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Chapter 6. 균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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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금요일.
학원물로 시작해 가족 드라마로 끝난 ‘강의실 난장판 사건’도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그간 몇 가지 달라진 일이 있고, 새로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우선 첫 번째로 내게는 무척이나 기쁜 변화.
위이이이잉-
세아 방 안쪽에서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있다. 일순간 소리가 잦아든 틈을 타 나는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물었다.
“다 됐어?”
위이이이이이잉-
아무런 대답 없이 헤어드라이어가 재가동됐다. 아직 덜 끝났다는 뜻이겠지.
“얘는 무슨 머리를 하루종일 말리나…….”
물론 그 정도는 아니고 길어도 이십 분이지만, 슥슥 말리면서 모양 잡고 간단히 세팅하는 게 전부인 나로선 흡사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전혀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한마디라도 더 말을 걸고 싶어 방문에다 대고 외쳤다.
“오 분 안에 안 나오면 오빠 간다?”
그제야 달칵, 문이 열렸다.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마지막으로 빗질해서 긴 머리를 정리한 세아가 알렸다.
“다 됐어.”
“그래? 늦겠다, 빨리 가자.”
“……이 시간이면 데굴데굴 굴러서 가도 지각 안 해.”
퉁명스레 중얼거린 반박. 하지만 정작 내용이 웃겨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세아랑 학교 간다는 것 자체가 기쁘기도 하고.
세아가 몇 년 만에 나를 오빠라고 부른 다음 날부터, 우리는 등하교할 때 내 차로 함께 이동하고 있다.
굳이 학교 안 가도 되는 날까지 태워주는 게 아닌지 애가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였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요즘은 나도 매일 출근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정지 신호에 차가 멈춰 서자 문득 세아가 물었다.
“논문은 잘 돼가?”
“응,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끝날 것 같던데.”
근래 내게 생긴 두 번째 변화.
나는 요즘 서상욱 교수와 마법역학 논문을 하나 쓰고 있다.
제목은 <범용적 방어 구성체에 관한 연구>.
나도 주저자로 이름이 올라가지만 실제 논문 쓰는 일은 우리 상욱 씨가 도맡아 하고 있다.
나야 아는 걸 토대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엿보는 눈 특성으로 기준만 잡아주는 식인데…… 그것만 해줘도 충분하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했지.
“그 교수님이 수업은 불성실해도 사람 심성이 영 못되고 그런 건 아니야. 너도 오가다가 뵈면 인사 꼬박꼬박하고.”
“……그러면 나한테는 그냥 불성실한 사람이네.”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투로 세아가 툭 내뱉었다.
학교까진 그리 먼 거리도 아니어서 금방 교문이 시야 저 끝에 나타났고, 나는 인적이 드문 곳에 세아를 내려줬다.
마음 같아선 최대한 걸을 일 없게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학교 내부로 들어가면 다른 애들이 다 쳐다봐서 창피하다나 뭐라나.
“수업 열심히 들어. 교내봉사 끝나면 연락하고.”
“오늘 그거 마지막 날이라 늦을 수도 있어. 기다리지 말고…….”
하려던 말을 멈춘 세아가 잠시 머뭇거렸고,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는 걸 감추며 물었다.
“오빠 먼저 가라고?”
“……아냐. 나중에 연락할게.”
새침하게 몸을 돌린 세아가 교문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히 나랑 같은 밥 먹고 같은 집에서 자는데 왜 쟤만 저렇게 귀여운 거지?
누가 들으면 주책이라 할 의문을 곱씹으며 교정에 들어선 나는 서상욱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고, 일찍부터 와 있던 그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도진 군 왔나?”
“네, 교수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닌 게 아니라 눈 밑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왔는지 되게 초췌한 몰골이다.
다만 눈빛만큼은 초롱초롱 빛이 났는데,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황을 알 수 있었다.
“간밤에 잠들려는데 번뜩 떠오르는 게 있더라고. 자네 의견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어서 혼났지 뭔가. 나 혼자 나름대로 고민해보느라 밤을 좀 새웠다네.”
“연락을 주시지 않고요.”
“에이, 자네도 피곤할 텐데 그건 예의가 아니지. 내가 그 정도 상식은 있어.”
요즘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서상욱 교수는 단순히 수업 설렁설렁하는 나이롱 교수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천재적인 학자였고, 나쁘게 말하면 반쯤 미친 사람 같았다.
수업도 이 사람 딴엔 아예 대충 하는 건 아니다.
