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Chapter 6. 균열 (2)
내가 적어낸 소설 <세계의 수호자>에서, 지면을 할애한 세상은 이곳 지구만이 아니었다. 하나가 더 있었다.
한마디로는 ‘판타지 세계관’이라 줄일 수 있는 곳.
그곳에서도 무수한 생명이 살아갔고,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침공해온 악마들에게 패배해 대부분 노예로 전락했다.
무력에 의해 억눌려 있으나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 자체가 종속돼 본래대로 돌아올 수 없는 몬스터 군단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악마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점령한 세상에서 가장 건너가기 쉬운 차원, 지구를 다음 목표로 삼은 것이다.
차원과 차원 사이의 연결 통로를 만드는 데 걸린 기간은 족히 천 년 이상.
그동안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마력’이라는 신비한 힘을 얻게 되었다.
각종 연구가 진행되었고,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으며, 극히 재능이 뛰어난 자들이 명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
주인공인 이시혁과 정세빈이 태어날 즈음.
마침내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통로가 처음으로 열렸다. ‘균열’이라 불리는 미증유의 위협, 그 시작이었다.
<세계의 수호자>의 작중 시점, 균열은 악마의 침공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규모도 천차만별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목적에 의한 현상이라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달라졌지만.
이십오 년 전, 이시혁과 정세빈을 필두로 한 영웅들과 다른 수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모든 악마의 수장이었던 존재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놈이 소멸함에 따라 악마들은 균열을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단을 잃게 됐고.
차원의 연결은 갈수록 희미해져 결국에는 단절될 테고, 지구에 찾아온 마력도 언젠간 사라질 터였다.
악마들이 점령한 세상에서도 희망의 불씨가 피어나고 있었다. 극소수나마 영혼이 종속되지 않은 자들이 준동한 것이다.
<세계의 수호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완결됐다.
어쩌면 앞으로도 고난과 역경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런데도 희망적인 미래를 맞이할 거라고 믿을 수 있던 그때.
그리고…… 지금은 무작정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급격히 빈도가 줄어가던 균열 현상은 십 년 전의 대균열, 이시혁과 정세빈의 희생으로 막아낸 그 사건을 기점으로 다시 잦아지고 있으니까.
이제 균열은 악마들이 그들의 의지로 만들어내는 현상이라고만 하기 어려웠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재난에 가까워졌다.
지난 십 년 동안 쏟은 노력의 결과로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어째서 균열 현상이 재차 활발해졌는지.
균열 현상이 사라지면, 마력을 잃고 더는 초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릴까 봐서.
마력이 자취를 감추면, 자기들이 일궈낸 사업과 부귀영화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질까 봐서.
그걸 두려워한 자들이 뭘 좀 조절해보려다 크게 사고를 쳤다.
가령…… 내가 일전에 죽인 염의준 같은 놈들이.
그래서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지금도 모른 척 떵떵거리고 사는 그들을 단죄하는 일이 되었고, 당연하게도 나는 균열 현상을 뼛속까지 증오한다. 지금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갈라지고 있는 저 광경도 물론.
“도진 군, 그러고 있을 시간 없네. 빨리 나가야 해!”
서상욱 교수가 내 어깨를 흔들며 다그쳤다.
하늘이 갈라진 규모로 볼 때 저 균열은 B급 이상.
균열에 휘말린 일반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죽을 힘을 다해 멀리 도망치는 거다. 하늘이 다 열려 범위가 확정되고 나면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그 이후론 밖에서 안으로 진입할 순 있다. 하지만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서는 건 불가능하다. 출현한 몬스터를 모두 해치우고, 균열이 걷히기 전까지는.
“교수님은 피신해주세요.”
“응? 그럼 자네는?”
“저는 따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뛰어난 마학자라곤 하나 서상욱 교수는 제2 아카데미 출신에 전투와 담쌓은 사람이라 전력으로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비록 낙오자 신세였지만 마검술 전공의 각성자로 제1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설령 내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무능력하다 해도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지금 학교 안에는…… 세아가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서상욱 교수에게 일렀다.
“저는 괜찮으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학교 밖으로 나가서 뛰세요. 아마도 일 분 안에 못 나가게 될 겁니다.”
“허…… 자네 정말-”
“죄송하지만 이것 좀 빌리겠습니다.”
나는 연구실 한쪽에 실험용으로 놓여 있는 검을 쥐고 문밖으로 향했다. 건물 내의 복도는 아수라장처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저거 뭐야? 갑자기?”
“우리도 도망쳐야 하나?”
“미친, 뭔 소리야. 길드에서 알아서 오겠지. 빨리 따라와!”
학생들이 줄지어 계단을 내려갔고, 간혹 판단이 빠른 애들은 창문을 타고 뛰어내려 균열 범위 바깥으로 나서려 했다.
“세아야! 이세아!”
복도를 바삐 달리며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 세아를 찾았다.
얘가 오늘 교내봉사를 어디서 한다고 했지? 왜 진작 들어두지 않았는지 후회하며 휴대전화를 열었다.
세아에게서 온 연락은 없다. 이미 균열의 영향에 들어와 있어 전화를 걸어도 신호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찾아다녔을까. 기껏해야 일이 분 정도겠지만 가슴이 새까맣게 타는 것처럼 초조했던 시간이 흐른 다음.
쿠아아아아아앙-!
방금 막 건물 1층에 도착해 운동장 쪽을 둘러보려던 나는 위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고개를 올렸다.
칼에 베인 것처럼 갈라진 하늘. 길이는 수백 미터를 넘겼고, 그 중심을 기점으로 틈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빛을 띤 커다란 눈동자를 연상케 하는 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늘에 생겨난 그 원이, 아래편에 자리한 제일고 부지로 불길한 마력을 흘려보낸다.
