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Chapter 4. 삭월야 (3)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
아직 중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이세아는 그때부터 이미 이런 습관을 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기 방의 조명만 켰다. 얼마간 지나선 거실도. 그다음엔 부엌. 또 그다음엔 욕실과 모든 방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된 이도진은 부쩍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주말이면 낮에는 거의 얼굴을 마주치기도 힘들었고, 밤이라 해도 상황이 썩 다르진 않았다.
이따금, 구체적으로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아예 밤이 새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이세아는 집 안의 조명을 모두 켰고, 침대에 누워 전신을 이불로 가렸다.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드물게 잠이 들어도 도중에 몇 번이나 깨어나곤 했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어떤 기대감을 품으며 방을 나와보면 켜둔 불빛이 환했다. TV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지 그뿐이었다.
오빠는 오지 않았고, 그녀는 켜뒀던 모든 걸 도로 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새벽에 걸맞은 적막을 만들어내곤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이도진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그런 일이 오래도록 반복되어왔다.
오늘도 마찬가지겠지.
‘여덟 명이라고 했지…….’
낮에 이도진에게 듣기로는 분명히 그랬다.
자신을 포함해 남자 다섯 명과 여자 세 명. 친구들과 놀 거라고.
이세아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딱 한 번, 길에서 오빠를 본 적이 있다.
모르는 여자와 걷고 있는 장면.
그 한 번의 목격으로 이세아는 세 번의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 약혼녀인 한세라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마치 연인처럼 가까운 거리여서. 눈을 깜빡이고 다시 봤으나 절대 친구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는 예뻤다.
여태 살면서 봐온 사람 중에 단연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미인인 한세라보다는 못했지만, 그녀와는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화려한 옷차림에 감각적으로 걸친 장신구가 반짝였다. 외모도, 짓는 표정도, 꼭 그와 어울리게 빛이 나는 듯했다.
그런 사람이 오빠에게 다정한 말투로 무어라 재잘대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충격.
오빠인 이도진이 낯설었다.
집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어딘가 달라서.
곁의 여성과 맞춘 듯한, 이세아는 본 적이 없는 차림새.
권태로워하는 기색이지만 그런데도 상대를 편안하게 여기는 듯이 말을 주고받는다.
마치 이제까지 알던 오빠가 아닌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충격.
이도진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다음날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그에게 이세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뭐했어?>
<아, 그냥…… 친구들이랑 놀다 보니까 자리가 좀 길어졌네. 늦게 와서 미안해.>
그녀는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얹혀사는 주제에 그럴 자격도 없었고, 이도진이 무슨 표정으로 어떻게 대답할지 알지 못해서.
그걸 대면하는 게 두려웠다.
대신 지난 수년간 해왔던 것처럼, 마음을 나누기로 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오빠.
집에 돌아오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어쩌면 동생이란 존재를 버겁다 여길지도 모르는 오빠.
둘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세아의 마음은 깊고 짙어서, 그걸 얕고 옅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방향성만은 둘로 가를 수 있었다.
본래 가진 애정. 한데도 어쩔 수 없이 샘솟는 미움.
두 개의 감정을 별개로 두면 된다.
그렇게 해서 미움을 겉으로 드러내면, 애정은 불순물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순수하게 남을 수 있다.
그러면 균형이 맞았다.
사실은 미움을 감당할 수 없고, 애정은 마음 한구석에 고여서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걸 이세아 자신도 알고 있지만.
그것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힘이 드니까.
당연히 오늘도 그랬어야 할 텐데…….
‘기분이 이상해.’
새 학기에 접어들어 최근 오빠와 접점이 많아져서일까. 평소처럼 잘되지 않았다.
불을 다 켰고, TV 소리도 들려오고 있으니 이제 침대로 돌아가면 되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열 시 십 분…….’
휴대전화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각.
이쯤 됐으면 일정에 차질이 생겨 돌아올 거란 기대를 품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지.
그런데도 이세아는 메신저 앱을 켰다.
오빠와의 개인 대화방. 그의 메시지는 많았고, 자신의 것은 적은 데다 길이가 짧고 내용도 단조로웠다.
이세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언제 와?’라는 문장을 적어봤다. 결코 송신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써보기만 하고는 지우려 했다.
그저 실수였을까. 아니면 본심으론 바랐던 걸까.
예기치 못한 사고에 이세아는 반나절 만에 작게나마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아.”
손가락이 액정을 스친 것이다. 하필이면 ‘보내기’ 아이콘이 위치한 곳으로.
-이세아: 언제 와? (22:13)
수신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숫자 1이 사라질세라 이세아는 서둘러 메시지 전송을 취소했고, 그러나 흔적만은 남았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아…….”
메시지를 지우는 데만 정신이 쏠려 여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게다가 대화방에 들어와서 확인하지 않았다 한들 미리보기로 벌써 봤을 수도 있다.
