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아들은 최종보스-29화 (29/207)

#29화. Chapter 7. 유해빈 (3)

***

길게 말하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라겠지만, 짧게 하면 고작 몇 문장으로 줄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유해빈. 얘는 균열 너머의 다른 세상에서 왔다.

천 년 이상 이어진 악마의 지배에도 영혼을 종속당하지 않은 일부 존재들, 그중에서도 그들을 이끌어온 우두머리의 혈손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력의 총량과 지배력으로 추론한 것처럼 인간도 아니었다. 악마가 침공하기 전까진 균열 너머의 세상에서 가장 강대했던 종족.

“용? 드래곤?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근데 뭐, 쫄딱 망했죠. 제가 여기 올 때도 개판이었으니까 지금은 아마…….”

이십여 년 전. 유해빈이 태어나기 전에, 혁명군은 오랜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궐기했다. 모든 악마의 위에 군림하던 신적인 존재가 36 영웅에게 패배해 소멸하고, 이젠 그런대로 해볼 만하다고 여겼기에.

“일이 년으로 끝날 싸움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더라고요. 백 년, 이백 년, 어쩌면 다시 천 년이 지나야 할지도 모르지만…… 악마 새끼들도 이래저래 비실비실해졌고 자기네들끼리도 막 치고받는 상황이라, 영혼 지배만 어떻게 되돌리면 승산이 없진 않다고 여겼죠. 상대 전력이 그대로 우리 쪽으로 들어오는 거니까요. 제가 나이 속이고 그런 건 아니라서 실제로도 열여덟 살인데, 저 어릴 때까지는 음…… 제가 알기론 성과가 아예 없지도 않았어요.”

<세계의 수호자> 본편에선 영혼 지배를 되돌리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악마의 수장이 소멸하고, 그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없게 되어 어느 정도 틈이 생긴 거겠지.

작품 최후반부에 균열 너머의 세상을 묘사하며 내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그런데…… 어째서 실패했지?”

기실 물어보면서도 나는 답을 예감하고 있었다. 유해빈이 혈혈단신으로 이 세상에 건너온 게 십 년 전이라니까.

필시 내가 아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소문이 돌더라고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균열이 다시 잦아질 거라고. 악마 놈들도 뭘 꾸미는 것 같았고, 자기들끼리 휴전하더니 작정하고 저희한테 쳐들어왔죠. 그 싸움에서 엄청나게 큰 균열이 열렸는데, 어른들이 도와줘서 저만 균열 타고 여기로 도망쳐왔어요. 그다음부터 어떻게 됐는지는 저도 몰라요. 다시 돌아갈 방법도 없고, 적당히 고아인 척하면서 살다 보니까 벌써 십 년이나 지났네요.”

“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글쎄요…….”

내 질문에 유해빈이 허탈해하는 웃음을 흘렸다.

슬프고 화가 나지만, 그런데도 너무 막막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일단 졸업하고, 길드 같은 데 들어가서 헌터로 활동했겠죠? 돌아갈 방법을 찾든 악마 놈들 죽이는 거든, 강해지고 출세해야 가능한 거고요. 제일중 입학해서 세아 봤을 때는 괜히 반가웠어요. 걔랑 처음 보는 거긴 해도 우리 윗세대는 간접적으로 전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뭐…… 걔 성격이 좀 조용해서 바로 친해진 건 아닌데, 그래도 지내다 보니 친해졌죠. 그리고 이건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진유리 걔는 중1 때부터 이세아한테 시비 걸고 다녔어요. 이세아는 딱 봐도 그런 거 시시콜콜 말 안 해줄 거 같아서 제가 친구로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 그래, 고맙다.”

말하면서 점점 표정이 바뀌다 결국 의미심장하게 고자질하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들어보니까 어릴 때부터 고생 많이 하면서 산 것 같은데, 타고난 성격 덕분인지 애가 회복이 빠르네.

정황은 그쯤 들었으면 충분하고, 나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

“본체로 변신은 못 하나?”

“아, 그거요? 정말 하려면 아주 못할 건 아닌데, 지금은 자제하고 있죠.”

본인도 안타깝다는 듯이 답한 유해빈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로 넘어올 때 혹시라도 들키지 말라고 어른들이 조처해준 게 있거든요. 지금 모습도 살짝 바꾼 건데, 어디서든 제 앞가림할 만큼 강해지기 전까진 어지간하면 이렇게 살라고요. 한 번이라도 본체 돌아가고 나면 마력 검사에서 바로 걸리니까, 그리고 이젠 본체랑 전투 능력 차이도 크게 안 날 것 같은데…… 이건 막상 돌아가 보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장담을 못 하겠네요.”