위잉, 위이이잉…….
하늘과 땅을 연결한 원통 모양의 공간이 바깥과 내부를 단절시켰다.
균열 현상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교수님!”
“아, 진짜 돌겠네…….”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교내에 남아있던 학생들이 내게 달려왔다. 낯이 익은 2학년 학생들도 있었고, 모두 당황해하는 표정이었다.
인제 와서 왜 안 나가고 있었냐고 말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겠지. 나는 다만 필요한 말만을 일렀다.
“긴장 풀지 말고, 마력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충고한 직후.
슈우우, 스아아아-
나와 학생들 근처의 공간이 흐릿해졌다. 거기서 검디검은 빛무리가 발생했고…….
그르륵, 크륵.
우워어어어!
연결된 차원의 통로를 넘어, 악마의 지배를 받는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도합 다섯 마리.
실전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긴장해 주춤거렸고, 나는 그들 앞으로 나섰다. 접근해오는 몬스터 무리를 막아서듯이.
“교수님, 잠깐만요!”
“저희가-”
“일단 거기 있어요.”
학생들에게 단출하게 전한 나는 손에 쥔 검을 바로 세웠다. 몬스터 무리는 내 십 미터 안쪽에 이르러 있는 상황.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던 놈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스걱-
소리는 크지 않았다. 종이를 베듯 가벼운 소리만 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목이 잘린 몬스터들이 비틀거리다 바닥에 누웠다.
내 검엔 어느새 새파란 마력이 형체를 이루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어…… 교수님?”
학생 한 명이 얼이 빠진 것처럼 목소리를 흘렸다.
마법역학 연구교수 이도진.
강의력은 최고지만 안타깝게도 마력이 잘 모이지 않는다는 사람.
진유리의 복합 마법을 받아낼 만큼 기술적으로는 대단히 탁월하지만, 전투에서 오래 활약할 수 없어 길드에 입단하기는 어렵다는 사람.
내가 알기로는 제일고 학생들이 나한테 내린 평가가 그랬다. 오늘부턴 좀 달라지려나.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나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세아 학생, 우리 세아 어디 있는지 알아요?”
***
시간을 조금 되돌려 오후 여섯 시 이전.
제일고 부지 내에서도 가장 뒤편, 뒤뜰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던 이세아는 불만스럽게 눈을 흘겼다. 왼쪽 구역을 맡은 진유리를 향해서.
몇 초쯤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시선을 알아챈 진유리가 그녀를 마주 노려봤다.
“뭘 봐?”
“빨리 끝내게 제대로 해.”
“제대로 하고 있으니까 네 쪽이나 신경 써줄래?”
“…….”
이세아가 보기엔 영 아니었지만 치고받고 싸워서 벌을 받는 처지에 또 싸울 순 없는 노릇이라 질책을 이어나가진 못했다.
사실 진유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열심히 집게를 들고 곳곳을 오가며 쓰레기를 줍고 있는 건 자신뿐. 유해빈 역시 태평한 걸음걸이로 산책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아, 어느 할 짓 없는 인간이 여기다 종이비행기 접어서 날려놨냐? 뭔 초등학생도 아니고.”
“…….”
그렇게 투덜거릴 시간에 어서 줍고 쓰레기봉투에 넣으면 될 텐데. 쓸어내라는 나뭇잎은 안 쓸어내고, 커다란 대빗자루를 들고선 기타 치는 흉내만 내고 있다.
지난 열흘간 그래왔듯이 공동 노동이라는 제도의 폐단을 다시금 곱씹은 이세아는 초조한 눈길로 휴대전화의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여섯 시네…….’
빨리빨리 하면 여섯 시 반까지도 충분히 끝낼 수 있을 텐데. 이 속도라면 아무리 빨라도 일곱 시를 훌쩍 넘겨야 얼추 마무리될 듯했다. 이세아로서는 단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기다리게 하기 싫은데.’
오빠는 지금도 그녀가 교내봉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말로는 논문 쓰느라 바쁘니 끝나면 아무 때나 연락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게 절반쯤은 거짓말이라는 걸 이세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진유리에게 차갑게 이르고 말았다.
“계속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너만 다음 주에 다시 해. 난 빨리 끝내고 가야 하니까.”
“뭐?”
진유리가 손에 들고 있던 집게를 땅에 툭 던졌다. 그리곤 이세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혼자 다 하는 척하지 말고, 네 거나 잘하라니까? 치우는 양은 다 똑같은데.”
“어우, 너네 또 싸우게? 난 이번에는 잘못 없다. 안 끼어들 거야. 또 싸우면 교내봉사가 아니라 바로 정학 직행일걸?”
말리는 듯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표정의 유해빈도 얄미웠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은 이세아는 진유리를 무시하고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싸워봐야 마치는 시간만 늦어지니까.
그리고…….
셋 중에서 가장 먼저 하늘을 바라본 건 유해빈이었다.
“어? 어어?”
또 무슨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저러나 부아가 치밀어오르면서도 이세아는 유해빈이 보고 있는 곳을 올려다봤다.
어차피 별것도 없을 테니까. 확인한 다음 다그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아…….”
이세아는 저도 모르게 침음하고 말았다. 불그스름한 하늘이 갈라지는 광경을 목격했기에.
이내 진유리가 중얼거렸다.
“저거…… 균열 아냐?”
제일고를 한가운데부터 범위가 점차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깨달은 이세아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집게를 내동댕이치고 달려갔다.
“야, 이세아!”
“너 어디 가!”
유해빈은 물론이고 진유리조차 다급히 외쳤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세아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도진이 머물고 있을 연구실로 서둘러 가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