자기는 배울 때 책만 보고 다 이해했으니까 나한테 배우는 너희들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못 한다면 마법역학을 이해할 머리가 안 되는 거니 그 이상은 나는 모르겠다.
그게 옳은 생각이냐는 문제는 논외로 두고, 지난 한 달간 지내보니 이 양반은 그런 의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진유리 같은 애들이 수업 내용을 물어보면 꽤 세심하게 설명해주니까.
“그래서 뭔가 하면, 이쪽의 상부 연결 식 말일세. 이 식의 범위를 확장하거나 변화를 주면 방어 구성체의 계통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하다. 그게 정세빈 선생님의 견해가 아니었나 싶은데…… 바로 본 건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들은 말이라곤 배리어 제대로 익혀두면 어디 가서 마법에 두들겨 맞을 일은 없을 거라는 수준의 이야기가 전부였는데.
해서 서상욱 교수가 어떤 화두를 제시한 건지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내게는 비장의 카드가 하나 존재했다.
“말씀하신 대로 마력을 주입해보시겠어요?”
“그래, 자네가 한번 봐주게나. 방법론적으론 가닥이 잡혔는데 그 부분이 문제라서.”
서상욱 교수가 손을 움직였다.
배리어의 회로 전체와 연결된 자그마한 사면체에 머물던 마력이 그 아래 회로들로 이동하려 하다가…….
피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구성체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
-수동발동형 특성 ‘엿보는 눈’을 발동 중입니다. (랭크 A)
+
“4번과 7번은 그대로 놔두고-”
“오, 알아낸 게 있는가?”
“세부적으로 조정해봐야 아는 거지만 어느 정도는요.”
마력 배분과 범위만 조절하면 결과가 나올 것도 같은데……. 그리고 둘 다 점심도 대충 때우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친 뒤.
“오, 오오…….”
“와…….”
서상욱 교수와 나는 동시에 감탄을 흘려냈다.
배리어 마법의 구성체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후우…… 일단 공격해보게.”
흥분을 가누지 못해 얼굴이 시뻘게진 서상욱 교수가 일렀고, 나는 아주 미약하게 마력을 발출했다.
피융, 슈우우…….
마력과 닿은 배리어가 원래 기능대로 내 마력을 흡수했다. 한데 다음 순간.
“어디 보자……. 이렇게 하면?”
티잉!
배리어 표면에서 한 줄기 마력이 쏘아졌다. 방금 내가 쏘아낸 그 마력이었다.
흡수와 반탄의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효과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복합 계통 구성체.
가히 혁신적이라 해야 할 마법이 탄생한 것이다.
나도 놀랐지만 서상욱 교수는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콧김을 내뿜고 있다.
“도진 군, 자네…….”
“아, 오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 차례 겪은 바 있던 나는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든 서상욱 교수가 나를 잡아끌며 환호했다.
“이게 다 자네 덕분이야! 정말 고맙네, 도진 군.”
그렇게 고마우면 멱살 잡은 것 좀 놔주시지…….
겨우 진정한 서상욱 교수가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겼다.
“실험은 이걸로 일단락됐으니 논문도 금방 완성할 수 있겠구먼. 아, 논문 쓰는 건 자네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되네.”
“그러면 저는 수치 검수 쪽에 집중하겠습니다.”
“자네가 맡아주면 나야 고맙지.”
기지개를 크게 켠 그가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표정으로 일렀다.
“어디까지 통용될지는 모르겠지만…… C급 이하 방어구에만 적용된다고 쳐도 자네랑 나는 떼부자가 되는 거야. 내가 돈이 부족한 형편은 아니고 자네도 그렇겠지만.”
“제가 짐작하기엔 다듬기에 따라 A급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현재 엿보는 눈 특성이 A급이니까. 달성 시기의 문제일 뿐 그 단계까지는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서상욱 교수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되면 그때부턴 얼마를 벌고 따위는 문제도 아니게 되겠지. 아무튼, 정리가 빨리 끝나면 다음 달 정기 학회 때 발표할 생각이네. 마침 목요일인데 자네도 나랑 가서 눈도장 좀 찍어야 하니…… 그날은 강의를 쉬어야겠구먼.”
“추이를 보고 휴강이 될 것 같으면 학생들한테도 공지를 해줘야겠네요.”
