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15화 (15/207)

#15화. Chapter 4. 삭월야 (2)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 본연의 평판 또한 판이한 차이가 있다.

36 영웅의 일인이며,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수(水) 속성 마법사이자 공간 마법과 계약 술식의 권위자인 서연희.

나는 돈 많은 백수……에서 최근 들어선 아카데미 교원으로 전직.

나머지 멤버들의 프로필도 다양하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사.

촉망받는 신진 헌터.

각성자 명문의 후예.

서연희에게 얼핏 들은 거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예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멤버도 있다더라고.

여하간 도합 여덟 명으로, 세간에서 열 명 이상이라 추측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동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야 열 명을 넘길 때도 있기는 한데…… 그다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작전 수행 중에 죽거나.

변절하려다 들켜서 죽거나.

갑자기 잠적해버린 자를 서연희나 내가 찾아내 합리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거나.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자기 이해관계를 따져 개별 작전 하나씩만 참여하는 객원 멤버나 조력자들도 있고.

그런 내막을 모른다면 열 명 이상으로 추정할 법도 하지만 현시점 팬텀의 정규 멤버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다.

단장인 서연희와 실무 관리자인 나.

일반 단원이 여섯 명.

개개인의 전투력은 두말할 것 없이 초일류다.

단순한 힘의 총량만을 따져도 최저선이 A급이고, 실전에 들어가면 그조차도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

단적인 예로 염의준을 죽일 당시를 들 수 있겠지.

설령 내가 빠졌다 해도, 다른 세 명으로도 작전을 수행하는 것 자체는 가능했을 거다.

S급 헌터이자 36 영웅의 일인.

세계 최강을 논하긴 부족하나 그 아래 최상위 강자들을 거론할 땐 심심찮게 이름이 나오는 그자를 단 세 명의 협공으로 죽일 수 있단 뜻이다.

염의준이 전성기의 전력을 유지했다면 어찌 됐을지 장담을 못 해도, 이십 년이나 놀고먹었으니 처리하는 것 정도는 불가능하지 않았겠지.

결론적으로 말해서 팬텀은 강하다.

개개인으로서도 강하며 정규 단원을 비롯해 가진 힘을 총동원하면 수장인 서연희의 개입 없이도 대형 길드와 능히 맞설 수 있을 정도.

그래서 동업자로 보면 제법 쓸 만한 사람들이라고 나도 인정하고 있는데……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작전 들어갈 때만 빼면 별로 살가운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보시오, 보스. 딱히 중요한 일도 없어 보이는데 왜 귀찮게 부른 거지?”

“귀가 떨어질 것 같으니 조용히 좀 하는 게 어때. 보스, 저런 말은 귀담아듣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지요.”

항상 불평불만이 잦은 거한과 비교적 유들유들한 언행을 보이는 남자가 언쟁을 벌인다.

“저 둘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네요.”

“그러게 말이야. 공적인 자리인데…… 으흐음, 나 때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

“아…… 그러시군요.”

앳된 목소리의 소년과 등이 굽은 노인은 그나마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나 딱히 공감대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자 두 명.

토끼 가면을 쓴 멤버와 여우 가면을 쓴 멤버는…… 이 둘은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냥,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고.

성격적으로 안 맞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연희야 매번 강 건너 불구경이고, 그래서 주의를 환기하는 건 거의 내 몫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쿠웅!

발을 한 번 구르자 땅이 뒤흔들렸다.

제법 강한 지진이 난 것처럼 거센 진동이었지만 겨우 그걸로 자세가 흐트러질 반편이는 이 자리에 없었고, 그러나 단원들의 이목만은 내게 집중됐다.

“사담은 그쯤하고 이만 들어가지. 보스, 이쪽으로.”

내가 정중히 권하자 서연희가 오른손을 가슴께로 들어 올린다. 그리곤 검은 면사포에 가려져 아주 희미하게만 드러나는 시선을 내게 보내온다.

