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Chapter 7. 유해빈 (1)
이거 앞으로 꽤 유용하겠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신의 탄생>의 클리어 보상인 스킬. 다섯 개의 후보 중에 내가 택한 건 A+ 랭크의 ‘인식지배’였다.
A부터 S 랭크까지 선택지가 여럿이었고, 무력적으로 도움이 될 것도 있어 고민이 됐는데…….
고르고 나니 이걸로 선택하길 잘했다 싶네.
전투 능력이야 기존에 보유한 스킬·특성을 단련하고 포인트를 사용하면 끌어올릴 수 있는 데 반해 정신에 간섭하는 기술은 또 언제 얻을지 장담을 못 하니까.
항상 서연희랑 찰싹 붙어 다닐 순 없는 노릇이고, 그러면 나도 괜찮은 정신계 스킬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운신의 폭이 넓어지겠지.
“후우…….”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방금 잠들게 한 세아와 기절시킨 진유리를 비롯해 의식이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폐허가 된 건물을 돌아다니며 진유리에게 한 것과 똑같이 인식지배를 걸려 해도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다. 내가 뭘 했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뜻일 터.
감시 카메라도 망가뜨려 놓았고, 균열의 영향권에서 마력 기기가 파손되는 건 그리 드물지도 않은 일이다.
게다가 다음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것보다 바깥에서 길드가 도착하는 게 더 빠를 테니…… 오늘 해야 할 일은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단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
-스킬 ‘기척감지’를 발동합니다. (랭크 B+)
+
딱 한 명. 사실은 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한쪽에 뻗어 있는 유해빈. 나는 그동안 아껴뒀던 OX 질문을 사용하기로 했다.
+
OX 질문 (1/1)
-질문 내용: 제1 아카데미 고등 과정 2학년 유해빈이 3월 28일 자정까지, 자신이 아는 이도진의 정보를 누군가에게 알리는지 여부
-정답: X
+
“…….”
그걸 확인하자 뭔가 번뜩하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킬 더 이블> 1권에서 주어진 두 번째 서브 퀘스트. 3월 28일 자정까지 유해빈을 육체적으로 완전히 제압할 것. 추가 보상은 그와의 관계에 따라서 차등 지급된다고 했다.
서브 퀘스트.
방금 OX 질문으로 파악한 정보.
그 두 가지를 종합하니 어렴풋이 결론이 나왔다.
<킬 더 이블>에서 유해빈이라는 인물이 맡을 역할이 무엇인지.
쿠아아아앙-!
그때 운동장 부근에서 소란이 일었다. 균열 내로 길드가 진입한 듯싶었고, 검은 안개를 풀어낸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사망 0명. 부상자는 학생과 교직원, 길드의 각성자들까지 포함해 스무 명가량. 오후 여덟 시에 이른 무렵, 마침내 제일고에 펼쳐진 균열 현상이 걷혔다.
그리고 사십여 분이 흐른 다음.
치료를 마치고 귀가한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세아에게 청했다.
“나도 봐도 돼?”
“…….”
요샌 그래도 말 걸면 대답을 꼬박꼬박 해줬는데. 잠시 나를 흘겨보곤 머리맡에 놓아둔 과자 봉지로 손을 뻗을 뿐이다. 살며시 다가간 나는 세아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오빠 얘기는 뭐라고 적혀 있어?”
“……내가 뭐 보는 줄 알고.”
“제타 보는 거 아냐? 너 요즘 거기 빠져 살잖아.”
제타라는 건 제1 아카데미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의 줄임말이다. 나도 회원이었지만 졸업하고 권한이 없어진 터라 더는 무슨 글이 올라오는지 모르지.
내가 취직하고 세아가 부쩍 저기 들어가는 빈도가 늘어난 걸 봐선 내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는데…….
요 며칠 그럭저럭 설명도 해주더니 오늘은 애가 되게 쌀쌀맞네.
“지금도 화났어?”
“화 안 났어.”
안 나긴 무슨. 집에 올 때까지 입 꾹 닫고 있었으면서.
길드의 각성자들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난 세아는 두 시간 내내 나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균열을 빠져나온 다음에야 물었다.
왜 바깥으로 피신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느냐고.
솔직히 나도 걱정한 터라 그러는 너는 왜 학교로 돌아왔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가 엄청 심각한 표정이어서 차마 그러진 못했지.
스윽, 휘익-
내가 살금살금 엿보려 하자 세아가 손을 움직여 휴대전화를 감췄다. 그리곤 픽 내뱉듯이 답해줬다.
“……힘숨찐이래.”
“푸흡.”
세아가 쓸 법한 단어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러자 종전보다도 더 차가운 눈길이 나를 향했고, 나는 그제야 둘러댔다.
“그런 건 아닌데.”
최근 들어 예전보단 체내에 마력을 모을 수 있게 됐고, 배운 가락이 있어 몬스터 한둘은 상대할 수 있으나 지속력은 여전히 낙제점을 면치 못할 수준.
그 정도로만 추측하도록 보여줬는데…… 그것만 해도 나름대로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제타에서도 시끌시끌하지? 누구 이야기가 제일 많아?”
“그냥, 딱히.”
그야 균열 자체에 대한 화제가 중심이겠지.
하지만 말하기 싫어하는 거로 볼 때 굳이 한 명 콕 집으라면 세아 본인 아니면 나인 듯했다. 남매가 서로 걱정해서 찾아다니느라 둘 다 균열 내부에 남았다, 그런 얘기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사고였지만 주목도를 올리는 측면에선 나쁠 게 없었다. 세아도 다치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일이 잘 풀렸지.
그쯤 해서 대화를 마무리한 나는 내 방에서 옷을 챙겨입고 나왔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으려니 세아가 물었다.
“어디 가?”
