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Chapter 3. 제일고 (3)
***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해보란 뜻으로 말한 건데 아무래도 별로 효과는 없는 듯싶었다.
세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 갈 곳을 잃은 손이 살짝 움찔하는 모습.
여기선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는 거니까 이런 걸 귀엽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자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재차 말을 건넸다.
“이세아 학생?”
“……네.”
“구성 식의 정밀도에 비해서 힘이 너무 과하게 들어갔어요. 끝처리가 미숙한 게 특히 결정적이었고요. 모래로 집을 지어놓고 거기 들어갈 때 문을 성질부리듯이 쾅, 닫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자 세아가 나를 올려다본다. 뭔가를 반문하고 싶어 하는 듯한 눈빛.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도 짐작이 갔다.
하긴 말투가 좀 싸하긴 했지…….
내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냉정한 어조에다 지적 사항 중에서 곡해할 만한 구석이 있었단 걸 눈치챈 나는 재빨리 해명했다.
“어, 음…… 그러니까 제 말은, 이세아 학생이 집에서 문을 쾅쾅 닫고 다닌다는 게 아니라-”
“푸흡!”
억누르지 못한 웃음을 터뜨린 건 나와 세아를 번갈아 보고 있던 유해빈이었다.
애초에 세아 옆자리인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 자식이…….
너는 다음 수업 때 두고 보자.
“……다시 해보겠습니다.”
세아가 손을 휘저었다.
슈우우-
완벽한 공 모양은 아니어도 이번엔 그런대로 결과물이 괜찮네.
비록 학교 운동장 구석에 굴러다니는 주인 없는 축구공처럼 살짝 찌그러져 있긴 하지만 이제 막 마법역학에 입문한 고등학생인 걸 고려하면 나쁜 실력도 아니다.
그래도 지적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효율이 낮네요. 구성체를 유지하는 데 드는 품이 그걸로 얻는 효과보다 클 거예요. 실전에서 유의미한 레벨은 아니고, 반탄력과 직결되는 1번과 4번 회로 사이의 연결이 미흡하니 그 부분을 보강하면 개량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네.”
“이세아 학생은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확인해볼 테니까, 준비 잘해서 와요.”
“…………네.”
마음을 굳게 먹고 해야 할 말을 끝낸 나는 몸을 돌렸다. 강의실 왼쪽 학생들은 다 봤으니 이제 중앙부의 책상에 자리한 애들을 살피려는데…… 유해빈이 세아에게 묻는 말이 들려왔다.
“왜 다음 수업임? 집에서도 봐 달라면 안 되나?”
“입, 다물어…….”
“에 아으 우어이? 이에어오 아아아어 아 에아? (왜 다음 수업임? 집에서도 봐 달라면 안 되나?)”
“…….”
“입 다물래서 다물고 말했는데 너무 심하게 째려보는 거 아냐?”
나는 유해빈에 대한 내부 평가를 조금만 상향시켜주기로 했다.
그래, 해빈아. 잘하고 있어. 더 부추기라고.
내심 응원을 건네고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학생들의 결과물을 봐줬다.
‘엿보는 눈’을 계속 발동하고 있으려니 눈이 피곤하긴 했지만 크게 지장이 올 정도는 아니었고, 드디어 중앙 책상의 맨 앞자리에 다다랐다.
<킬 더 이블>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여학생.
진유리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청했다.
“제 구성체 평가해주시겠어요?”
굳이 엿보는 눈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강의실에 있는 학생 중엔 얘가 최고네.
유해빈도 훌륭했으나 진유리의 재능도 그리 뒤지진 않는 듯싶었고, 재능이 비슷한 수준이면 당연히 공을 더 들인 쪽의 결과물이 뛰어난 법.
설렁설렁한 유해빈보단 요소 하나하나에 신경을 쓴 듯한 진유리의 구성체가 단연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얘는 애가 열심히 하더라고.
내가 보기엔 서상욱 교수의 수업을 빙자한 졸음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한마디 한마디를 집중해서 들으며 필기까지 완벽하게 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그런 만큼 성과도 좋았고.
그게 깔 부분이 없단 말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흐음…….”
