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Chapter 4. 삭월야 (5)
JR의 길드원들은 물론이거니와 S급 헌터인 조셉 레너드와 릭 가델조차도 경악을 금치 못하는 광경.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얼빠진 작태였으나 이해는 된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마지막 남은 장생종 서연희.
기실 낮이라 해도 그녀는 강하다.
오랜 세월 쌓아온 전투 데이터와 마법 실력.
거기다 주위에 물이 있거나 대기에 습도가 충분하다면 수(水) 속성 마법사인 그녀가 발휘하는 위력은 더더욱 배가된다.
가령 이렇게 옅게나마 비가 내리고 있을 땐 능히 최상위권의 강자라 칭해야 할 터.
그리고…….
그런 수식어 따위는 그녀의 진정한 위상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장생종으로서 지닌 고유한 본령을 개방할 때.
서연희는 그때야 비로소 세계관 최강자에 근접한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이 순간 그리하고 있는 것처럼.
붉은 눈동자가 끝없이 팽창해 간다.
단순히 땅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실제로도 기운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이윽고 JR의 헌터 무리와 맞닿기 직전.
“---!”
“--- ---!”
조셉 레너드와 릭 가델이 무어라 크게 외치며 신호를 주고받았다.
콰앙!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른 조셉이 손에 실어낸 마력으로 붉은 눈동자를 흩어내려 한다.
나머지 한 사람, 릭은 여유롭게 떠 있는 서연희를 향해 접근했다.
각자 양쪽을 맡아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시도.
급박한 와중에도 훌륭한 판단이었다고 평가해야겠지만…… 그들의 능력은 그걸 실행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
세찬 기합성을 낸 조셉이 손을 휘둘렀다.
한데도 붉은 눈동자가 내뿜는 기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되려 그 자신이 거기에 갇혀 속박되고 말았다.
릭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투웅.
서연희가 가볍게 떨쳐낸 손짓.
속절없이 튕겨 나간 그를 JR의 길드원들이 서둘러 부축한다.
휘오오오-
마침내 붉은 기운이 JR의 무리 전원을 완전하게 포위했다. 탈출하려 애쓰는 듯하나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이제 저들의 생존 여부는 서연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에만 달려 있다.
아마 어렵잖게 죽일 수 있겠지.
저항이 거칠 테고,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 지경에 이른 이상 놈들은 빠져나갈 수 없다.
“후우…….”
심호흡에 이어 나는 향후의 계획을 되짚어봤다.
헌터 일에서 손을 떼다시피 한 염의준. 그를 죽인 일만 해도 세간의 충격이 작지는 않았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JR의 수장이자 현재도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저 둘까지 죽인다면…….
염의준 때와도 비교하기 힘든 거대한 파장이 수반되겠지.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정세가 급변하고, 팬텀이 운신하는 데도 적잖은 차질이 생기리라.
그러니 이대로 쫓아버리는 게 최선일 테지만…… 지금의 서연희에게 그런 해결책을 기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그녀가 내 쪽을 바라봤다.
챙이 넓은 모자에 가려 얼굴 위쪽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려내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이내 나직한 말이 사위를 울렸다.
[……돌아가.]
슈아아아아…….
온 천지를 덮어가던 붉은 기운이 JR의 헌터들을 중심으로 모여 구의 형태를 이루었다.
곧이어 옆의 공간이 찢겨나갔고, 붉은색의 구가 그 틈으로 흘러 들어가더니 자취를 감췄다. 내부에 갇혀 있던 놈들까지 데리고서.
극도에 이른 공간 지배력을 통한 역소환. 신기에 가까운 장면을 만들어낸 서연희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고, 나는 단원들에게 일렀다.
“모두 정지.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보스께 접근하지 마라.”
장생종으로서 서연희가 지닌 힘은 실로 아득한 수준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현재 생존해 있는 모든 존재를 통틀어서도 열 손가락 안엔 무조건 들어간다.
다만, 그걸 온전히 다룰 수 있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늘이 보름이었다면 훨씬 상황이 나았을 텐데.
달에서 전해져 오는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는 날이라면 그녀가 힘을 발휘하는 데도 큰 무리가 없다.
소모하는 힘엔 못 미치나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백업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 날이다.
백업은 기대할 수 없고, 따라서 서연희는 소모한 힘을 당장 보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평소보다 좀 난폭해지고, 참을성도 없어진다.
혹시 모르는 일이라 검은 날개를 반쯤 어깨에 머금으며 나는 그녀에게 걸어갔다.
“보스, 접니다.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떨구고 있던 서연희가 한 걸음을 크게 내디딘 건 그때였다.
“왁!”
+
-자동발동형 특성 ‘순간예지’가 발동됩니다. (랭크 A+)
+
어린아이를 놀래주듯이 내지른 외침.
그러더니 가만히 서 있는 내게 핀잔처럼 투덜거린다.
