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Chapter 2. 주인공 (4)
***
오후 네 시 삼십 분경.
장례식장을 나선 이세아는 다른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얘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제1 아카데미 고등부, 학생들은 으레 ‘제일고’라 부르는 그곳에서 그녀의 교우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다.
아주 친한 애는 많지 않으나 두루두루 안면을 트고 있고,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상 특별히 사이가 나쁜 애도 없다.
단 한 사람.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은근히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진유리만 제외한다면.
중등 과정, 제일중에 입학할 때부터 그랬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경쟁심리를 표출하고, 자기가 앞서는 부분을 자랑하며 기를 죽이려고 했다.
‘내가 더 잘하면 이해라도 할 텐데.’
이세아 자신도 나름대로 재능이 뛰어난 편이지만 진유리는 그보다 더했다.
대대로 명성을 떨쳐온 각성자 집안, 흔히 일컫는 명가 출신은 아니다. 하지만 근래 어마어마하게 성장한 대기업의 외동딸이며 재능도 출중했다.
무기술과 마법 모두 제일고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성취를 보였고, 작년에는 둘을 심화해 병행하는 마검사로 진로를 정했을 정도.
기실 교수들 대부분이 진유리를 말렸다.
너는 하나를 깊게 파야 발전 가능성이 크니 아쉽겠지만 둘 중에 하나로 정해야 한다고.
괜히 오기 부리다 죽도 밥도 안 될지 모른다고.
하지만 진유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우려를 비웃듯 이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갔다.
교내에서는 이세아 자신의 마검사 적성이 지극히 높았던 게 그 무모하고 대담한 결정에 크나큰 영향을 줬다는 풍문이 떠돌았는데, 진위야 어쨌건 이세아로선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이번 학기부턴 공통 과목 외엔 얼굴 마주칠 일이 많지 않으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껄끄러워.’
일단 성격부터 안 맞고, 객관적으로 더 나은 실력을 갖춘 애가 죽자사자 자신을 이기려 애쓰는 것도 민망하고 거북스러웠다.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저러는 걸까?’
각성자로서의 재능은 물론이고 이세아가 보기엔 전교에서 외모가 가장 빼어난 여자애도 진유리였다.
160대 중후반대의 신장.
몸선이 대단히 깨끗해 옷을 입으면 예쁘게 태가 살았고, 도전적인 인상을 주는 이목구비도 더할 나위 없이 수려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진유리를 지나치게 편애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
그런 애가 왜 자신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는 걸까.
‘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데.’
배경이야 둘째치고 본인이 가진 것만 놓고 봐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비단 각성자로서의 실력만이 아니라 외모 측면에서도.
이세아는 키가 별로 크지 않다.
진유리보다 10cm 가까이 작고, 평균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
그냥 피부가 조금 좋고.
이세아 본인이 자각하기에도 칠흑처럼 새까맣고 윤기가 나는 머리카락이 조금은 예쁘고.
그럭저럭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자리했고.
진유리처럼 멋들어진 느낌은 아니나 조금은 체형이 괜찮은 편이고.
아무리 잘 봐줘도 그 정도인데.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걸까.
심지어 올해는 2학년 학생회장까지 됐으니 무슨 구실로 얼마나 부려먹으려 들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후우…….”
나이에 맞지 않게 처연한 매력을 자아내며 내쉰 숨결. 학생회 소속 남학생 거의 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으나 그런 눈길을 알아채지 못하고 이세아는 상념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얘 때문인가?’
내심 되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남학생을 바라봤다.
유해빈.
키는 빈말로라도 크다곤 못 하겠다.
중학교 입학할 땐 평균 이상이었지만 거기서 많이 자라지 않아 지금은 굳이 따지자면 작은 편.
그리고, 그 외에는 완벽에 가까운 애다.
마법도 무기술도 진유리와 전교 1등을 다투지만 대개 세 번 중에 두 번 이상은 유해빈의 승리로 돌아간다.
얘가 여장하면 그게 제일고에서 제일 예쁜 애일 거란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만큼 곱상한 외모.
성격은 소탈하면서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쾌활하고, 가끔은 의지가 굳건한 일면도 보여준다.
이세아한텐 몇 년째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했고.
‘그게 전부인데…….’
연애에 관심이 없는 이세아지만 사람이 응당 갖춰야 할 기본적인 눈치는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저 단순히 친구라고.
자신은 유해빈에게 아무 이성적인 감정도 느끼지 않고, 저쪽도 그랬다. 남녀 사이 같은 건 관계없이 성격이 잘 맞을 뿐이다.
유해빈이 재잘거리는 걸 듣고 있으면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처럼 편했으니까. 두 사람 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공통점도 있고.
그러니 샘을 낸다손 치더라도 소용없는데.