나직이 침음하며 나는 진유리의 구성체를 유심히 응시했다. 뭘 말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그러자 진유리의 눈에 언뜻 의문이 깃든다.
자기가 보기엔 완벽한데 왜 놀라거나 감탄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냐는 의미겠지.
하지만…….
나는 얘를 곧이곧대로 칭찬해줄 생각이 없었다.
장례식장에서도, 오늘 수업에서도, 틈만 나면 우리 세아한테 시비를 걸어댔지?
세아의 오빠인 내 지적 맛을 좀 봐라.
나는 마침내 입을 뗐다.
“1번부터 10번 회로까지 전부.”
진유리가 흡족해하는 투로 말을 받았다.
“그렇죠? 제가 봐도 꽤 괜찮게-”
“전부, 다듬을 부분이 보이네요.”
“……엥?”
얼이 빠져서 흘려낸 소리.
진유리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방금 잘못 들은 건지 자문하는 듯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일렀다.
“교과서에 적혀 있는 구성체 공식은 일반적인 가이드라인일 뿐입니다. 개개인의 마력 파장, 구성체의 완성도, 그에 따른 회로 균형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진유리 학생은 그렇지 못했네요.”
“그건, 근데 다른 애들은-”
급히 반박하려던 진유리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얘는 뭐랄까…… 되게 향상심이 있는 애네.
본인이 최고인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근거로 변명하는 건 자기 자신의 발전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단 걸 이미 잘 아는 듯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 지적이 타당하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고.
결국 나를 뚫어지라 올려다보며 힘겹게 묻는다.
“……어디가 부족한 거죠?”
“펜 들어요. 수치적인 부분과 회로 배치까지 다 손봐야 하니까.”
이어서 나는 제법 길게 지적했다.
다른 학생들은 콤마 단위의 수치까지 지적할 필요가 없었지만 얘는 그 수준을 넘어서 있으니까.
설명하는 나도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 분 가까이 쉼 없이 말을 이어나갔고, 진유리는 고개를 푹 처박고 열심히 펜을 놀렸다.
그리고 피드백이 끝난 다음, 나는 그제야 칭찬의 말을 건넸다.
“잘했어요. 잘했는데…….”
뒷말을 굳이 꺼내진 않고 진유리를 내려다봤다.
넌 그걸로 만족하지 않겠지? 라는 질문을 담아.
그녀의 대답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다음 수업 때, 다시 검사받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복습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메일로 질문해줘도 괜찮아요.”
일부러 휴대전화 연락처 얘기는 뺐다.
얘랑 메시지 주고받는 건…… 그건 좀 그래.
“……감사합니다.”
“좋아요. 자, 다음 학생?”
정원이 백수십 명이나 되는 대규모 강의라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피드백이 끝나니 수업을 마칠 시간이 다 되었다.
나를 전면에 내세운 그 순간부터 강의실 구석에 틀어박혀 논문 삼매경에 빠져 있던 우리 상욱 씨가 뿌듯한 목소리로 알렸다.
“에,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어요. 다음 수업부터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이니 참고하면 되겠고, 이만 수업 마칠게요. 질문 있는 학생은 이도진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돼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서상욱 교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사람처럼 신뢰가 가득한 눈길을 보내며 이른다.
“도진 군, 오늘 아주 수고했어요. 수업 끝나면 퇴근해 봐요.”
그리곤 부리나케 문 밖으로 나가버린다.
아니, 여보세요. 수업 다 끝났는데 왜 질의응답까지 떠맡기는 건데? 원래 교수는 당신이잖아. 이럴 거면 월급도 바꾸든가.
하지만 내가 어찌할 틈도 없이 학생들이 내 쪽으로 물밀 듯이 밀려왔다.
“교수님, 교수님!”
“저 약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당혹감을 갈무리하며 나는 작게 일렀다.
“줄 서서, 한 명씩 질문해주세요.”
“교수님, 혹시 여자친구 분 있으신가요……?”
“……미안하지만 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을게요.”
있으면 어쩔 거고, 또 없으면 뭐 어쩔 건데.
***
이세아는 강의실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인 이도진을 둘러싸고 수십 명의 학생이 호의적인 어조로 말을 거는 광경.
수업에 관련한 것, 이도진 개인에 대한 궁금증.