“왜 안 놀라니?”
“애도 아닌데 그걸로 놀라겠습니까.”
“으음…… 그런가?”
장난스러운 언행이었으나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결코 장난 같은 게 아니었어. 치밀어오르는 충동을, 단 한 번의 외침으로 어렵사리 발산한 것이다.
순간예지는 방금 내게…… ‘죽음’을 경고해왔다.
쿠웅.
문득 가슴이 일렁였다.
심장이 뛰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그 곁에 자리한 정체 모를 무언가. <킬 더 이블>의 최종보스 보정으로 얻은 상시발동형 특성 ‘검은 심장’.
습득한 이래 처음으로 그것이 변화를 보였다.
두근, 두근.
즐거워하며 뛰노는 듯한 박동. 마치 나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겨우, 저 정도에 위협을 느끼냐고.
서연희가 손가락을 튕겼다.
화아악……!
폐허가 된 성이 불길에 휩싸인다. 연기도 내뿜지 않고 그저 타오르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남긴 흔적을 모조리 지워내면서.
“길을 만들어줄 테니 다들 돌아가 봐도 돼. 수고했어.”
내 곁에 선 서연희가 이르자 저마다 흩어진 단원들이 작별인사를 한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보스.”
“형님 누나들, 오늘 재밌었어요!”
“이봐, 다음에 다시 한번 붙어보자고.”
노인과 소년과 거한이 남긴 말.
여자 두 명도 하늘의 갈라진 공간으로 향했다.
“…….”
“……조심히 지내요.”
여우 가면은 별다른 말 없이 사라졌고, 토끼 가면은 내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남은 두 사람, 서연희와 나.
나는 그제야 그녀에게 물었다.
“토끼 쟤는 어디로 간 거예요?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요.”
“글쎄? 미국 갔겠지?”
“…….”
멀쩡히 살아있는 애를 왜 죽이는 건데.
의뭉스럽게 답한 서연희가 손을 내리그었다.
두 사람이 함께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고, 그녀가 앞장서 발을 내디뎠다.
“나부터 씻을 거니까 넌 좀 있다가 와.”
“네?”
내가 반문한 건 사뿐히 무시한 서연희가 공간을 넘어갔다. 여기 더 있을 순 없어 나도 따라나섰고, 일 분쯤 지나 눈을 떠 보니 본래 머물던 호텔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욕실에선 벌써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금방 와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오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니. 아무래도 나만 일부러 공간 이동 속도를 늦춘 모양이다.
……일단 기다려야겠지.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그제야 휴대전화를 켰다. 3월 14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이어서 확인한 뭔가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아: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22:13)
-세아: 내일
-세아: 몇 시쯤 올 거야? (22:14)
이세아 얘가 나한테 먼저 연락을 다 하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고 이러나?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으나 괜히 자는데 깨울 것 같아서 참았다.
대신 답장만 최대한 부드럽게 보냈다.
-이도진: 날 밝자마자 갈게
-이도진: 오빠 술 별로 안 마셨어 ㅎㅎ
-이도진: 아침에 먹게 햄버거 사 갈까? (00:07)
얼마간 기다려도 1이 사라지지 않는 거로 봐서는 역시나 자는 모양이었다.
휴대전화를 탁자 가장자리로 밀어두고 나는 내심 고민했다.
다 죽여서 난리가 나는 것보단 나은 결과였지만 이번 일로 팬텀에 대한 경계가 대폭 강화되겠지.
이래저래 하려던 일이 있었는데 잠시 보류해둬야 하려나?
아무래도 서연희와 상의해봐야 할 듯싶었고,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킬 더 이블>의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주관식 질문. 이걸로 가닥을 잡아놓고 그걸 토대로 의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는 홀로그램을 띄워서 물었다.
‘내가 시급히 해야 하는 일이 뭐지?’라고.
한데 이상하게도 대답이 곧장 나타나지 않았다.
몇 초간 지연되더니, 그것도 모자라 생뚱맞은 문장들이 이어졌다.
+
주관식 질문 (1/1)
-질문 내용: 이도진이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답변: 3월 14일 오전 1시 이전에 귀가
1) 준비물: 5,000원에서 10,000원 상당의 과자 (초과 시 불이익은 없으나 추가 효용이 극소량, 초콜릿류일 경우 가산점 획득)
2) 주의사항: 거취를 알리지 않을 것
+
“……뭐야?”
주관식 질문이 답을 제멋대로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내가 이런 거 물어봤겠어? 이게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이나 하고…….
……아니지, 한 번쯤 관점을 달리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이해는 안 돼도 홀로그램이 아예 거짓말을 하진 않잖아. 그간 겪어온 바론 지나고 보면 다 옳은 소리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내가 한 시 전에 집에 돌아가는 게 현시점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뜻인데…….
그즈음 서연희가 욕실에서 나왔다.
“흐으, 상쾌하네.”