“잠깐 산책하다 오려고.”
“……이 시간에?”
“응, 생각할 것도 있고 혼자서 좀 걷다 오려는데 얼마 안 걸릴 거야. 두세 시간?”
“산책을…… 세 시간이나 한다고?”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던 세아의 표정이 다른 느낌으로 바뀌었다.
“차 가지고 가는 거지?”
“드라이브가 아니라 산책이라니까…….”
방금 우리가 나눈 말을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된다.
<또 여자 만나서 환락의 밤을 즐기고 오려는 것 아닌가? 나는 이미 눈치챘다.>
<절대 아니니 부디 억측은 자제해주길 바란다.>
이윽고 세아가 혼잣말하듯, 하지만 분명 나 들으랍시고 중얼거렸다.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걷는 거 좋아하시나 보네.”
“……다녀올게. 오면서 아이스크림 좀 사 올까?”
“됐어, 추우니까 일찍 들어와.”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여동생이 오빠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게 기꺼워 나는 살짝 웃으며 현관을 나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서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곧 재잘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준비 끝났어? 걔도 슬슬 들어갈 것 같던데.>
“그래요? 그럼 서둘러서 갈게요.”
<킬 더 이블> 1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 포켓몬 하나 잡으러 갈 시간이었다.
***
오후 아홉 시에 가까워진 시각.
편의점 도시락이 든 봉투를 팔랑거리며 걷던 유해빈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집 떠나~ 균열 타고~ 제일고로 가는 길~”
실제론 아카데미에서 장학 지원을 받아 빌린 오피스텔로 가는 중이었지만 유해빈은 자신이 개사한 가사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여겼고, 되려 자부심까지 가졌다.
‘내가 노랫말 바꿔서 부르는 재주도 있네.’
그 뒷부분은…… 아무래도 마음이 아파 이어 부르지 못했지만.
저 멀찍이 오피스텔이 보일 즈음 유해빈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오른손을 빼냈다. 손엔 휴대전화가 쥐여 있었고, 화면을 켜니 제1 아카데미 익명 커뮤니티 앱이 나타났다.
-
글쓴이: 익명 (글쓴이)
날짜: 3/26 20:32
제목: 근데 도진쿤 ㄹㅇ 힘숨찐 맞는 거 같은데
내용: 검 쓰는 자세 개깔끔하더라
마력도 만약에 보조마력 배터리 같은 거 있다 치면 교수 안 하고 헌터 해도 되는 실력이었음
댓글:
-익명 1: 교수님 보조 배터리 내가 할게 ㅎㅎ
└익명 2: 그 사람 스물다섯 살인데 정신 차려...
-익명 3: 나 진심 이세아 너무 부러움 여동생 찾느라 균열에 남은 오빠 무슨 영화도 아니고 ㅋㅋ
└익명 2: 정신 차리라고......
└익명 6: 집에 가자마자 제타 들어온 이세아 검거
-익명 4: 둘이 사이 별로라던데 그거도 뻥 아님? 서로 찾느라고 둘 다 도망 안 갔다며
└익명 5: ㄹㅇ 남매끼리 사이 안 좋은 컨셉까지 뺏어가자나 ㅋㅋㄱㅋㄱㅋㅋㅋ
-
“맞는 말이네.”
피식 웃은 유해빈도 댓글을 달려고 했다.
‘나도 봤는데 아픈 척하는 거 확실하다’라는 식의 농담인 듯하나 실은 진실을 담은 말.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타악-
신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
유해빈은 정면을 바라봤고, 그 시점에 벌써 직감하고 있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왜 건드리고 난리야…….’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접근해왔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어둑한 골목이라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긴 어려웠으나 두 사람. 둘 다 검은빛 안개를 몸에 휘감고 있었다.
그중 키가 더 큰 사람이 앞으로 나서 입을 뗐다. 마력으로 변조해 탁한 목소리였다.
“제일고 2학년 유해빈, 맞지?”
“그런데요?”
“오늘 발생한 균열 현상은…… 네가 한 짓인가?”
“아 씨, 짜증 나게 뭔 소리세요.”
유해빈이 발끈하며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싱숭생숭했는데. 필시 지난 십 년간 지내온 세월을 모두 통틀어도 오늘이 가장 기분이 안 좋은 날이리라 내심 되뇌며 길을 가로막은 이에게 일렀다.
“그쪽 누군지 나도 대충 알겠는데…… 서로 모른 척하고 살면 안 돼요? 나 아무 데도 나불거릴 일 없고, 일단 학교 졸업장 따는 게 목표인데.”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 그건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고,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하고 싶었다.
이도진이라는 사람이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도 행동으로까지 옮기진 않았다.
막상 하려니 귀찮기도 했고, 친구인 이세아의 오빠이기도 하고, 사람이 나빠 보이는 것도 아니라서. 이젠 달리 판단해야겠지만.
‘균열이 뭐가 어째?’
특히나 거슬리는 말이었다. 자신이 균열을 발생시켰다고 의심하다니.
그건 유해빈에게 있어선 어처구니없이 시비를 거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 발언이었고, 해서 한 걸음 발을 떼며 경고했다.
“진짜, 나 건드리지 마요. 나도 신경 끌 테니까 조용조용히 살자고요.”
한데 그때.
뒤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체구가 작은 인영이 되받았다.
“그렇겐 못 하겠는데?”
“……!”
아주 맑고 아름다운 여자 목소리.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유해빈은 뒤로 크게 물러섰다.
‘이거 큰일 난 건가……?’
한순간에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저 여자가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조금 늦었다.
휘익-
여자가 손을 휘두른 직후.
콰아아아아아아-!
쉬이 떨쳐내기 어려운, 폭풍처럼 발산된 마력이 유해빈을 저 하늘 높이까지 휩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