수습하려면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내야만 했다.
-이세아: 내일
-이세아: 몇 시쯤 올 거야? (22:14)
이러면 적어도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겠지.
그나마 둘러댈 방법은 이게 전부였다.
“……바보도 아니고.”
자신의 손가락을 원망스럽게 흘겨본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불행 중 다행일까, 갑자기 긴장한 탓에 몸이 나른해졌다.
이대로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켜놓은 조명과 TV 전원을 껐다.
그리고 방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혹시 몰라서 메시지 수신음은 최대로 해두었지만 오빠에게서 답장이 오는 일은 없었다.
***
소란이 가라앉은 다음.
세 명 모두 ‘소원’을 말하기로 정해졌다.
“시간을 줄 테니 신중히 고민해보렴.”
단출하게 이른 서연희는 2층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진즉에 소원을 말했던 멤버 셋 중에 두 사람, 노인과 아이가 내게 말을 건네왔다.
“형, 전보다 더 세진 거 아니에요? 깜짝 놀랐네.”
“나도 다시 봤군그래. 그 정도면 염의준이 내가 알던 그였다 해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었겠어.”
“먼 길 모셔놓고서는 좋지 못한 일이 있어 죄송하군요.”
내심으론 동의하지 않았으나 굳이 겸양을 표하지 않고 그렇게만 답했다. 글쎄, 염의준이 전성기 실력 그대로였다면 결과가 어땠을지……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당시 내 전력으론 잘해봐야 무승부였겠지.
지금이야 쓰지 않은 홀로그램 보상도 있고 새로 얻은 게 많으니 그걸 다 동원하면 이기긴 하겠지만.
전투의 여파로 엉망진창이 된 성 내부를 둘러보니 노인과 아이를 제외한 일반 단원 네 사람은 제각기 흩어져 있다.
토끼 가면은 저쪽 멀리서 내가 서 있는 곳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고, 여우 가면은 방금 막 성을 나섰다.
제정신이면 도망치려는 건 아닐 테고 그래 봐야 금방 잡힐 테니 골똘히 생각을 해보려고 나가는 거겠지.
키가 훤칠한 남자는 여전히 난처해하는 눈치다.
그야 느닷없이 소원을 정하라고 하면 그럴 만도 한데, 심정은 알겠지만 어쩔 수 없어.
말하지 않는다면 저자를 위험인물 용의자 일 순위로 간주해야겠지.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아까 나한테 두들겨 맞았던 거한이 멋쩍어하며 걸어왔다.
“흠, 크흠.”
“뭐지? 포션이 더 필요하면 저쪽에 있으니 가져가.”
“아니, 상처는 다 나았고…….”
이어진 말이 나로선 상당히 의외였다.
“거 미안하게 됐다.”
“응?”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자기 목덜미를 만지며 거한이 재차 일렀다.
“난 뭐, 솔직히 비실비실한 줄 알았거든. 보스한테 잘 보인 거 하나로 우리한테 이래저래 지시해대는 거 같아서 못마땅하기도 했고, 염의준은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아서 그놈 죽인 게 뭘 대단한 일인가 하고 얕보고 있었는데…… 내가 실수했다. 정식으로 사과하지.”
“……나도 과했으니 없던 일로 하는 게 좋겠어.”
답하면서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성격이 거친 데다 매사에 투덜대는 게 거슬려 이참에 버릇을 고쳐주려 한 건데. 이러면 나만 못된 놈 같잖아.
노인이 기꺼워하며 손뼉을 쳤다.
“이거지, 동료라는 건 응당 이래야 하는 법이야. 보고 있으니 흐뭇하구먼. 내가 젊었을 적에는-”
“아, 근데 있잖아요!”
노인이 시동을 걸려고 하자 소년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나도 들어주기 곤욕이었고 거한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소년에게 주목했다.
“아저씨는 소원 뭐로 하실 거예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하거든.”
거한이 애매하단 투로 답했다.
팬텀 멤버들이 서연희에게 청하는 ‘소원’.
한마디로 정의하면 초고도의 계약 술식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대상자는 자신이 가장 욕망하는 것을 털어놓는다.
보다 구체적이고 강한 욕망일수록 효과가 크지만 반드시 세세하게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다.
부, 명예, 권력. 이런 식으로 추상적이어도 된다.
그리고 다음 과정.
서연희가 소원을 말한 자의 정신을 살핀다.
이 또한 속속들이 들여다보진 않고 소원을 정직하게 일렀는지 진위를 가리는 정도에서 그친다.
서연희 말로는 마음의 흐름만 알아보는 거라던데…… 그 이상 가면 피곤하기도 하고, 너무 무례하다나 뭐라나.
여하간 술식이 성립되면 더는 주의할 것도 없다.
자신의 소원이 팬텀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단 전제하에, 그들은 소원과 관계된 일에서 서연희의 힘을 일정 부분 끌어다 쓸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득이지.