다만 의문인 건 진유리도 딱히 유해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거쳐서 오는 적의라기보다는 순수하게 이세아 자신이 싫은 듯한 느낌.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즈음 갈림길이 나왔다. 각자 흩어질 시간.
진유리가 눈빛을 번뜩이며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넌 그쪽으로 혼자 가지?”
자신을 향해 묻길래 이세아는 적당히 흘려넘기자고 마음을 먹었다. 조금쯤 신경에 거슬리도록 주절거리기나 하겠지…… 라고.
그러나 진유리가 뒤이어 꺼낸, 예기치 못한 말에 움찔하고야 말았다.
“잘생긴 오빠 분이 마중은 안 나와주신대? 아, 맞다. 네가 떠밀어서 쫓아 보냈지?”
“엥? 이게 아까 육개장을 코로 처먹었나. 갑자기 웬 생뚱맞은-”
“아니, 잠시만.”
대번에 받아치던 유해빈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이세아였다.
참고 넘길 수 있는 것과 결코 그러면 안 되는 말.
그 둘은 엄연히 나뉘어야만 하고, 방금 진유리의 빈정거림은 전적으로 후자에 속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이세아는 진유리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명확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눈빛에서 새파란 불꽃 같은 분노가 흘러나왔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 아냐. 조심해.”
“……뭐?”
순간 흠칫한 진유리는 자신이 그랬단 사실에 부아가 치밀어올랐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거기서 더 갈등이 커지기 전에 이세아가 다른 임원들에게 일렀다.
“나 가볼게.”
“아, 어. 내일 보자.”
“선배님 가세요!”
“세아 잘 가.”
진유리를 뺀 나머지 전원의 인사를 받은 그녀는 몸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으며 걷다 보니 문득 입에서 피 맛이 났다.
불쾌한 통증과 혀끝에 감도는 희미한 철 냄새.
하지만 그보다도 가슴속에 자리한 형용하지 못할 감정을 더 크게 의식하며 이세아는 집으로 향했고, 현관문을 열자 오빠인 이도진이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당장은 저도 마음이 편치 못하고요……. 네, 그때 뵙겠습니다.”
동생이 귀가한 걸 알고 전화를 빨리 마무리한 건지 곧장 거실 쪽으로 걸어온 그가 말했다.
“아, 들어오기 전에 소금 뿌려야 하는데.”
“……됐어.”
그딴 미신 이세아는 믿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들의 현실에 영향을 줄 리는 없다고.
머쓱한 눈치던 이도진이 이번엔 질문을 건넸다.
“오늘 저녁 뭐로 먹을래? 너 기운 없어 보이던데 맛있는 거 해줄까?”
걱정스러워하는 말투.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기색.
이세아는 거기에 응해주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
그러니까, 나한테 간섭하지 마.
그 말만은 간신히 삼켰고, 그런데도 대화를 중단할 생각이 없는지 이도진이 다음 말을 꺼냈다.
“세아야.”
“……왜.”
“아직 확정 난 건 아닌데, 오빠 취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취직?”
궁금함보다는 당혹감이 컸다.
그렇게 멋대로 살더니 왜 인제 와서?
염의준의 일로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걸까.
그리고…….
이어진 대답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당혹스러웠다.
“너 다니는 제일고. 거기 수업 조교로 면접 볼 것 같거든.”
“…….”
“마침 과목도 마법역학인데, 내가 알기로는 그게 고2 과목이라서-”
“그래서?”
“어, ……응?”
“나랑은, 상관없잖아.”
당황해하던 이도진이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그래……? 그러려나…….”
슬퍼 보이는 표정.
그걸 계속 지켜보고 있기가 싫어 이세아는 짧은 말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왔다.
“저녁, 내가 알아서 먹을 거야. 부르지 마.”
그리곤 문을 달칵 닫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자주 보던 사람은 아니지만 마주치면 따뜻한 말을 건네던 염의준이 죽었다. 테러집단에 의해서.
장례식장에선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였다. 이도진과 나눈 대화, 한태강이 그에게 면박을 준 것.
한숨에 닮은 생각이 머릿속에 일렁였다.
‘파혼, 하려나…….’
차라리 서로에게 잘된 일일지.
혹은 꼴 좋다고 비웃어야 할지.
아니면 동생으로서 안타까워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 남지 않게 된 걸 기뻐해야 할지.
이세아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오빠인 이도진은 그녀에겐 너무도 복잡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어서.
고작해야 여덟 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솔직히, 흐릿하다.
그런 이들과 같이 살았단 건 기억하나 애틋한 추억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기억이 추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되새기지 못해서. 또는 그러지 않아서.
하지만 오빠인 이도진은 다르리라.
그에게 가족은 언제까지나 네 사람이다.
본인과 부모님. 그리고 동생인 자신까지.
‘그런 주제에…….’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다녔던 걸까.