거기까지 털어놓은 유해빈이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내가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 묶어놓은 거 안 풀어주는 거냐는 무언의 시위였고, 나는 손을 휘둘렀다.

쉬익-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신체적인 결박에서 벗어난 유해빈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아으으으…… 온몸이 쑤시네. 음, 그래서…… 이번엔 제가 몇 개만 여쭤봐도 돼요?”

“말해봐.”

“오빠, 아, 그러니까 세아네 오빠. 교수님이 아까 보여준 거, 어깨에서 검은 마력 팔락이던 거랑…… 날 왜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질문이라곤 하나 유해빈의 눈빛에선 이미 확신에 가까운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한 달 다 돼가네요. 파티에 난입해서 산일전자 염의준 부회장을 살해한 테러조직 팬텀. 거기 핵심 간부로 추측되는 사람이…… 교수님과 같은 기술을 쓴다고, 저는 알고 있는데.”

“좋아, 내가 그자라면?”

“이유를…… 알고 싶네요. 그냥 죽였을 리는 없잖아요?”

나는 단출하게 답했다.

“복수하고 싶어서.”

“무슨, 복수요?”

“십 년 전에 발생한 대균열. 자기 사리사욕 챙기려다 그걸 일으키고, 진실을 은폐한 놈들. 그 쓰레기들 다 죽여버리는 게, 그게 내 목표야.”

말하면서 나는 유해빈의 표정을 눈여겨봤다.

경악에 이어, 점차 증오가 스미는 걸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자연 발생한 현상이 아니라, 인간들이 개입해서 벌어진 일이고, 그러면, 어, 그러면…….”

유해빈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내 원수들은 그의 원수이기도 할 테니까.

만약 대균열이 없었다면.

악마들이 그걸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면.

세력 다툼을 멈추고 합심해, 혁명군의 본거지를 습격해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얘의 지난 십 년은 지금과 꽤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유해빈이 낮은 어조로 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어떤 놈들인데요?”

슬슬 때가 되었다 싶었던 나는 권유를 담아 답했다.

“나도 다 알진 못해. 원한다면 네 힘으로 알아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랑 함께.”

“…….”

유해빈이 내 눈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이 애가 어떤 답을 돌려줄지 깨달았다.

십 년 전 장례식장에서.

서연희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정신이 멍해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 앞에 섰을 때.

나는, 지금 유해빈과 같은 눈빛으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로 데리고 올 때까진 어떤 말로 설득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지만……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거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얘는 팬텀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돼 있다고,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처럼.

그즈음 서연희가 문을 열고 이 방으로 들어왔다.

“얼추 마무리됐어? 응? 아, 한창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구나?”

“누구예요?”

“우리 보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던 서연희. 그녀가 우리 쪽으로 가까이 오며 모자를 벗었고, 드러난 외견에 유해빈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왜? 내가 너 아는 사람이랑 좀 닮았니?”

그러자 내 쪽을 본 유해빈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아니죠?”

“절대 아니고, 장난친다고 저렇게 다니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렇게 안 생겼어.”

“아니, 근데…… 와, 기분 되게 이상하네…….”

혼잣말로 되뇌는 유해빈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려 나는 서연희를 흘겨봤다.

열흘 전부터 바꾼 겉모습. 이십 대 버전의 세아가 나를 보며 생긋 웃는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심각한 어조로 그녀에게 일렀다.

“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 모습으로 계속 다닐 거면 나는 같이 못 다녀요. 제발 부탁인데 다른 모습으로 바꿔서 다니자고요, 네?”

“그러면 바꿔주는 답례로 나한테 뭐 해줄 건데?”

“됐습니다, 같이 안 다니고 말지.”

“흐응…… 그래?”

여기서 지고 들어가면 건수를 크게 잡힐 듯해서 일부러 강경하게 대응하자 서연희가 옅게 콧소리를 흘린다.

그리곤 토라진 듯한 목소리를 꾸며서 재잘댔다.

“도진이 너, 오늘은 옆에 보는 사람 있다고 세게 나오네? 얘 평소에는 나한테 엄청 상냥하고 잘해주거든.”

무슨 이상한 자랑을 하더니 손으로 얼굴을 쓸었고, 체구는 그대로지만 이목구비의 느낌이 살짝 바뀌었다. 이젠 세아라기보단 뭐랄까…… 세아 계열? 그런 느낌이네.

이내 서연희가 내게 물었다.

“둘이 무슨 얘기 했는지 나한테도 설명해줄래? 그거부터 듣고 나서 해야지.”

