의 탄생>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최종 챕터 ‘영웅 사냥’의 클리어 보상과 작품 완결 특전을 합산해 지급합니다.
1) 마력과 생명력 포인트 666p
2) 신체 포인트 13p
3) 소질 포인트 4p
4) 스킬 (랭크 A~S, 항목 중 택일)
5) 특성 (랭크 A~S, 항목 중 택일)
6) OX 질문 3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상기 여섯 가지 보상을 제한시간 내에 수령해 주세요. (제한시간: 29일 23시간 59분 57초)
+
“와우…….”
저절로 그런 감탄이 흘러나왔다. 여태 주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파격적인 보상이어서.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세계의 수호자>의 정식 속편 <???>이 진행됩니다!
-현재 정세와 인간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속편 <???>의 제목을 결정합니다.
: <킬 더 이블 (Kill the evil)>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 이도진이 <킬 더 이블>에서 맡은 역할을 재확인합니다.
: 최종보스
-<마신의 탄생>의 주인공 보정으로 보유한 자동발동형 특성 ‘직감’이 진화합니다.
: 순간예지 (랭크 A+)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 보정으로 상시발동형 특성을 습득합니다.
: 검은 심장 (랭크 S)
+
쿠웅.
몸속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 느껴진다.
심장 근처에 어떤 물체가 생겨난 듯한 이물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두근두근 뛰며 내 마력을 조금씩 빨아들여 간다.
마치 심장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딱히 부담스럽진 않을 정도로, 그러나 흡수를 멈추는 일은 없이 계속.
아마도 이게 검은 심장인가 뭔가 하는 거겠지.
활용법은 나중에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척 봐도 느낌이 온다. 분명 엄청나게 사기적인 능력이리란 확신이 드네.
그리고 세 번째 홀로그램이 공개됐다.
+
<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가 진행 중입니다.
-1권 태그: [아카데미] [로맨스 X] [캐릭터 중심]
-진행률: 5.7%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의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를 상회할 것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이걸로 확정됐다.
주인공은 학생 중에 하나야.
주목도란 건 명성이랑 같은 의미인 듯한데…….
<마신의 탄생> 땐 진행하는 내내 ‘이도진’으로서는 나대지 말라고 그렇게 다그쳐대더니 속편이 시작되자마자 입장을 싹 바꿔버렸다.
인제 와서 왜 이러나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가벼웠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추적 범위를 크게 좁힐 방법.
주목도라는 걸 올릴 방법.
둘 다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 계획들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직후.
나는 서연희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요즘 그녀가 자주 쓰는 신분의 휴대전화로 연락을 보냈다.
불과 몇 초 지나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고, 즐거워하며 장난을 거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왜?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 누나가 보고 싶어졌어?>
“……리스트 보내주세요.”
<……삼십 분만 있어.>
서로 민망한 공방을 주고받고는 가만히 기다리길 이삼십 분쯤 지났을까. 별안간 마력으로 구성된 수십 장의 화상이 일렁였다.
서연희가 보내준, 조문을 온 학생들의 신상명세.
제1 아카데미 중등 과정과 고등 과정의 학생회 멤버들이었다.
신입생인 1학년은 아직 학생회 소속이 아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과 3학년이 각각 여섯과 일곱 명.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은 다섯과 여섯 명.
거기까지 확인을 마친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대고 물었다.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은…… 제1 아카데미의 고등 과정 2학년인가?”
그러자 홀로그램이 단출한 문장들을 자아낸다.
+
OX 질문 (1/3)
-질문 내용: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이 제1 아카데미의 고등 과정 2학년인지 여부
-정답: O
+
“……좋았어.”
보상으로 얻은 OX 질문.
너무 과한 걸 물으면 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내가 궁금한 걸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수단이었다.
주관식 질문이 더 정확하긴 한데, 그건 답을 자기 멋대로 해서 막상 들어도 어처구니없을 때가 더 많으니까.
기실 이번 질문은 반쯤 도박성이 있었다.
도합 네 개 학년이니 ‘고등학생인가?’ 정도로 묻는 게 안정적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내 직감을 믿었다.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왠지 세아랑 또래일 것 같더라고. 주인공과 최종보스의 동생이 친구. 상당히 그럴듯하잖아.
그리고, 다행히 노림수는 성공했다.
실제로 주인공은 세아와 같은 고등학교 2학년.
그걸 알았으니 나머지 범위까지 좁히려면…….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은, 남자인가?”
+
OX 질문 (2/3)
-질문 내용: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부
-정답: X
+
주인공은 남자가 아닌 여자.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서연희에게 받은 프로필로 파악하기에 장례식장에 찾아온 고등학교 2학년 여자애는 고작 두 명.
한 사람은 물론 내 동생 세아다.
하지만 그 애는 절대로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일 수가 없어.
내게 주인공과 조우했다는 알림이 처음 뜬 게 장례식장에서였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여자애가 주인공이겠지.
나한텐 조금이나마 낯이 익은 얼굴이기도 했고.
“진유리…….”
조용히 되뇌어봤다.
<킬 더 이블>의 주인공이자 내가 맞서야 할 적.
나 때문에 난처해하는 세아를 비웃은 일로 이미 내 안에서의 평가가 바닥을 뚫고 지하실까지 내려간 여자애의 이름을.
이어서 하나 남은 질문을 마저 꺼냈다.
“만약 내가 진유리를 당장 제거하면…… 그러면 문제가 생기나?”
+
OX 질문 (3/3)
-질문 내용: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진유리를 조속히 제거할 시 위험이 미치는지 여부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외의 조건으로 재질문해주세요.
+
답할 수 없다는 말.
오히려 그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대답이었다.
함부로 건드리면 OX 질문 따위론 가늠도 못 할 만큼 골치 아픈 문제가 터진단 거겠지.
“질문 하나 벌었네.”
그간 구두쇠처럼 굴던 홀로그램이 오늘따라 선심을 쓰는 것 같아 흡족해하며 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아냈으니까.
이제 <킬 더 이블>의 1권 퀘스트 공략에 착수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