중학생 때 이세아는 의도치 않게 오빠가 남긴 흔적을 자주 접했다.
제1 아카데미 중등부에서 치른 다양한 시험들.
역대 최고로 표기된 성적의 1/3 정도는 이도진의 기록이었다. 적어도 기록상으론 동나이대의 이시혁과 정세빈 이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이미 오빠와 사이가 멀어진 때였지만 그래도 의문만은 들었다.
‘저랬는데 왜 지금은?’이라고.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최고 기록에서 오빠의 이름을 발견하는 일이 급격히 줄어갔다.
거기서 또 시간이 흘러 고등부에서 보낸 일 년.
이젠 어디서도 이도진의 성취를 찾을 수 없었고, 이세아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 때문에 의지가 꺾였고, 찬란하던 재능이 빛을 잃었다.
그리고 그건 바꿔 말하면 이런 뜻이기도 했다.
오빠에게 있어 부모님은 그만큼이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존재였다고.
지금 함께 사는, 하나 남은 가족인 자신보다 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철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세아는 이도진이 자신에게 쩔쩔매는 첫 번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그나마 부모님이 남긴 가장 큰 흔적이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
그러니 집에선 챙겨주려 하면서도,
사실은 마음에 부담이 되니까,
그래서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방황하는 거겠지.
본심으론 자신처럼 거추장스러운 짐을 달고 있는 게 싫고, 그저 영원히 슬퍼하고 싶을 뿐이니까.
이세아는 몸을 일으켜 거울을 바라봤다.
이윽고 어떤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비교해봤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에도 나오는 사람들.
어릴 적엔 이도진이 틈만 나면 앨범을 꺼내 보여주며 그녀가 잊지 않도록 각인시키려 하던 사람들.
이시혁과 정세빈. 키워준 부모님.
어쩌면 지금 기분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진 모르겠지만…….
‘별로, 안 닮았어.’
그리고, 이도진은 닮았다.
오빠에겐 그들의 흔적이 분명하게 깃들어 있다. 자신과는 다르게.
좋고 싫고의 문제를 떠나서 사실이 그랬고, 여기서 더 깊게 생각하면 이미 지끈거리는 머리가 아예 깨져버릴 것 같았다.
그걸 견디기 어려워 이세아는 이불을 덮었다.
전신을 가리고, 죽은 듯이 호흡했다.
마치 이곳에 없는 사람처럼.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작게 침음했다.
세아 쟤가 상태가 많이 안 좋네…….
버릇없이 구는 거야 신경도 안 쓰인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미 익숙해.
되게 걱정되는데 말 걸면 애 스트레스나 더 줄 것 같고,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게 문제지.
그래도 오빠가 취직한다면 의외라는 반응 정도는 보일 줄 알았는데 자기랑 같은 학교로 출근하는 걸 꺼리는 마음이 월등해 보여서 그건 살짝 섭섭하긴 하네. 많이는 아니고, 진짜 살짝만.
하지만 결정을 물릴 수는 없었다.
제1 아카데미 고등부, 마법역학 과목의 전임 교원 자리.
엊저녁에 벌써 연락이 왔었다. 염의준이 내 번호를 알려줘서 교수 쪽에서 문자를 보냈더라고.
이래저래 일이 많다 보니 제대로 연락을 못 하다 이제야 답장한 건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며칠 지나고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는 식으로 정리가 됐다.
원래 거절할 작정이었지만 주인공이 제일고 학생이란 걸 알게 된 이상 나 편한 대로만 행동할 수는 없으니까.
더군다나 <킬 더 이블>의 1권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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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의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를 상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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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해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거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단 말도 있잖아. 그야 진유리 걔는 호랑이보단 고양이 쪽이라는 인상이 강했지만…… 아무튼.
시답잖은 감상을 떠올리며 웃고 있는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서연희에게서 온 전화였고,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왜요? 통화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내 목소리가 벌써 듣고 싶어졌어요?”
<……회의 있어.>
“……언제요.”
한 시간쯤 전과 똑같은 상황으로, 서로의 역할만 바뀐 대화가 이어졌다.
<어제 큰 건도 있었고, 모여서 얼굴 좀 보려고.>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가면 쓰고 있는데.”
<말이 그렇단 거지. 하는 김에 딴생각하는 애가 없는지도 점검해볼 거야.>
“알겠어요. 언제죠?”
<3월 14일로 확정. 그때 내가 시간이 비거든.>
거기까지 듣고 나도 보고해야 할 내용을 일렀다.
“저 제일고 조교, 그거 하려고요.”
잠시 말이 없던 서연희가 곧 선선히 답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근데 특정은 됐니?>
장례식장에서 본 위험인물이 누군지 알아냈냐는 질문. 나는 그런대로 정직하게 답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실마리는 잡았어요. 결론이 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러렴.>
이걸로 용건은 얼추 마무리됐다.