이 사람만 학회 보내고 나 혼자 수업을 진행해도 크게 무리는 없지만, 둘 다 가게 되면 자동으로 휴강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학회에 길드 사람들도 많이 올걸세. 영원 길드 한태강 대표는 매번 본인이 꼭 참석하고, 다른 길드에서도 중진들을 보내거든. 괜찮은 연구가 나왔다 싶으면 자기들이 선점하려고 난리도 아니야. 이 얘기를 왜 꺼냈는가 하면…… 내가 지나가다 들은 게 있는데, 자네 괜찮겠나?”
“네, 상관없습니다.”
소문이 많이 퍼지진 않았어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영원 길드의 한태강. 내 약혼녀인 세라의 아버지.
그 사람이 나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고, 약혼이 깨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런 식으로 사실과 별반 차이도 없는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당연히 나로선 만나는 게 껄끄럽지만…… 그날은 내가 잘못할 것도 없으니 이전보다야 떳떳할 수 있겠지.
한데 서상욱 교수가 돌연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의혹을 제기했다.
“거 참, 모를 일이구먼. 내가 본 도진 군은 이렇게 훌륭한 청년인데. 역시 사람들이 잘 모르고 떠드는 말은 믿을 게 못 돼. 그렇지 않나?”
“으음, 글쎄요…….”
나야 내 죄를 잘 아니 입을 다물었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네. 다녀와서 정리하고 오늘은 퇴근하지.”
뿌듯해하는 어조로 이른 서상욱 교수가 연구실을 나섰다. 그리고 홀로 남은 곳에서 나는 홀로그램을 살폈다.
+
<킬 더 이블> 1권, ‘아카데미의 천재 마검사’가 진행 중입니다.
-1권 태그: [아카데미] [로맨스 X] [캐릭터 중심]
-진행률: 58.3%
‘최종보스’ 이도진의 고유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1권 종료 시점, 테러조직 팬텀의 일원임이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의 제1 아카데미 내부 주목도를 상회할 것
-클리어 보상은 달성률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강의실 난투 당시에 크게 오른 진행률은 그 이후로도 서서히 증가해 지금은 60%에 가까워져 있다.
남은 건 40%쯤이고, 안심할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과 진행률은 정비례 관계가 아니니까.
앞으로 펼쳐질 단 하나의 사건으로 1권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요샌 나도 학교 내에서 제법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지만, 주목도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주인공과의 우열을 알아내기도 어렵고.
그래서, 만약 정기 학회가 끝나고도 진행률에 큰 변화가 없다면…… 그땐 내가 주도해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
‘자체 휴강’이라 명명한, 확연히 주목도를 올릴 수 있는 사건.
학회 참석하는 거나 이거나 휴강해야 하는 건 매한가지긴 하네.
어쨌거나 할 일이 좀 많았다.
최종보스 노릇도 일이라는 건지 월말에 이르자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오고 있으니까.
제한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슬슬 <마신의 탄생> 클리어 보상도 정해야 하고, 논문도 완성해야 하고, 학회도 가야 하고, 여차하면 학교에서 사건도 하나 일으켜야 하고, 세아랑도 더 잘 지내야 하고, 팬텀 단원들도 딴생각 못 하도록 관리해줘야 하고, 팬텀의 다음 계획도 슬슬 결행 날짜를 정해야 하고…….
“머리 더럽게 아프네.”
디잉, 딩.
벽에 걸린 시계가 여섯 번 울렸다. 오후 여섯 시.
세아는 교내봉사 때문에 한 시간 더 걸릴 거고, 서상욱 교수가 오면 연구실 정리하고 차에 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돌연 홀로그램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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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3월 28일 자정까지 제일고 2학년 유해빈을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굴복시킬 것
-클리어 보상: OX 질문 2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추가 보상이 존재하며, 유해빈과의 관계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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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빈? 얘가 뭔데 퀘스트에 이름이 비치는 거지? 몹시 당황스러운 가운데 놀랄 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쿠구궁…….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연구실 전체에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반이 휘청이고, 바깥에서는 귀가 아픈 소음이 들려왔다.
스아아아아아아-
평평한 뭔가를 날카로운 물체로 갈라내는 듯한, 섬찟한 소리.
그즈음 연구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도진 군, 바깥에!”
안색이 새파래져서 뛰쳐 들어온 서상욱 교수가 손가락을 뻗었다. 커튼을 쳐두었던 창문 쪽으로.
나는 어떤 예감을 품으며 창가로 향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 밖을 내다봤다.
제일고 부지에서 고개를 수직으로 올리면 보이는 곳.
해가 어스름하게 저물어 가는 하늘이, 찢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온다.
서상욱 교수가 두려워하며 그 현상의 명칭을 말했다.
“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