적잖이 곤란해하면서도 오빠는 친절하게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말로 표현키 어려운 감정이 일렁인다.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한숨을 내쉬며 이세아는 몸을 돌렸고, 강의실을 나서려던 그때.
“수업 들으러 가?”
그녀를 불러세운 건 진유리였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정말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상대. 이세아는 무시한 채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진유리가 여상스럽게 말을 이었다.
“교수님, 너희 오빠 대단하시더라?”
“용건 없으면 갈게.”
“너랑 나랑 다음 수업도 같은 건데 그렇게 급할 필요 있어?”
“할 말 있으면 짧게 말해.”
“딱히 할 말은 없어. 그냥, 너희 오빠 다시 봤다고. 역시 정세빈 마법사님 아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에 이세아는 뱃속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순간적으로 입이 굳어버린 것 같았고, 힘을 들여서야 되물을 수 있었다.
“무슨, 의미야?”
“별 뜻 없는데? 내가 정세빈 마법사님 엄청 팬이었거든. 그래서, 괜히 기분 좋아서 한 말이야.”
진유리가 의미심장하게 보내오는 눈길.
둘 사이를 제지한 건 가방을 챙기고 걸어오던 유해빈이었다.
“유리멘탈 이게 진짜 돌았나. 왜 또 시비야?”
“누가 유리멘탈인데?”
“너, 너. 세아한테 열등감 느끼는 거 뻔히 티 나는 님이요.”
“내가? 쟤를?”
“됐어, 가자.”
유해빈을 말린 이세아는 강의실을 나왔다.
옆에선 유해빈이 주절거리는 말을 흘려넘기면서 그녀는 다짐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진유리는 선을 넘으려 했다.
그것도 벌써 여러 차례나.
그러니 한 번만 더 그런 시도를 하는 게 눈에 띈다면…….
‘참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오빠가 학교에 있으니까.
그의 귀에 시답잖은 말이 들리지 않도록.
오후의 두 번째 수업도 끝나고, 분반별로 종례까지 마친 이세아는 교정을 나섰다.
집까진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쯤 되는 거리다.
오늘은 마음이 복잡해서 걸어가고 싶었고, 모퉁이를 돌아서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즈음.
빠앙-!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크게 울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익숙한 차량이 보였다. 이도진이 타고 다니는 스포츠 세단.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오빠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일렀다.
“가자.”
“…….”
이세아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오빠가 맡은 수업은 오후 세 시에 끝났다.
그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학교에 남아있을 다른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오로지 집까지 가는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과 보내고 싶은 마음에.
침묵이 이는 가운데 이도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 타게? 아침에 교문에서 내려주는 거 창피하다고 안 탄댔잖아. 그래서 일부러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대충 십 분?”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이세아는 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단 걸 이도진도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거기다 대고는, 도저히 걸어서 가겠단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수석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이세아는 조용히 차량에 탑승했고, 무척 들뜬 게 훤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이도진이 물었다.
“맞다, 기왕 이렇게 됐는데 오빠랑 드라이브하다가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세아 너 좋아할 만한 가게 몇 군데 아는데.”
‘누구랑, 어떤 이유로 가서 아는데?’라고 묻고 싶은 말을 겨우 삼킨 이세아는 단출하게 일렀다.
“집에 가고 싶어.”
“그래……?”
꽤 많이 실망한 듯한 대답.
이내 차량이 도로를 달렸고, 그런 와중에 이도진의 휴대전화가 연신 울린다.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그녀에게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줬다.
“아, 학생들한테 메시지 와서 저래. 이럴 줄은 몰랐는데 메일만 알려줬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이세아가 알기론 오빠에게 직접 오는 연락만이 아니었다. 제1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이용하는 익명 커뮤니티.
지금 이 시각 가장 반응이 뜨거운 게시물도 그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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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익명 (글쓴이)
날짜: 3/11 17:23
제목: 이도진! 이도진! 이도진! 이도진!
내용: 그는 사람인가?
댓글:
-익명 1: 이도진이 누군데
└익명 2: 아 ㅋㅋㅋㅋ 마법역학 안 듣는 선후배님들은 그러려니 하시라고요 ㅋㅋㅋㅋㅋㅋ
└익명 5: 그니까 이도진이 누구냐고
└익명 6: 저희만 알 건데요?
