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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4화 (14/207)

#14화. Chapter 4. 삭월야 (1)

***

결국 세아에게 말을 꺼낸 건 회합 당일인 토요일이었다. 그것도 내 의도라기보단 자연스럽게 화제가 그쪽으로 흘러가서.

오후 다섯 시 무렵, 샤워를 마치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고 있는데 거실에서 세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또 어딜 싸돌아다니려고 준비하는 거냔 의문이 실린 눈빛이었다.

집에서 퍼질러져 있을 거면 굳이 이런 타이밍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까. 더 미룰 수 없단 걸 절감한 나는 그제야 말을 꺼냈다.

“오빠 밖에 좀 나갔다 올 거야.”

“……지금?”

“응, 아마 자고 올 것 같은데. 저녁은 만들어 놨으니까 국만 데워서 반찬이랑-”

“누구랑?”

나직이 흘려낸 추궁에 가슴이 선뜩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차라리 진작 말해놓을 걸 그랬다고 반성하며 세아에게 답했다.

“아, 친구들이랑 노는데…… 밖에 있을 건 아니고 방 하나 빌려서 거기서 조용히 놀 거야.”

“친구……‘들’?”

거짓말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는 듯한 반문.

애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도 이해가 갔다.

지금 나가서 외박하면 3월 14일까지 논다는 뜻이 되잖아. 또 누구 여자랑 방탕한 시간을 즐기려는 거 아닌가 싶겠지.

나는 사실관계를 일러줬다.

여덟 명 모이는데 남자 다섯에 여자 셋이라고.

정말로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모이는 거라고.

기실 친구란 단어를 사용하는 건 어폐가 있겠지.

다만 세아에게 설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선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다.

친구, 혹은 동료.

그보다 건조하게 말한다면…… 이용 가치가 있는 자들.

“내일 온다고?”

“응, 하루만 자고 금방 올 거야. 늦어도 내일 점심까지는.”

“……맘대로 해.”

세아는 그 말만 남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뭘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단조로운 말투.

그러나 말에 희미하게 짜증이 어려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한 이후론 그나마 대화 빈도가 늘었으나 그 이전, 다시 말해 하루에 한 마디 나누기도 어려웠던 시절.

세아가 작게나마 내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외박한다고 알릴 때였으니까.

내 동생은, 혼자 집에서 밤을 보내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나갈 채비를 다 마치고 신발까지 신은 나는 세아 방을 향해 크게 외쳤다.

“금방 올게, 밥 잘 챙겨 먹고!”

방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서연희와 만난 건 약속대로 오후 여섯 시였다.

내 또래. 160대 후반의 키. 백금발로 염색한 듯 보이는 단발에 화려하게 꾸민 옷차림.

요즘 자주 보는 그 외견으로 걸어온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받을 건 받아야지?”

화이트데이니까 초콜릿 갖다 바치란 뜻이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다 끝나고 준다고 했잖아요.”

“아, 그랬던가? 뭐, 좋아. 가자.”

이 외견일 때의 서연희는 평소보다 훨씬 발랄한 언동을 보인다. 일부러 꾸며낸 거라기엔 본인도 꽤 즐기는 듯하지만…… 아무튼.

마치 연인이 연인에게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낀 서연희가 나를 이끌길래 물었다.

“어디로 가죠?”

“옷부터 갈아입어야 하잖니? 갈아입을 수 있는 대로 가는 거지.”

“……그럼 내 얼굴도 바꿔줘요.”

“왜?”

의아해하는 물음에 간단히 자초지종을 일렀다.

세아한텐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고 말해뒀다고.

“근데 여자랑 단둘이 호텔 드나들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봐요. 완전히 거짓말한 게 되잖아요?”

그러자 서연희가 옅게 인상을 찡그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나를 흘겨보더니, 이내 기가 찬다는 듯한 말투로 이른다.

“도진아…… 너도 정상은 아닌 거 알지? 매번 그렇게 동생 챙기면서 살면 피곤하지 않아?”

“전혀요.”

이게 마음 편하고 좋으니까 이렇게 사는 거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내 얼굴 근육이 약간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닮은 티가 날 테지만 그냥 흘낏 본다면 나라는 걸 알아보기 어려울 수준으로.

한데 불현듯 생각났단 것처럼 서연희가 물었다.

“나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만 대답해줄래?”

“뭔데요?”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세아만큼…… 아니다, 그 정도까진 기대도 안 하고, 절반만큼이라도 중요하긴 하니? 난 그래도 너 많이 챙겨주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매기겠어요.”

한 명은 우리 부모님을 제외하고, <세계의 수호자>에서 내가 가장 아끼던 등장인물이자 현시점에서는 내 최대의 조력자.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

나는 그 둘을 저울에 달아서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냉철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히 나랑 세아랑 둘이 물에 빠지면 누구 구할 거야? 둘 다 구하는 건 반칙이고,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서연희 앞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이냐는 걸 논외로 둔다면, 문제 자체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살짝 망설이면서도 입을 뗐다.