나는 그녀에게 앞선 대화를 들려줬다. 유해빈이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 팬텀에 들어오면 뭘 원할 것인지.

유해빈에게도 팬텀이라는 조직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했고, 서연희가 제안했다.

“해빈이라고 부르면 되니? 너도 소원을 빌어야겠는데…… 어떤 거로 할지 결정할 시간을 줄까?”

“아뇨, 괜찮아요.”

즉답한 유해빈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일렀다.

“내가 들은 모든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대균열에 관여한 인간들과 악마를 상대할 힘이 필요해요.”

“똑똑하네?”

서연희가 칭찬처럼 말했다. 유해빈은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지 당장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팬텀에 입단하라는 제안을 거절한다면 자신이 여길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소원에 조건을 건 거다. 계약 자체까지 속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하고서.

“애가 머리 제법 잘 돌아가죠? 학교에서도 요령 좋게 하더라고요.”

“그러네. 데리고 다니면서 잘 키워봐.”

“정규 단원이면 자기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찾아야지 제가 어떻게 일일이 가르칩니까.”

“수습 기간인데 도진이 네가 책임자니까 잘 해줘야지. 어깨에 노란 견장 같은 것도 달게 할까? 병아리 삐약삐약. 용이라니까 이미지도 맞고.”

“그거 종족 차별이에요.”

“……딱히 의심할 필요까진 없었던 것 같네요.”

나와 서연희가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는 걸 보곤 유해빈이 김이 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시작할게?”

“……네.”

서연희의 말에 유해빈이 답했고, 넓은 방 중앙에 붉은 빛무리가 일렁였다.

일 초, 이 초, 어느새 삼십여 초가 흘렀고, 나는 계약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다른 멤버들보다 시간이 더 소요될 거란 생각은 했지.

유해빈이 우리를 믿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얘를 믿을 수 없다. 마음의 흐름을 넘어 기억 자체까지도 일부분 살펴야 할 터.

한데 갑자기 서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나는 즉각 움직이려 했으나 그녀가 손을 뻗으며 가로막았다.

“아냐, 괜찮아. 애가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 싶어서. 음, 으음…….”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거겠지. 하지만 서연희로서는 드물게도 당황한 눈치인데. 유해빈을 보니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중이다.

그때 빛무리가 걷혔고, 계약 당사자 두 명이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쳤다.

유해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생긋 웃은 서연희가 손뼉을 치며 일렀다.

“좋아. 계약은 잘 끝났고, 오늘은 이만하고 해산할까?”

“뭔데요?”

뭘 봤길래 둘이 시선을 교환했냐는 질문.

서연희가 장난스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답했다.

“안 돼, 프라이버시라서 못 알려줘.”

“또 그거예요?”

일전의 회합에 참석했던 토끼 가면과 여우 가면. 그 둘의 신상명세도 프라이버시라며 내게 알려주지 않았지. 반드시 알아야 할 거였으면 말해줬을 테니 굳이 몰라도 되는 일일 거고.

불분명하나마 답을 일러준 건 유해빈 본인이었다.

“그냥, 제 개인사가 다사다난해서요. 썩 좋은 일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공개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내가 본 것만 해도 미안한데.”

둘이 합심해서 타박하니 나도 더 묻기 어려웠다.

정리가 얼추 됐으니 서연희의 말대로 해산해봐도 되겠지만…….

“잠깐만.”

나는 지금 막 방을 나서려 하는 유해빈을 불러세웠다.

“네?”

“마지막으로, 네가 해야 할 게 있어서.”

“뭐가 또 남았니?”

서연희가 의문스럽게 물었고, 나는 과연 이게 맞는 일인지 고민하면서도 본론을 꺼냈다.

“나한테 한 가지 말해주고 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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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클리어 조건: 3월 28일 자정까지 제일고 2학년 유해빈을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굴복시킬 것

-클리어 보상: OX 질문 2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추가 보상이 존재하며, 유해빈과의 관계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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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퀘스트가 여전히 클리어되지 않고 있었다.

대항할 여력이 없을 때까지 몰아붙이고 기절까지 시켰는데도.

그러니 서브 퀘스트를 완수할 방법은, 적어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바로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게 하는 것. 왜냐면, 언어 표현도 육체 활동의 일부라고 할 수 있으니까.

“몸에 힘을 다 빼고, 진심으로 말해. ‘나 유해빈은 이도진에게 패배해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굴복했다’라고.”

“네? 어…… 패배해서, 육체가 뭐가 어째요? 완전하게 굴복?”

“도진아…….”