눈빛으로 대화가 오갔다.

<뭡니까.>

<에스코트해줘야지.>

<싫다면요?>

<그래……? 그러면 내가 기분이 좀 우울해질 것 같은데…… 너한테 안 맡기고 내가 나설지도 몰라.>

재빨리 손을 뻗은 나는 서연희의 오른손을 아래에서 떠받치듯이 잡았다.

비단 <킬 더 이블>의 퀘스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 밤이니까.

저걸 구실로 요구하면 들어주지 않기가 어렵지.

“고마워.”

“……가시죠.”

적어도 겉으론 조직원을 상냥하게 대하는 보스와 그녀를 충실히 수행하는 부하의 모습으로, 우리는 성을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전부터 궁금했는데 보스와 저자는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시지.”

흥미가 담긴 거한의 물음과 불쾌함이 실린 키가 훤칠한 사내의 대답.

“…….”

“…….”

여자 둘은 관심이 없는지 별말을 안 하는 중이다.

“맞는 거 같죠?”

“아직은 아니라도 그리될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지. 내가 젊을 적, 지금은 죽은 아내와 한창 가까워질 때의 거리감이 꼭 저랬어.”

“그러시구나…….”

노인이 자기 옛날얘기를 풀어놓으려 하자 괜히 말을 시켰다는 듯이 소년이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런 사이가 아니란 건 논외로 두고, 지금 상황을 저들이 더 정확히 알았다면 의견이 기울지 않았을까 싶네.

서연희가 나와 맞닿은 오른손 중지와 약지로 내 손바닥을 부드럽게 훑어내리고 있는 걸 알았다면.

고의적인 행동과 우연한 스침.

그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는 움직임이라 당하는 나로서는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다.

<……뭐해요.>

<응? 뭐가?>

아니다, 눈빛에 그득한 장난기를 살펴보니 이건 무조건 고의가 확실해.

결론이 난 터라 이번엔 육성으로 제지했다.

“못된 손 자제해주시죠.”

“손이 왜? 무슨 일 있니?”

“…….”

그즈음 성문이 열렸다.

규모가 크진 않으나 어쨌든 성이라 어지간한 건물의 실내로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바닥에 깔린 카펫. 고풍스러운 촛대와 가구들까지 아주 훌륭하다.

한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자리해 있고, 2층을 빙 둘러서 배치된 방의 수는 총 여섯이었다.

한 명은 잘 일이 없을 테니 모두 방에 들어간다면 사람이 일곱 명인데…… 왜 방이 하나 부족한 여섯 개인지는 서연희에게 굳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들으면 머리가 아파질 것 같아서.

게다가 난 어차피 여기서 안 잘 거니까.

이동 거점으로 사용한 호텔 방으로 돌아가서 잘 생각이었다.

티익-

서연희가 손가락을 튕겼다.

불이 꺼져 있던 촛대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샹들리에 조명이 환하게 빛난다.

싸늘하던 성 내부에 끼쳐오는 훈훈한 온기.

그리고 빛이 들어섬에 따라 중앙 테이블에 놓인 것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더운 김을 내뿜고 있다.

내가 빼준 상석에 앉으며 마지막으로 내 손바닥을 살짝 쓸어내린 서연희가 단원들에게 일렀다.

“다들 와줘서 고마워.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올 거라고는 기대 안 했는데…… 준비한 보람이 있네. 아, 혹시 급하게 하루 당겨서 문제가 된 사람 있나? 그러면 미안하게 됐는데. 이 나라는 내일이 화이트데이라고 해서 연인과 보내는 날인데…… 그런 거라던가.”

“응? 그런 날도 있나?”

“그러게요? 밸런타인데이는 알아도 이건 처음 듣네요. 아, 별일 없어요.”

“죽은 아내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긴 하나 오늘은 별일 없소이다.”