“……그건-”

“됐어, 그냥 놀린 건데 뭘 진지하게 고민한담.”

심심해서 장난 좀 쳐봤다는 것처럼 내 어깨를 툭 친 서연희가 걸음을 재촉했다.

오가는 장소로 이용할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손을 휘둘렀다.

퍼엉!

경쾌한 소리와 함께 멋들어진 정장과 드레스가 허공에서 떨어져내렸다.

이윽고 서연희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곤 왜 보냐는 식으로 마주 보고 있는 내게 빙그레 웃으며 일렀다.

“안 볼 테니까 여기서 갈아입어. 나도 갈아입을 거니까 너도 훔쳐보진 말고.”

“굳이 안 볼 거면 한 명은 다른 데서 갈아입어도 되겠네요.”

“……미리 대답 연습해왔어?”

“뭘요?”

천연덕스럽게 답한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흰색 가면까지 쓰고 밖으로 나오니 서연희가 내게 다가왔다.

새까만 드레스를 차려입고, 챙이 넓은 모자 끝에 달린 검은 면사포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자태.

그리고는 대뜸 말했다.

“가만히 있어 봐.”

“네?”

대답 대신 서연희가 손을 뻗었다.

섬세한 손가락 끝이 내 목덜미를 살며시 스쳤고,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조용히 묻는다.

“일단 한 번 더 점검해두겠는데…… 쥐새끼라는 게 정확히 누구지?”

“글쎄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세 명’ 중에 있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겠지. 배신자인 건 확실하고?”

“그것도 아니에요. 지금으로선 이대로 놔두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만 압니다.”

홀로그램이 배신자라고 직접 지칭하진 않았다.

‘위험인물’이라고 했지.

물론 그래 본들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어쨌든, 오늘 죽여야 할 거예요.”

홀로그램이 제시한 퀘스트는 위험인물을 처단해야 완료된다. 설령 당장은 배신자가 아니더라도 훗날엔 그에 버금가는 위협을 가져온단 뜻이겠지.

“알겠어, 난 구경만 할 테니 네가 알아서 하렴.”

“저야 좋지만 그래도 될까요?”

“당연히 되지. 너랑 나 사이인데.”

피식 웃으며 답한 서연희가 손을 내리그었다.

그 손길을 따라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게 공간이 갈라졌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걸었고…….

어느새 어두운 숲속에 자리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삭막한 풍경과 외떨어진 아름다운 성의 정경. 은근히 자랑하는 어조로 서연희가 일렀다.

“공을 좀 들였지. 오늘이 지나면 없애야 한단 게 아까울 정도로. 제법 아늑하게 침실도 만들어뒀는데…… 쓸 일이 있을진 모르겠네?”

“굳이 잔다면 저는 아까 그 호텔이 좋은데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아무리 그래도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잖아요.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어깨에 뭔가 살며시 내려앉는 감촉이 든다.

거의 안개에 가까울 정도로 가느다랗게.

조금씩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몰 시각에 다다라 해는 벌써 저물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오늘은 음력 2월 1일이다.

삭월(朔月).

빛을 잃고 희미해지는 음력 초하룻날의 달.

밤이 되면 주위의 모든 게 깜깜해져 버리겠지.

이미 정리된 사항이지만 다시금 서연희에게 일렀다.

“오늘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별로 나서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어요.”

“그렇게 해줄래?”

배려라면 배려라 할 수도 있을 말에 서연희가 기꺼워하며 미소를 지었고, 뒤이어 넌지시 물어온다.

“휴대전화는 껐고?”

“옷 갈아입으면서요.”

세아한테 혹시나 연락이 오면 어쩌나 싶지만…… 어차피 휴대전화는 쓸 수가 없을 테니까.

그즈음 하늘에 안개가 일렁였다.

모두 더해 여섯 곳. 검은 아지랑이를 헤치고 여섯 사람이 제각기 나타났다.

“내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

염의준을 죽일 때 왔던 키가 훤칠한 남자.

검은색 가면을 썼다.

“쓸데없이 귀찮게 부르기는.”

덩치가 장대한, 가면이 작아 겨우 눈코입만 덮은 사내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린다.

그도 염의준을 죽일 때 나와 같이 있었다.

“…….”

체구가 가녀린 여자.

그녀 또한 얼마 전에 봤던 멤버다.

남자들과 달리 귀여운 토끼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걸로도 가려지지 않는 은색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가 시선을 끌었다.

“다들 오랜만이군그래.”

등이 굽고 키가 작은 노인.

“그러게요, 작년에 보고 처음인 것 같은데.”

앳된 목소리를 지닌 소년.

“…….”

여우 가면을 쓴 차분한 분위기의 여성.

그들 여섯에 나와 서연희까지 총 여덟 명이다.

국적과 성별과 나이와 인종이 저마다 다른 자들.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려 있는 범죄자라는 점이다.

탈취한 유물은 A급 이상만 따져도 수십 개 이상.

목숨을 앗아간 S급 헌터조차 여럿.

일급 범죄조직 팬텀의 멤버 전원이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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