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Chapter 4. 삭월야 (4)
내가 발을 뗀 그 순간 서연희는 이미 펼쳤던 손을 거두고 있었다.
그녀의 앞을 지키듯 선 나는 키가 훤칠한 사내와 마주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서연희에게 물었다.
“보스, 확실합니까?”
“아마도? 꽤 자세히 살펴봐도…… 저 애의 소원을 이루는 일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으니까.”
“그 정도면 위험인물로 간주하기엔 충분하군요.”
“그렇지?”
웃음기를 머금은 어조로 답한 서연희가 이내 단출하게 일렀다.
“처리해.”
“금방 끝내겠습니다.”
굳건히 답한 나는 한 걸음씩 적을 향해 걸어갔다.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멈춰 있던 사내가 그제야 경악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인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나는 배신하려는 생각 따윈 한 적이 없어!”
“그래, 이해해. 지금은 없겠지, 지금은.”
“명성과 성공을 바란 것이 그렇게나 큰 죄인가? 보스, 억울합니다. 나는 절대로-”
“그건 때가 닥쳐봐야 아는 거야. 지금은 너 자신보다도 보스와 내가 더 잘 알고.”
“개소리 집어치워!”
“믿기 싫으면 말든가.”
놈이 아무리 부정한들 나와 서연희의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저자의 대외적인 신분을 알고 있다.
그것과 놈이 바라는 소원.
팬텀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단 전제하에서만 서연희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는 조건.
홀로그램이 언급한 ‘위험인물’이라는 표현까지.
그것들을 모두 고려해 보면 답이 간단히 나온다.
저자는…… 언젠가 배신할 거라고.
혹은 직접적인 배신이 아니더라도, 팬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팬텀에서 제명하고 즉결처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명확한 사유를 찾기도 힘들 테고, 나는 그런 걸 놈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다.
때때로, 말은 무의미해진다.
살아온 발자취와 마음에 품은 생각과 몇 가지 사실들만이 중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지금처럼.
“너는 나와 싸워야만 하고, 이건 결코 번복될 수 없다. 3초 줄 테니 무기를 들어. 내가 베푸는 마지막 호의다.”
다가올 미래의 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놈이 최소한 제대로 맞서 싸울 수는 있도록.
그 정도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놈을 죽여야 하는 데서 오는 자책감은 마음 한구석으로 밀쳐냈다.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면서는 도저히 못 해먹을 짓이니까. 홀로그램의 정보를 믿고, 범죄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일은.
“3, 2-”
“보스! 다시 한번-”
“얘들은 아니네, 망설일 필요 없겠어.”
나와 사내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른 두 사람과 계약한 서연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확고히 일렀다.
“……1. 보스께 처분 권한을 위임받은 자로서 선언한다. 현 시간부로, 팬텀의 정규 멤버는 일곱 명이다.”
“닥쳐!”
콰아앙-!
선공은 놈에게서 이루어졌다.
어느새 양손에 무기를 쥔 놈이 빠른 속도로 내게 접근해왔다.
오른손에는 푸른 마력이 일렁이는 검.
왼손엔 길이가 사람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창.
그것들을 번갈아 휘두르며 외친다.
“널 죽이면 일곱 명이 되겠군!”
“할 수 있으면 해봐.”
평소의 유들유들한 말투와 판이한, 증오가 실린 말을 대수롭잖게 받아넘긴 나는 조용히 힘을 끌어모았다.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방심한 거한을 두들겨 팰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고, 나도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겠지만…… 그래도 일격에 끝내는 게 낫겠지.
놈에게도, 나한테도.
터엉!
놈이 뻗어낸 단창을 왼손으로 튕겨 냈다.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내가 모은 마력의 7할 이상은 여전히 자유로운 오른손에 깃들어 있었다.
슈아아아-!
놈의 검이 내 머리통을 쪼갤 기세로 떨어져 내린다. 피하면 틈이 생긴다. 몸을 아주 살짝만 틀어서 검은 날개로 막아내고, 곧장 오른손으로 놈의 심장을…….