거한과 소년과 노인이 차례대로 이른 말.

여자 둘은 별다른 대답이 없고, 키가 훤칠한 남자만 조금 들떠서 주절거릴 뿐이었다.

“보스께서 부르시는데 약속이 있더라도 와야죠. 오늘 뵙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그래?”

여상스럽게 반문한 서연희가 제안했다.

“우선 먹자. 술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원하면 말해주고.”

“저도 마셔도 되나요?”

“넌 안 되지.”

소년의 질문에 서연희가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올 뻔한 걸 참았다.

콘셉트 잡는 사람이나 그걸 받아주는 사람이나, 내막을 아는 나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아서.

그 후론 소란스럽지 않게 식사가 이어졌다.

죄다 얼굴에 뭘 쓰고 있으나 음식 먹는 게 불편하진 않다.

서연희가 손을 휘두르자 각자 쓴 가면에서 입매 부분만 사라졌고, 그 자리를 검은 안개가 덮었으니까.

익숙한 광경인데도 볼 때마다 신기하네.

하기야 다들 국적이 다른데 대화가 통하는 게 더 신기한 일이려나.

우리는 각자의 자국어로 말하고 있고, 한데도 대화가 통한다. 서연희가 걸어놓은 마법을 통해서.

단원 상당수의 신상명세를 파악하고 있는 나조차 그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말하는 것으로 들리진 않는다. 한국말 쓰는 거로만 들리지.

접시 위의 음식이 절반가량 비워졌을 즈음, 문득 노인이 내게 물었다.

“자네 염의준을 죽였다지?”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일반 단원 중에선 내가 유일하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본래 외견으로 돌아와도 나보다 훨씬 연장자니까.

“내가 아는 염의준은 만만한 자가 아닌데…….”

가면에 가려 있는 눈동자가 언뜻 빛나는 것 같다. 마치 노인이 나를 꿰뚫어 보려 하는 듯한 이질감.

그때 거구의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끼어들었다.

“흥, 별것도 아니더군. 내가 했어도 됐을 거야.”

“글쎄…… 그건 어땠을까?”

“뭐야?”

내가 비꼬듯이 답한 말에 거한이 발끈했으나 그 누구도 그에게 동조하는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입가로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며 나는 시계를 봤다.

오후 여덟 시 반.

시간이 흐를수록 공간 전체에 긴장이 들어차고 있다.

얼굴이나 보자는 명목으로 부른 것이지만 결코 그게 목적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모일 때면 항상 사건이 있었다.

정규 멤버 절반 이상이 참여하는 큰 계획을 공표하거나.

혹은 모인 자리에서 피가 흐르거나.

서연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얼추 적당한 시기가 된 듯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상석의 서연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낮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역시나 꿍꿍이속이 있었군.”

거한의 빈정거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지 않는단 게 아니라, 어차피 곧 버릇을 고쳐주게 될 거라서.

일반 단원 여섯 사람.

그중에 노인과 소년과 토끼 가면을 쓴 여자는 제외하고 남은 셋.

키가 훤칠한 남자, 성질머리가 더러운 거한, 여우 가면을 쓴 여성을 차례로 응시하며 단정적으로 명했다.

“아직 ‘소원’을 말하지 않은 자는 오늘 정해주고 가야겠어.”

“음?”

“조금…… 갑작스럽네요?”

“…….”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셋.

“하,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나는 원치 않아요.”

“이 자식 가만 놔두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대상에 포함되는 셋.

키가 훤칠한 남자는 난색을 보인다.

여우 가면은 차분한 어조로 거부.

특히나 격하게 반응한 건 거한이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놈이 성큼성큼 내게 걸어왔다.

“보스에게 알랑대는 재주뿐인 놈이 미쳤구나.”

깔보는 기색으로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흘끗대며 서연희의 동향을 살핀다.

그녀가 말릴지 아닐지.