한데 내가 전화를 끊기 직전.
서연희가 넌지시 일렀다.
<난 직접 만든 것도 괜찮아. 맛은 좀 없어도 정성이란 게 있잖니.>
그리고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무슨 의미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알겠네.
서연희가 이끄는 조직 팬텀의 회합이 3월 14일.
그날은 보통 화이트데이라 불리는 날이다.
그야 저번 달에 나도 받은 게 있기는 한데…….
“초코맛 나는 담배 한 갑 줘놓고서는 무슨.”
어딜 수제 초콜릿을 바라고 있어.
피식 웃으며 투덜거리다 보니 조금 상쾌해졌고, 그 상태로 할 일을 가늠해봤다.
하나 남은 OX 질문.
이걸로 진유리가 주인공인지 확실히 알아볼지에 대해서.
어쩌면…… 만에 하나 세아일 가능성도 제로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
“아니, 아냐…….”
확답을 얻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기는 한데…… 그건 낭비에 가까웠다. 이미 후보가 둘로 좁혀진 데다 그중 한 명일 확률이 9할 이상이니까.
OX 질문이 아니더라도 내 힘으로 조사해서 뭔가 나올지도 모르니 여기에 쓰는 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 아니겠지. 그보다는 중요하게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었다.
+
-최종 챕터 ‘영웅 사냥’의 클리어 보상과 작품 완결 특전을 합산해 지급합니다.
1) 마력과 생명력 포인트 666p
2) 신체 포인트 13p
3) 소질 포인트 4p
4) 스킬 (랭크 A~S, 항목 중 택일)
5) 특성 (랭크 A~S, 항목 중 택일)
6) OX 질문 3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
OX 질문이야 남겨두기로 했고 1번부터 3번까지의 포인트.
이것들은 당장은 필요 없어.
현재로서도 내 한 몸 간수할 수는 있으니 변수가 생기기 전까진 아껴놔야겠지.
스킬도 같은 이유로 바로 결정할 필요는 없다.
보니까 후보가 여럿 있던데 무작정 S급을 고른다고 능사가 아니다.
나한테 맞는, 필요한 걸 습득해야 하고, A급이라 해도 숙련되면 스킬이 성장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남은 건 특성인데…….
이건 머지않아 필요할 일이 있을 듯싶었다.
A급 특성 둘에 S급 특성 하나.
세 가지 후보 중에 향후 직장생활을 하는 데 꼭 알맞은 스펙이 되어줄 만한 특성이 있어 보였거든.
두어 번 심호흡한 나는 그걸 골랐다.
<킬 더 이블>의 1권 제목이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라고 했지.
하지만 그건 주인공 입장이고, 최종보스인 나는 조금 바꿔 부르고 싶네.
이름하여 ‘아카데미의 천재 조교’…….
“……뭐라는 거야.”
순간 떠오른 유치한 생각은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3월 6일 토요일.
염의준의 장례가 끝나고, 세간의 충격도 어느 정도는 가라앉은 시점에 나는 마법역학 과목의 교수와 만났다.
볼이 폭 패이고 다크서클이 진한 중년 남자.
인사차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 그가 다짜고짜 오른손을 휘저었다.
스아아아…….
그 손길에 따라 마력 구체가 나타났고, 딱히 기대 안 한다는 듯한 어조로 교수가 대뜸 물었다.
“이거 구성 방식을 알겠어요?”
알다마다.
알기도 하고, 무슨 의도로 보여주는지도 알겠다.
어디까지나 고등부 수준에 한정한 이야기지만 마법역학의 기본이 되는 구체.
이것의 구성 원리를 해석할 수 있다면 다른 응용은 어렵잖게 해낼 수 있고, 그러니 이 사람이 알고 싶은 건 딱 하나라고 이해해야겠지.
연구하기도 바빠 죽겠고 애들 수업 따위는 귀찮기만 한데 나를 얼마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나는 단출하게 일렀다.
“회로 개수 17개, 전체 구성 식 3개, 중심축은 원칙적으론 1개로 해도 되는데 2개로 병행. 이유는 1개로 하면 어지간한 학생들은 보고 이해를 못 할 테니까. 맞습니까?”
“……으음?”
놀란 표정을 지으며 교수가 안경을 추어올렸다.
믿기지 않는단 눈치다. 내가 이런 걸 안다는 게.
마법역학 전공자들도 이렇게 척 보고 알진 못할 테니 그럴 만도 한데…… 나로선 상당히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중2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안 한 건 맞지만 그게 어려워서 그런 건 아니라고.
홀로그램이 꼴찌 하라고 시키니까 따른 거지.
물론 이번엔 그 홀로그램의 득을 본 점도 있다.
순전히 내가 똑똑해서 알아맞힌 것만은 아니야.
현재 내 시야 한쪽에는,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메시지가 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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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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