흰색 가운만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어내며 내게로 걸어온다. 그러다 피식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다.
“어머, 도진이 너 표정이 왜 그러니? 긴장했어? 우리 사이에 왜? 뭐 때문에?”
“…….”
“그러고 있지 말고, 너도 씻고 와. 그 옷은 피 많이 묻었으니까 욕실에 두고. 나중에 내가 처리하면-”
“누나.”
무거운 어조로 서연희를 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왠지 모르게 흠칫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던 그녀가 조금 굳은 미소를 짓는다.
“어, 갑자기 ‘누나’? 그으…… 일단 씻고-”
“진짜, 정말, 엄청 죄송한데…… 저 핏자국이랑 그런 것부터 없애주세요.”
“……왜?”
“저 옷 갈아입고 바로 집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부탁 좀 드릴게요.”
서연희의 눈가가 새초롬해졌다.
***
3월 14일, 오전 0시 30분.
넓은 호텔 방에 홀로 남은 서연희는 와인 병을 기울였다.
오늘따라 술맛이 다채롭게 느껴진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해서.
‘……이게 무슨 경우지?’
이도진은 아까 떠났다. 서연희 자신의 마법으로 몸을 씻어내고, 원래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고, 누가 잡아갈세라 황급히 방에서 나섰다.
서연희가 받은 거라곤 자그마한 상자 하나와 짧게 나눈 대화뿐.
<이거, 선물이요.>
<……그래.>
<몸은 괜찮죠?>
<역소환 한 번 한 건데 뭘, 신경 쓰지 마.>
과거에 그가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럴 일이 없어야겠지만 만약 그녀의 몸에 무리가 많이 가서 위험한 순간이 닥쳐오게 되면…….
‘자기 피를 주겠다고 했지.’
당연히 서연희는 웃으며 거절했다. 피를 마셔서 힘을 충당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녀는 예전부터 그런 행위를 경멸해왔다.
피를 마신 동족도, 마시지 않은 동족도, 이미 다 죽었다.
자신은 피를 마시든, 마시지 않든,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절대로 피를 입에 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도진의 마음만은 사무치게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분명히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텐데…….
‘근데…… 여동생한테 오랜만에 선톡 왔다고 휑하니 내팽개치고 가버린다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였지만, 한편으론 그런 것도 기특하고 멋지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자신도 썩 정상은 아니겠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이도진에게 받은 상자를 열어봤다.
내용물은 단출했다.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초콜릿.
그리고 쪽지 한 장.
-항상 고마워요, 누나.
그렇게 적혀 있었다.
저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서연희는 초콜릿을 아주 약간만 깨물어봤다. 아까워서 한 번에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맛은 그냥 그러네.’
그러나 억만금을 준다 해도 이것 한 조각과 바꾸진 않을 거다.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
인간은 얕은 수면과 깊은 수면을 반복한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엔 얕게 잠이 들었다가 깊은 잠으로 전환되고, 그걸 반복하는 것이다.
이세아 또한 그러했다.
자정을 넘긴 무렵, 선잠이 들었던 그녀는 몽롱하게 눈을 떴다.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보니 오빠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동거인: 날 밝자마자 갈게
-동거인: 오빠 술 별로 안 마셨어 ㅎㅎ
-동거인: 아침에 먹게 햄버거 사 갈까? (00:07)
‘안 오는구나…….’
미리보기로만 확인하고,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오지 않는다니까. 아침에 온다니까.
오늘은 그나마 잠기운이 몰려오니 차라리 다시 잠들어서 푹 쉬고, 일찍 일어나는 게 옳은 선택일 터였다.
얼마간 의식해서 눈을 꼭 감고 있던 그녀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대략 십 분 정도. 얕은 수면이 거의 끝나가고 깊은 수면으로 전환되기 직전.
일 분만 더 늦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띡, 띠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
비닐로 된 봉투가 부스럭대는 소리.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
실낱처럼 흘러들어오던 그 소리들을 잡아낸 이세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설마 하면서, 전신을 휘감는 기쁨을 갈무리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소리 때문에 깼어?”
양손 가득 편의점 봉투를 든 이도진이 미안해하며 건넨 말.
이세아는 대답 대신 물었다.
“……그게 다 뭐야?”
과자 파티라도 벌일 작정이었는지 봉투 안에 과자와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가 멋쩍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 너 먹으라고. 오늘 화이트데이라서 초콜릿도 좀 샀고, 너 바나나 과자 이거 좋아하잖아. 이거는 젤리고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랑-”
“그걸 누가 다 먹어.”
이세아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다른 감정을 조금이라도 내비쳤다간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아서.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저렇게 많이 안 사도 괜찮은데.’
과자를 사 온다고 치면…… 그래, 많이도 필요 없다. 서너 가지 정도. 가격으로는 오천 원이나 만 원쯤.
그 정도면 더 바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