그걸 기준으로 놈의 행동이 결정되겠지.

서연희는 피식 웃기만 했다.

뭘 하든 너희끼리 알아서 해보라는 의미로.

나는 단출하게, 사실만을 말했다.

“말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늘 여기서 죽어야 해.”

“웃기지 마라!”

거세게 소리친 놈이 주먹을 휘둘렀다.

화아악-!

내 양쪽 어깨에서 솟아난 검은 날개가 전신을 감싸며 놈의 공격을 막았다.

콰아아아앙!

충격파가 일며 테이블 위의 집기들이 휩쓸려 날아갔다.

“이까짓 거!”

발악하듯 외친 놈이 우렁찬 기합성을 내지른다.

검은 날개가 점점 열리고 있다.

그리고 몇 초쯤 지났을까.

파아아아-!

마침내 버티지 못한 날개가 활짝 열렸다.

“앞으론 개소리 지껄이지 못하도록 해주지!”

기고만장해진 거한이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 놈의 손아귀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전해져온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검은 날개를 꺼냈다.

크게 팽창해, 검은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결국엔 거한까지 덮었다.

“뭣?”

당황한 놈이 발버둥을 치지만 날개로 감싼 공간 내부는 이미 내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거부할 수 없는 흐름에 의해 놈의 몸이 반 바퀴 돌았다.

콰악!

근육이 두꺼운 목덜미를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놈이 뒤돌아보기 전에 거구를 땅에 메다꽂았다.

콰아앙!

카펫이 산산이 찢기고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부서졌다.

“크아악!”

괴성을 지른 놈이 발악하며 버둥거린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왼발을 들었고, 그대로 놈의 목을 밟았다.

퍼어억!

“컥, 커헉!”

어지간한 A급 각성자라 한들 목이 부러져 살아남지 못했을 공격. 그러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놈은 죽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럴 걸 알고 세게 밟은 거고.

과한 감이 없진 않지만…… 전부터 이 자식 하는 게 거슬렸거든.

우직!

콰드득!

사지를 모두 무력화시키고 뼈를 부러뜨렸다.

포션 먹으면 나을 테니 방심한 대가치곤 싸게 먹힌 거지.

여전히 왼발로 놈의 목을 밟은 채로 나는 다시금 일렀다.

“‘소원’을 말하지 않은 세 사람은 너희가 가장 욕망하는 바를 보스에게 털어놓아라. 보스는 너희가 그걸 이룰 수 있게 도울 것이며, 그 대가로 마음을 엿본다. 만약 이행하지 않겠다면…… 그 순간부터 팬텀에서 제명한다.”

물론, 제명이라는 말은 죽음과 동의어다.

애초에 여기 왔을 때부터 너희에겐 선택지가 없었어.

소원을 말하지 않고 죽든가.

소원을 말하고 살아남든가.

소원을 말했지만, 속내가 읽혀서 내게 죽든가.

셋 중 하나만 택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

오후 열 시.

어느덧 완연한 밤이라고 해야 할 시각이었다.

오빠가 집을 나선 이후로 무려 수 시간.

이세아는 그동안 입 밖으로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마음으로만 실낱같이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약속이 취소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에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혼자 아침이 오길 기다려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도진에게선 단 하나의 연락도 오지 않았고, 그녀는 으레 그렇게 해왔듯이 오늘도 체념하기로 했다.

헛된 기대인 걸 알지만 그런데도 바라던 장면을 접어서,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거실로 나섰다.

거실의 불을 켰다.

부엌으로 향해서 불을 켰다.

여러 개의 방과 욕실에 이르기까지 넓은 집에서 켤 수 있는 모든 불을 켰다.

그리고 TV를 틀어서 소리를 키웠다.

환한 불빛과 TV에서 들려오는 소음.

실은 그런 것들로 안정이 되진 않지만, 그조차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버릇.

오빠가 집을 비워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치르는 오래된 의식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