└익명 5: 내년에 들어야 하니까 알려달라고 ㅋㅋㅋㅋㅋ
└익명 6: 반말 죽고 싶니?
-익명 3: 근데 난 사실 수업 좋은지 모르겠어 ㅎ
└익명 4: 첫날부터 찍힌 1분반 출석번호 24번 진유리 교실에서 검거
└익명 3: 얼굴 쳐다본다고 제대로 못 들음...
└익명 7: 이건 이해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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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아는 오빠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어떻게 그만큼 뛰어난 마법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건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오빠가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면 기뻐하거나 최소한 신기해하는 마음 정도는 들어야 할 텐데.
이세아는 그저 두렵기만 했다.
만약 이도진이 앞으로도 훌륭하게 살아간다면.
파혼하지 않게 되거나, 혹은 무의미한 만남을 그만두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여동생과 함께 사는 집을 벗어나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그럼 나는?’
혼자 남게 될 자신은.
완전하게 가족이 없어져 버린 자신은.
그 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세아야.”
“……응.”
“오빠가 아까 수업 때 너무 심하게 지적한 것 같아서, 음, 그러니까…….”
“……그런 생각 안 해.”
“아, 그러면 다행인데, 아무튼 오빠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너 괜찮으면 오늘 수업했던 거 복습이랑 다음 수업 예습 같은 거 좀 봐주고 싶은데…… 어때?”
이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래도 돼.”
“그래? 음, 그래도 모르는 거 있으면 오빠한테 물어보고. 직접 안 물어보고 오빠 톡으로 보내놔도 되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그럴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세아는 결코 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었다.
오빠와 사이가 좋지 않다거나.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나.
좋고 싫고의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다.
그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사실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얹혀사는 주제에 덜떨어진 여동생으로까지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면서도 정작 오빠를 대할 땐 쌀쌀맞게 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모순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이세아가 판단하기엔 이게 옳았다.
오빠와 거리를 두지 않으면 나름대로 안정돼있는 지금마저 무너져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오빠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잘 해내는 것.
이런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는 그녀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
3월 11일 오후 여덟 시경.
세아에게 저녁을 챙겨주고, 나도 씻고 침대에 누우니 문득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제일고로 취직한 게 곱씹을수록 좋은 선택이었다 싶어서.
세아랑도 가까워진 것 같고, <킬 더 이블>의 1권 퀘스트를 달성하기도 편해졌고.
좀 바빠진 것만 제외하면 장점밖에 없지.
+
<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가 진행 중입니다.
-1권 태그: [아카데미] [로맨스 X] [캐릭터 중심]
-진행률: 14.2%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의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를 상회할 것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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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 당시와 비교해서 진행률이 10% 가까이 증가했다.
퀘스트와 관련한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 수치가 없는 건 아쉽지만 오늘 했던 대로 해나가면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지 싶은데.
내일은 금요일이라 출근하지 않는 날이다.
토요일도 쉬고, 일요일엔 팬텀 멤버들을 만날 텐데 그때만 골치 아픈 일이 없으면 좋겠네.
얄미운 홀로그램이 내 바람을 산산이 깨부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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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3월 14일 이전까지 팬텀 내부의 위험인물을 파악해 처단할 것.
-클리어 보상: 주관식 질문 1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되거나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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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장 서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맞아, 그러고 보니 오늘 첫 출근인데 오랜만에 학교 가니까->
“일찍 보고 싶어요.”
<……술 마셨어?>
“저희 회합, 하루만 일찍 당기죠.”
<초콜릿 안 주려고 수 쓰는 거니?>
“그런 게 아니라, 알고 보니까 쥐새끼가 한 놈 있는 것 같아서…… 잡아놓고 드리려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지는 흥미.
이내 서연희가 선선히 답했다.
<3월 13일 오후 6시, 장소는 전에 말했던 대로. 그 정도면 괜찮으려나?>
“네, 그때 뵐게요.”
통화를 마무리하고, 불현듯 난처한 일이 하나 생긴 걸 깨달았다.
이렇게 되면 토요일은 외박해야 하는데 세아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담…….
나로서는 그날 치러야 할 일보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