소원을 정하지 않은 단원보다 소원을 정한 단원의 생존율이 유의미하게 높으니까.
“그거야 나도 아는데…… 정말로 없단 말이지. 강한 놈과 싸우는 거면 난 그걸로 족해.”
“그럼 그거로 해요. 저도 생각 안 나서 이거로도 되나 하면서 빌었는데, 아니었으면 지금쯤 팔 하나 없어졌을지도 몰라요.”
소년이 영업사원처럼 구슬린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거한이 내게 물었다.
“이봐, 너도 소원을 빌었나? 그 검은 날개 말이야.”
“이건 소원과는 관계없어. 내가 소원을 빌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고.”
“흥, 되게 비싸게 구는군. 하기야 보스와 연인 사이니 소원 따윈 필요도 없으려나.”
거한이 알 만하다는 듯이 내뱉은 말에 노인과 아이도 나를 바라본다. 대충 눈길을 보아하니 그런 사이 아니라고 답해도 믿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건가?”
“난 내가 보고 느낀 대로 판단한다.”
“으흠, 나는 연륜이라는 게 있지.”
“형, 저는 연륜은 없어도 감이 제법 좋거든요.”
“……멋대로 생각해.”
차갑게 대꾸한 나는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고,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게 들려왔다.
“저게 대답이라는 건가?”
“보스 혼자 계시는 방에 들어간다……. 과연 보통 일은 아니구먼.”
“근거가 좀 부족해서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하네요.”
왜 용무가 있어서 가는 거라곤 생각 안 하는 건데…….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쉰 나는 서연희의 방 앞에 다다랐고, 맑은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운 건 그때였다.
“잠깐만요.”
“응?”
귀여운 토끼 가면을 쓴 여자.
나로서도 정확한 신원을 알진 못하는 멤버 둘 중 하나.
은색에 가까운 머리칼과 붉은 보석을 연상시키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 방에는…… 무슨 일로 들어가려는 거죠?”
“보스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아…….”
머뭇머뭇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방문을 두드렸다.
“보스, 접니다.”
<응, 들어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쉬고 있어.”
여자에게 짧게 이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챙이 넓은 모자를 벗고 있던 서연희가 즐거워하는 기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왜? 피곤하면 한숨 자도 되는데.”
“……내 방 아니잖아요.”
“왜 네 방이 아니야? 침대 두 개 있잖니.”
서연희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방 한쪽을 가리켰다.
과연 침대가 두 개 있긴 하네. 사이즈는 심하게 차이가 나지만.
하나는 둘이 누워서 잘 수 있을 만큼 널찍하고 다른 하나는 겨우 사람 몸 하나 누이기도 벅차 보였다.
“방은 여섯 개고, 곧 일곱 명이 될 거잖니? 그래서 이 방만 침대를 두 개 들였지.”
애초에 왜 방을 여섯 개로 만들었는진 물어봐야 득 될 게 없다. 그보단 세세한 부분을 지적해야지.
“제 건 너무 작잖아요. 본인이랑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이대론 서러워서 못 잡니다. 호텔로 돌아갈 거예요.”
“그럼 넓은 데서 자면 되겠네. 이건 둘이 누워도 넉넉하잖아?”
“……내가 잘못했어요.”
“응? 뭘 잘못했는데?”
“어설프게 말대답하려고 했던 거 반성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좀 놀리라는 의미였다.
내 말에 생글생글 웃은 서연희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닫힌 창문을 열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되뇐다.
“오늘은 많이 어둡네.”
음력 초하루.
달빛이 희미한 걸 넘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날.
그중에서도 오늘은 특히나 밤이 새까맸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편하게 지켜봐요.”
“그러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네가 신경 좀 써줘.”
“그럴게요.”
이후론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서연희는 침대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었고, 나는 조금 있으면 치러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 밤이 무사히, 단 한 명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만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자정이 다 되어갈 즈음.
“나가볼까?”
“네.”
방문을 연 나는 서연희를 호위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일반 단원 여섯 명은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서연희가 일렀다.
“누가 먼저 할래?”
“저부터 해도 되겠습니까?”
키가 훤칠한 사내가 나서더니 1층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서연희는 왼손을 펼쳤고, 그녀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뻗어 나와 넘실거렸다.
“마음속으로 ‘소원’을 떠올려보렴.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볼 테니.”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리지?”
“저는 십 초도 안 걸렸어요.”
거한과 소년의 대화.
이내 십 초가 지났다.
다시 십 초. 일 분.
시간이 계속 흘렀고, 붉은빛은 꺼지지 않았다.
어느새 서연희는 옅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그리고 잠시 뒤.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흥얼거린다.
“‘위험인물’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그 말이 들린 직후.
콰아앙!
나는 땅을 박차고 성 중앙으로 짓쳐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