황당해하는 유해빈은 둘째치고 서연희가 보내는 눈길이 대단히 뼈아팠다.

한 번도 나를 저런 식으로 본 적이 없건만 흡사 인간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이어서.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아주 단호히 명령했다. 엎드려 절받기 식이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빨리, 네가 모든 수단을 써서 덤벼도 내게 이길 수 없었단 걸 인정해. 겸허히 받아들이고, 스스로 선언해.”

“……그냥 해줘. 쟤 가끔 저러니까. 오늘 건 좀 많이 심각하긴 한데…… 나쁜 뜻이 있어서 저러는 건 아닐 거야.”

서연희가 유해빈을 달래듯 말했고, 나는 다시금 친절하게 알려줬다.

“오늘 일에서 네가 상정할 수 있었던 모든 경우의 수를 통틀어서 인정하면 돼.”

“하…… 그거 뭐, 진짜로 하라고요?”

“농담하는 거 아냐.”

“교수님 얼굴 빨개지셨는데.”

“빨리해.”

“진짜 미치겠네…….”

연신 투덜대면서도 내 정면에 선 유해빈이 확인했다.

“그러니까…… 제가 습격받고, 교수님이라는 걸 알고 나서, 어쩌면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든 일과…… 제 모든 대항 수단을 통틀어서 패배했다고…… 그걸 인정하라는 말씀이죠?”

말을 이어나가며 점차 눈에 초점이 흐릿해지고 있다.

나로서도 안타까운 광경이었고, 하지만 꾹 참으며 답했다.

“……그래.”

“……난 기분 나빠서 더 못 보겠으니까 다 끝나고 나와.”

몹시 싸늘하게 이른 서연희가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저 사람이라면 재밌는 구경거리라고 웃으면서 볼 법도 한데. 어지간히 못 볼 꼴이긴 했나 보네…….

그리고 둘만 남은 방 안.

유해빈이 나를 올려다봤다.

몇 번 숨을 길게 내쉬며 머릿속으로 뭔가를 상상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유해빈은, 이도진에게 패배해, 육체, 하……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굴- 후우우…… 굴복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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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더 이블> 1권의 두 번째 서브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클리어 조건: 3월 28일 자정까지 제일고 2학년 유해빈을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굴복시킬 것

-클리어 보상: OX 질문 2회 (질문의 중요도에 따라 답변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유해빈과의 현재 관계에 따라 추가 보상을 산정합니다. (랭크 A)

-추가 보상: OX 질문 3회를 주관식 질문 1회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한 OX 질문은 2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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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긴 했구나…….

그리고 알고 보니까 얘가 되게 착한 애였다.

이런 거 하라고 시켰는데도 관계가 A 랭크라니까. 어지간히 착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지.

나는 정면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미안하고, 고생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어서.

하지만 뒤로 두 걸음 물러선 유해빈이 차갑게 거부했다.

“저한테 가까이 오지 마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그래, 미안하다…….”

씁쓸하게 웃은 내가 먼저 방을 나섰고, 균열부터 이어진 오늘의 사건은 그걸로 마무리됐다.

팬텀의 새로운 정규 멤버와 보상, 나와 유해빈은 물론이고 서연희까지도 진저리치며 입에 담기 싫어하는 기억 하나를 남기고서.

***

3월 30일, 화요일 오후.

마법역학 수업을 듣고 있던 이세아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뭐지?’

다른 것은 별반 차이가 없으나 강의실에 자리한 사람들 가운데 두 명만은 이전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옆자리에 앉은 유해빈.

이도진의 강의를 높게 평가하긴 했으나 이만큼 열정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는데.

오늘은 이렇게 활기차고 수업 참여도가 높은 학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람직한 자세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세아는 강의실 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쟤는 왜 저기 가 있어?’

항상 맨 앞자리에 지정석처럼 앉던 진유리가 오늘은 웬일로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평소와 달리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다가, 잠시 칠판을 바라보고,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또다시 이도진을 흘끗 쳐다본다.

‘나한테 못되게 굴지 말라고 오빠가 뭐라고 했나……?’

이세아 자신도 원치 않는 일이고, 그랬을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지금 진유리의 모습은…….

‘왜 오빠를 무서워하는 것 같지?’

그를 대하는 걸 꺼리는 거라고,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때 마침 이도진이 한 사람을 지목했다.

“자, 그럼 이 부분에서 출력과 저항 사이의 기본 공식을…… 진유리 학생이 말해보겠어요?”

“네, 네엣-!”

놀라서 벌떡 일어선 진유리가 음 이탈에 가까운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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