홀로그램 메시지가 뜬 건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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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
찰나라고 하기도 어려운, 지극히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조차 반응하지 못할 만큼 재빠른 속도로 토끼 가면의 여자가 접근해왔다.
그녀가 손을 떨친다. 거기서 흘러나온 극히 가느다랗고 유연한 마력의 칼날이 사내가 휘두르는 검의 궤도를 가로막았다.
서걱!
검을 쥐고 있던 놈의 오른팔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응당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잘려나갔다.
카앙, 서거걱!
푸른 마력이 일렁이던 검이 산산조각으로 나뉘었다. 놈의 왼팔과 양쪽 다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토끼 가면의 기습이 만들어낸 결과.
지지할 다리를 잃고 땅으로 떨어지던 놈의 몸뚱어리, 그중에서도 심장 부위가 내 오른손에 의해서 꿰뚫렸다.
“끄허억!”
고통스러워하는 단말마.
이윽고 놈이 끊어질 듯한 말을 자아낸다.
“나는, 그저…….”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서연희 쪽으로. 이자는 입단했을 때부터 은근히 그녀에게 호감을 드러냈었지.
그즈음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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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의 첫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3월 14일 이전까지 팬텀 내부의 위험인물을 파악해 처단할 것.
-클리어 보상: 주관식 질문 1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되거나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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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한번 숨을 내쉬어 마음을 다스린 나는 토끼 가면을 추궁했다.
“왜 끼어들었지?”
“……그냥, 굳이 다치면서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나직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변명처럼 답한 말.
도움받은 입장으로 더 얘기하는 것도 경우 없는 일이라 나는 짧게만 일렀다.
“이번엔 결과가 좋았으니 괜찮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
토끼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라 응시하기만 했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내가 파악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몸을 돌렸다.
“방금 뭐였지? 저 여자가 저렇게 강했었나?”
“제가 보기에는…… 백업을 받은 것 같은데요.”
“흐음, 내 생각에도 그런 듯하구먼.”
“그게 효과가 저 정도나 된다고?”
“아주 강하게 바라는 소원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남자 단원 셋의 대화.
여우 가면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고, 나는 서연희를 바라봤다.
‘소원’의 힘을 빌린 것이 맞는지 물은 것이었지만 그녀는 싱긋 웃기만 했다.
하기야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
토끼 가면에 관한 정보는 서연희에게 별로 들은 게 없다. 개인 프라이버시니 알 생각하지 말라면서.
슈우우…….
바람이 새어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처리한 사내의 시체에서 생긴 변화. 몸집이 작아지고, 머리칼이 금발로 바뀌고 있다. 신원을 가리기 위한 변장이 풀린 것이다.
“저놈 누군지 좀 궁금했는데 이제 알아봐도 되겠지?”
성큼성큼 걸어 나온 거한이 사내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겼다. 그리곤 곧바로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다.
“음? 어디서 본 얼굴인데…….”
“아, 그 사람이잖아요. 왜, JR에 요즘 한창 유명한 헌터. TV에서 봤는데 이름 뭐였더라?”
“로버트 그린.”
나는 정답을 일러줬다.
미국 최대의 각성자 길드 JR에서도 촉망받는 헌터인 로버트 그린.
올해 스물여덟에 랭크는 A급. 십 년 내로 S급에 도달할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젊은 강자.
슬럼가에서 거리를 방황하며 성장한 그는 출중한 능력 하나만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가진 것보다도 훨씬 많은 걸 바랐다.
그걸 위해 팬텀의 스카우트 제의에 응했고,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로 죽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하기엔 지나치게 건조한 문장들. 하지만 그를 죽인 장본인인 나는 그 이상을 말할 수 없었다.
사뿐히 다가온 서연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했어.”
“별말씀을요.”
말은 때때로 드러난 것보다 깊은 의미를 품는다.
서연희와 나눈 짤막한 대화도 그러했다. 그녀는 내게 사과했고,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 정도로도 우리에겐 족했다.
“일단 처리부터 해둘까?”
서연희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에 따라 발생한 불꽃이 로버트 그린의 시체를 태워간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한 정리. 불과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놈의 육신이 재로 화했다.
한데도,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응?”
서연희가 의아해하며 흘린 말.
로버트 그린이었던 잿더미가 흩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형체를 이뤘다. 거기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놈의 몸 안에 아직 남아있던 마력.
그리고, 홀로그램이 내게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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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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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내가 외친 직후.
압도적인 위력의 마탄이 자그마한 성 전체를 초토화했다.
***
‘이거 곤란하게 됐네…….’
서연희는 마음속으로만 그런 말을 되뇌었다.
해가 지고, 달빛마저 없이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
저 멀리 상공에 수십 명의 헌터들이 자리해 있다.
어디서 온 자들인지는 알아볼 필요도 없겠지.
‘JR이네.’
로버트 그린이 소속되어 있던 길드. 놈의 죽음을 감지하고 공간 마법을 구사해 건너온 것이리라. 아마도 미리 합의된 사항이었을 터였다. 그런 마법을 서연희는 당장 몇 가지나 떠올릴 수 있다.
‘우리라는 건 모르고 왔겠지만…….’
저들로선 뜻밖의 횡재라고 해야겠지. 그리 여길 만한 자격이 있음을 서연희는 인정하고 있다.
헌터 무리의 선두에 선 두 명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조셉 레너드. 릭 가델.
그녀 자신과 마찬가지로 36 영웅의 일원들.
JR은 그들의 이름 첫 글자를 하나씩 따서 창안한 길드였으며, 염의준과 달리 지금까지도 현역인 그들은 전성기 때의 실력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이도진이 앞으로 나서며 그녀에게 일렀다.
“제가 할 테니까 다들 돌아갈 수만 있게 해줘요.”
자신이 막고 있을 테니 단원들을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마법만 준비해달라는 말.
그러나 서연희는 장난스레 거절했다.
“싫은데?”
“……네?”
“부른 사람이 나잖아. 이 정도는 내가 해줘야지.”
그의 배려를 물리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첫 번째로, 돌려보낸다 해도 이대로는 추적당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지 못하도록 완벽히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두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
이도진이 다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서연희는 실로 오랜만에 단장으로서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 그게 하필이면 달이 뜨지 않는 밤이라는 건 조금 문제였지만…….
‘이런 것도 로망이 있잖아?’
소중한 아이를 위해 부담을 감수하는 일.
그런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애틋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 좀 챙겨줘.”
여상스러운 어조로 이도진에게 부탁한 그녀는 발을 가볍게 굴렀다. 허공으로 날아올라 조셉 레너드와 릭 가델을 쳐다봤다.
전투 준비를 마친 그들이 급강하하며 서연희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황급히 정지해 뒤를 돌아봤다.
새까만 하늘에.
달을 대신해서.
붉은 눈동자가 떠올라 있었다.
***
내가 집필한 소설 <세계의 수호자>.
나 자신은 내가 창조한 게 아니라,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옮겨적은 것이라고 여기는 그 소설의 설정집에는 장생종(長生種)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이 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늘 저편에 자리한 위성, 달에서 왔다.
수명은 족히 수백 년 이상.
모두가 강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별과 달은 환경적으로 지대한 차이가 있었다.
달에서 전해져오는 기운도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이전처럼 강하지 않았다.
본디 완전한 존재였던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지닌 완전성이 흐려짐을 느꼈고, 개중에 참을성이 없는 일부는 한 가지 해결책을 찾아냈다.
이 지구상에서 자신들과 가장 닮은 종족.
인간의 피를 섭취해 손실을 보충하는 것이다.
처음엔 들키지 않았으나 결국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수군거렸다.
인간을 사냥하는 괴물들이 있다고.
그리고, 그들을 ‘흡혈귀’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이 세상엔 장생종이 남아있지 않다.
아름답고 강했던 그들 모두 죽어 사멸했고, 흡혈귀는 다만 전설로 전해질뿐이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서.
장생종의 기나긴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한, 단 한 번도 피를 입에 대본 적 없는 존재.
장생종의 다음 대 여왕으로 예정되어 있던 자.
뱀파이어 퀸 서연희가, 달을 대신해 치솟은 핏빛 눈동자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